정착 대신 이동…인류 문명의 또 다른 절반
앤서니 새틴 지음
이순호 옮김
까치
이란 바흐티야리 부족민들은 지금도 여름 방목지를 찾아 양, 염소, 사슴을 몰고 평원에서 자그로스 산맥 높은 곳으로 이동한다. 바흐티야리족은 여기서 천막을 치고 한 계절을 보낸 뒤 다시 하산하는 정주형 노마드다. 이들의 스토리는 영화 ‘초원’으로 만들어져 1925년 미국에서 개봉되기도 했다. 1995년 기준으로 세계 인구가 78억 명, 도시 인구가 56억 명이었는데 유목민 인구는 4000만 명으로 파악됐다. 갈수록 전 세계의 유목민은 줄어들고 있다.
인류는 탄생 이래 대부분의 시간을 이동하는 수렵채집인, 유목민으로 보냈다. 농업혁명으로 한곳에 정착하면서 산 지는 1만 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정착민 중심의 역사다. 기록물이나 기념비를 거의 남기지 않고 ‘가볍게 산’ 유목민의 세계사는 누락돼 반쪽의 역사만 아는 셈이다.
『노마드』의 지은이 앤서니 새틴은 기존 역사서에 빠져 있거나 왜곡되게 그려진 유목민의 참모습을 제대로 알려주고자 했다. 이를 위해 지은이는 신화와 서사시, 유목민들이 남긴 유적 등을 넘나들며 새로운 역사의 영역을 개척하다시피 했다. 작가이면서 저널리스트인 지은이는 탁월한 이야기꾼으로 유목민의 장구한 1만2000년 역사를 대하소설처럼 엮어냈다. 딱딱한 역사서 같지 않게 문장이 매끄럽고 아름다워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실크로드가 등장하기 훨씬 이전인 5000년 전 유목민들은 가축 떼를 몰고, 말을 타고, 초원길을 가로질러 방랑하면서 서쪽과 동쪽, 산과 사막, 그리고 정착 문명의 중요한 두 축인 중국과 유럽을 이어 주었다.
기원전 2세기 유목민인 흉노는 만주에서부터 카자흐스탄, 시베리아에서 내몽골, 지금의 중국 신장에 해당하는 타림 분지까지의 모든 영토를 직간접적으로 지배했다. 스키타이 유목민과 그들의 동맹 유목민들도 흑해에서 카자흐스탄의 알타이 산맥 사이에 놓인 넓은 땅을 점유하고 있었다. 흉노와 스키타이 영역을 합치면 로마제국이나 한나라보다 넓고 강력했다. 그들의 지도자들은 중국 비단 의대를 착용하고, 페르시아 양탄자에 앉으며, 로마 유리를 사용하고, 그리스 금은 장신구를 애호했다. 유목민들은 자신들의 세계 안에 고립되어 있지 않았으며 광대한 유라시아 교역 세계의 달인이었다.
일반 역사서들은 훈족의 지도자 아틸라, 몽골제국의 황제들인 칭기즈 칸과 티무르 등 유목민을 야만인이나 미개인으로 다루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지은이 새틴은 유목민이 유사 이래 정착민들과 상호 작용을 했고, 방대한 지역에 걸쳐 대제국들을 건설하면서도 다양성을 존중하고 타종교에 관대하며 다문화주의를 포용하고 양심의 자유, 자유로운 이동, 시장 개방을 지지하는 방식으로 글로벌 교역망과 문화 융성의 발판을 마련했다고 일일이 증거를 들어가며 주장한다. 유목민은 언제나 인류 역사에서 적어도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고 문명이라고 부른 것의 발달에 필수적인 기여를 했다.
그들은 또한 모든 것이 상호 연결되어 있고 의존한다는 점을 인지했기 때문에 자연계와의 관계를 해치지 않고 오히려 증진시켜왔다. 정착민들이 개발주의를 내세워 주변 환경으로부터 점점 멀어진 것과는 대조적이다.
지금은 디지털 노마드 세상이다.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PC 같은 모바일 기기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디지털 유목민이 되어 전 세계를 누비고 다닐 수 있다. 오프라인에서도 야영(캠핑)이 붐을 이루고 있다. 어쩌면 노마드를 꿈꾸는 삶은 애초부터 유목민의 후손인 우리 안에 내재된 원초적 본능일 수도 있다. 하지만 현대인들이 역사상의 진정한 노마드를 이해하고 그들의 삶을 따라 살기는 쉽지 않다.
이 책은 당당히 역사의 다른 한쪽 주역이었으면서도 그동안 과소평가됐거나 아예 평가의 대상에서도 제외된 노마드를 오늘에 되살려 입체적이면서도 다양한 시각으로 세계사를 새롭게 바라보는 값진 교양역사서가 될 것이다.
한경환 자유기고가 khhan88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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