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복현 "삼라만상이 다 처벌 대상···배임죄 폐지 어렵다면 조건 엄격히 해야"
"주주 충실의무, 선진국선 당연
경영판단 원칙 명확하게 할것"
소송 남발 우려에 화두 꺼내
"정부 내부 합의된 사안은 없어
PF·밸류업 등 문제 해결 노력"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배임죄 폐지 필요성까지 언급한 것은 소액주주 보호를 위한 상법 개정안에 대한 재계의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상법 382조3에서 기업 이사는 ‘회사를 위해 직무를 충실히 수행해야 한다’고 돼 있는데 ‘회사’ 이외에 ‘주주’를 넣을 경우 배임 우려와 소송 남발로 기업 투자 등이 위축될 수 있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상법 개정을 포기할 수 없다고 판단한 이 원장은 기업 우려를 줄일 방안으로 배임죄 폐지 카드를 꺼냈다. 이사 충실 의무에 주주가 포함될 경우 소액주주에 대한 보호가 미흡하다는 이유로 배임죄가 될 수 있는 만큼 이를 폐지하거나 구성 요건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이 원장은 주요 선진국 어디에도 배임죄가 없다며 “배임죄는 삼라만상을 다 형사처벌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폐지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배임죄는 그동안 판단 기준이 포괄적이고 애매모호하다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형사처벌이 이뤄지고 있다. 형법상 업무상 배임에 상법상 특별 배임, 특정 경제 범죄 가중처벌법상 가중처벌 등 처벌 근거도 산재돼 있다. 국내외 경영 환경이 변한 만큼 배임죄도 바뀌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지속적으로 제기됐으나 법 개정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 원장은 “현실적으로 배임죄 폐지가 어렵다면 구성 요건에 ‘사적 이익 추구’ 등 구체적 사안을 추가해 배임죄 대상을 한정하는 것도 방법”이라며 “경영 판단의 원칙을 명확하게 하고 상법상 특별 배임죄를 폐지하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경영 판단의 원칙은 경영자가 기업 이익에 합치된다는 믿음으로 판단했다면 이로 인한 손해가 발생했더라도 배임죄를 묻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 원장은 경영 판단의 원칙을 법제화하자는 입장이다.
특히 기업에서 우려하듯이 일반적인 경영 활동에 대한 소송 남발 우려의 가능성은 없다고 설명했다. 최근 논의되는 기업 지배구조 문제는 물적 분할, 인적 분할, 인수합병(M&A) 등 기업 의사 결정 과정에서 지배주주들이 이익을 보고 나머지 주주가 손해를 크게 입는 일부 사안에 한정된 문제라는 것이다. 이사회가 의사 결정을 할 때 이해관계자들을 충분히 고려하고 적절한 보상을 제시하는지를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날 이 원장은 오너가 있는 국내 기업 지배구조를 흔들 생각이 없다고 달래기도 했다. 그는 “일본은 과도하게 주주권이 분산돼 주인의식이 없다는 것이 문제인데 반대로 한국은 책임감 있는 구조라는 장점이 있다”며 “주요 반도체 기업의 투자 리더십도 오너십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쪼개기 상장으로 대표되는 후진적인 기업 지배구조 문제 해결을 위한 상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재차 강조했다. 단순한 선언적 의미가 아니라 구체적인 절차 등을 명시해 예측 가능성을 확보하자는 것이다. 이 원장은 “주주 충실 의무 조항에 대해 해외 사례가 없다는 지적이 있는데 주요 선진국에서는 너무 당연한 이야기이고 입법례에도 반영돼 있다”며 “해외투자가들이 미국·유럽에 없는 것을 한국에서만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이날 이 원장은 과거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과 관련해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을 업무상 배임 등으로 기소했던 검사 시절과 입장이 달라졌냐는 질문에 “생각이 바뀐 것은 없다”고 답변했다. 그러면서 “전·현직 검사를 통틀어 배임죄에 대한 고민을 가장 많이 한 사람 중에 하나로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며 “거꾸로 배임죄를 많이 (기소)해 본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 더 설득력 있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다만 상법과 형법 개정은 법무부 소관 업무다. 이와 관련해 정부 내부에서 합의된 사안은 없다는 것이 이 원장의 설명이다. 이 원장은 “기획재정부·금융위원회나 경제수석실 등과 합의된 결론은 아직 없고 금감원장으로서 의견을 말한 것”이라며 “앞으로 정부 내 논의 과정에서 이러한 입장을 적극적으로 피력할 생각”이라고 했다.
한편 본인 거취에 대해 이 원장은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밸류업, 자본시장 선진화 등 벌여 놓은 것들이 자리를 잡아야 한다는 소명감이 있다”면서도 “임명권자가 결정할 문제”라고 말했다.
조지원 기자 jw@sedaily.comCopyright © 서울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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