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스&] 온화한 '이웃집 형' 리더십···부테린을 승자로 이끌다
17세때부터 남다른 추론력 두각
'스마트 계약' 착안, 이더리움 일궈
권력욕 없이 비영리·개발에 몰두
산책·사색 즐기며 위기땐 '승부수'
가상자산 대혼돈에도 가치 높여
2011년 겨울 캐나다 온타리오주 워털루대학의 1학년이던 17살 비탈릭 부테린은 비트코인 전문지인 ‘비트코인 위클리’에 1편당 5비트코인(BTC)의 고료로 글을 보냈다. 당시 달러로 환산하면 4달러 수준. 최저 고료였지만 부테린은 꾸준히 기사를 썼다.
그가 한 편을 쓰고 받았던 고료는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약 4억6000억원에 달한다. 비트코인에 관한 수많은 일화가 있지만 책장을 넘기다 누구나 전율을 느끼며 멈춰서는 부분이다. 그는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비트코인의 작동 원리를 쉽게 풀어 쓰는 재주가 있었다.
그의 명쾌한 추론에서 비범함을 발견한 이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2013년 11월 부테린은 누구나 쉽게 앱스토어에 업로드할 수 있고, 누구나 쉽게 계약해 공통의 원장을 소유하는 ‘스마트 계약(스마트 컨트랙트)’에 대한 생각을 담은 백서를 공유했다. ‘이더리움’의 씨앗이 된 사건이었다.
지난 3월 이더리움의 창시자인 부테린이 성남 판교의 한 카페에서 평범한 차림으로 개발에 몰두하는 모습이 화제가 됐다. 알려진 자산 규모만 수 조원대에 달하는 그를 눈앞에서 지켜본 이들은 ‘기말 고사를 앞둔 카공족’ ‘동네에 흔한 형’을 입에 올리며 친근감을 느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억만장자 실리콘밸리 거물들과는 행색이며 행동이 너무 다르다는 점에서였다.
3년 간 이더리움 재단의 관련자 200여명을 만나 이더리움의 탄생기를 집요하게 추적한 로라 신 전 포브스 편집장 역시 부테린의 남다른 특성에 주목했다. 이더리움의 탄생기를 다룬 ‘이더리움 억만장자들(위즈덤하우스 펴냄)’은 동아리와 같은 느슨한 수준의 결합 과정에서 벌어지는 온갖 역경을 극복하는 부테린의 성장기다. 원제 ‘암호화폐 사람들(The Gryptopians)’에는 한국판에 소개되지 않은 긴 부제가 있다. ‘이상주의, 욕심, 거짓말 그리고 첫 거대한 가상자산 광풍을 만든 것들’이라는 부제다.
2021년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더리움의 여정에서 가장 후회되는 것은 8명의 공동 설립자를 너무 성급하게 선택했고 모두가 떠나가게 내버려 둔 일이다.” 가상자산에 관심이 전혀 없는 이들조차 부테린이라는 인간상과 이를 둘러싼 수많은 이들의 엇갈린 욕망과 오해가 불러낸 드라마에 예상치 못한 흥미를 얻을 수 있는 부분이다.
부테린은 스티브 잡스, 일론 머스크 등 스스로 강력한 자기장을 갖고 태양계의 중심이 되려 하는 리더와는 달랐다. 고집이 센 편이 아닌데다 다툼을 기피하고 여기에 제일 어려워하는 것이 거절이었다. 창업과는 가장 거리가 먼 유형이다.
남들이 직함 때문에 목숨을 걸 때도 이해를 못했고 최고경영자(CEO) 역시 그 사람의 논리가 설득력이 있으면 넘겨줬다. 그에겐 이더리움 연구가 일순위였다. 초반 설립자들의 공로 또한 중요도를 나누기가 힘들어 하루라도 일을 하면 그 달에는 똑같은 이더리움이 할당됐다. 이더리움 코드 개발을 한 개발자와 임시 거처의 가벽을 설치한 목수가 같은 양의 이더리움을 받은 게 대표적인 사례다.
권력욕과는 거리가 먼 부테린의 성향 탓에 벌어지는 사건들로 이더리움은 초반에는 표류한다. 부테린은 3년 넘게 밍 챈이라는 상무이사의 조종에 따라 주변인들로부터 고립되기도 했다.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비즈니스맨들과 비영리를 내세운 개발자 간의 불화는 지난해 벌어진 오픈AI의 내분을 떠올리게 한다.
그가 잘하는 건 산책을 통한 사색과 필요한 시기에 결단을 내리는 일이었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능력도 갖췄다. 내분을 정리하고 이더리움의 발전을 가속화하고 가치를 높인 ‘탈중앙화 자율조직(다오·DAO)’, ‘하드포크(블록체인이 두 갈래로 나뉘는 일종의 소프트웨어 업데이트)’ 등이 이 과정에서 등장했다.
성장 과정에서 초기 멤버들은 대부분 이더리움을 떠났지만 그는 여전히 남아 연구를 하고 개발을 한다. 가상자산 광풍이 몰아치던 2018년 1월 부테린은 자신이 갖고 있던 이더리움 7만개를 개당 1300달러 수준에 매각했다. 현재 이더리움(개당 약 3514달러) 가치에는 턱 없이 못 미치는 금액이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그가 왜 여전히 편안한 차림으로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평범한 카페에서 개발을 하고 글을 쓸 수 있는지 잘 설명해준다. 책을 덮고 난 후 이더리움의 미래 가치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생기지만 권력욕과 영향력에서 자유로운 리더가 풍기는 매력과 편안함의 여운은 짙게 남는다.
정혜진 기자 madein@sedaily.comCopyright © 서울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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