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샤 니 두목이 다 불었어"… 중정 수사관이 뭔가를 디밀었다
⑫양한수 동아투위 위원
1974년 10월24일 발표한 ‘자유언론실천선언’이 올해로 50주년을 맞았습니다. "우리는 자유언론에 역행하는 어떠한 압력에도 굴하지 않는다"는 선언문에 따라 기자들은 자유언론 실천운동을 펼쳤고 그 과정에서 이듬해 3월 동아일보에서 130여명, 조선일보에서 33명의 언론인이 펜을 빼앗기고 거리로 쫓겨났습니다. 해직 후 50년 세월이 흘렀지만, 기자들은 아직도 언론사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자협회보는 10·24자유언론실천선언 50주년을 맞아 자유언론을 위해 분투하다 해직된 기자들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 결성의 원인을 제공한 두 주역 중 하나인 박정희는 심복의 총탄에 맞아 오래전 사망했지만 또 다른 주역인 동아일보는 삼류신문으로 턱걸이를 하며 오늘도 구차한 명줄을 이어가고 있다. 50년의 시간이 흘렀건만 단 한 번도 과오를 인정하거나 사과도 하지 않았다. 참으로 몰염치한 언론의 표본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라고 단언한다.
나의 유소년시절은 순탄하지 않았다. 젖먹이 시절 친모를 여의고 새어머니 슬하에서 자라다가 중3 때 아버지마저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새어머니는 이복동생들과 함께 분가하고 나는 인천에서 살던 10살 위의 형에게 맡겨졌다. 인천에서 서울로 통학하던 열차는 나의 놀이터고 공부방이었다. 고3이 되던 해 한 살 터울의 사촌형이 학폭에 연루돼 등교하지 못하고 집에서 입시공부를 하게 됐는데 친척들 사이에 공부 좀 한다고 소문난 나를 합방시키면 도움이 되겠다고 판단한 큰어머니 덕에 안국동으로 이주하게 됐다. 이듬해 나는 학비가 저렴하다는 이유로 서울대 사대 영어교육과에 지원해 합격했고 같이 공부하던 사촌형도 서울대 음대에 진학했다. 형의 입시 성공에 다소 공이 있으니 얼마간은 같이 지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으나 눈치가 보여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당시에는 입주가정교사 제도가 있었다. 이때 동아일보와의 첫 인연이 맺어졌다. 처음엔 광고비가 상대적으로 싼 한국일보와 조선일보에 구직광고를 냈는데 허탕이었다. 할 수 없이 가장 비싼 동아일보에 ‘서울사대 재. 경험 다. 입시지도 자신’식의 1단 2줄 광고를 냈는데 문의 전화가 줄을 이었다. 동아일보 광고로 숙식과 학비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었다. 물론 입시가정교사라는 것이 만능의 동아줄은 아니었다. 공부에 별로 생각이 없는 아이를 가르치는 게 쉽지도 않으려니와 학생의 성적이 오르지 않으면 해고당하기 일쑤였다.
대학생활의 풋풋한 낭만도 잊은 채 허덕이던 시절 새로운 기회가 왔다. 대학신문에 학생기자 모집광고를 보게 됐다. 취재해본 결과 월급을 주는데 하숙비보다 훨씬 많다는 것이었다. 학생기자는 11개 단과대학별로 1명씩인데 여학생이 많은 문리대와 사범대학은 여기자가 1명씩 추가돼 총 13명이었다. 편집국장은 문리대 민석홍 교수였다. 학생기자 생활을 하며 향후 진로를 언론인으로 정한 나는 도서관에서 매일 신문을 열독하는 등 나름 기자 시험을 염두에 두고 대학 후반전을 보냈다.
졸업을 앞둔 1967년 10월 동아일보에 수습기자 모집공고를 보고 군 미필자는 뽑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알면서도 경험 삼아 응시했다. 시험은 이틀에 걸쳐 실시됐는데 첫날 필기시험장인 중앙고등학교는 교정이 꽉 찰 정도로 응시생이 많았다. 받아쓰기 시험도 있었는데 가능한 한자를 많이 써냈다. 프레스센터에서 실기시험은 실제로 기자회견을 앞에서 연출하고 스트레이트와 박스기사를 쓰라는 것이었다. 군 미필자이기 때문에 별 기대를 안 했는데 의외로 김종철·남기재와 함께 ROTC생 3명이 합격했다. 동아일보 10기생의 면모는 화려했다. 어느 분의 표현대로 ‘팔도에서 모인 홍길동들’같았다. 후일의 이야기지만 동아일보 10기생이 5명의 중앙일간지 발행인을 배출한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권도홍 부장, 천관우 주필과의 인연
1970년 군에서 제대하고 동아일보 여성동아부에 복직했다. 한시라도 빨리 취재일선에서 ‘사회의 목탁’이 되고 싶었던 나는 그해 중앙일보 수습기자 시험에 응시해 합격했다. 면접을 앞두고 먼저 중앙일보에 들어간 고교 동창생에게 전화로 자문을 구했다. 그의 대답은 확고했다. “야야 동아일보는 최고의 신문이야! 좀 참고 기다려, 동아일보에서 수위를 할망정 중앙에는 오지마”라고 응답했다. 나는 면접을 포기했다.
여성동아부엔 동기생 최학래·정동익·황의방·임채정·유영숙 등 뛰어난 기자들이 즐비했다. 특히 권도홍 부장은 편집 4대천왕의 일원으로 불리우며 어떠한 내외의 압력에도 굴하는 법이 없는 편집자로 명성이 자자했다. 그런 데스크를 모시고 수습을 한다는 것은 행운이었다. 동아일보가 권력의 횡포에 무릎을 꿇고 113명의 금쪽같은 기자, PD, 아나운서들을 자르는 만행을 저질렀지만 이 시기의 동아일보는 좀 달랐다.
석간인 동아일보는 점심시간만 되면 데스크 주도하에 넉넉하게 한 잔씩 걸치곤 했다. 어느 날 권도홍 부장은 거나하게 취해 오수를 즐기고 있었는데 한 구부정한 늙은이가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부장석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무언가 청탁할 게 있어 보였다. 그 사람은 바로 김상만 사장이었는데 기자들 아무도 부장님을 깨우지 않았다. 한참 기다리던 김 사장은 권 부장이 기침할 기미가 없자 슬그머니 일어났다. 얼마 후 부장석 전화벨이 울리고 권 부장은 사장실로 향했다. 우린 모두 혼쭐날 것으로 생각했지만 결과는 의외였다.
당시 여성동아 표지는 유명화가들이 그린 반 추상 여성 초상화였는데 타 잡지와 차별화는 물론 화가들의 창작의욕 고취와 경제적 지원에도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김 사장이 동아일보 주최 국악경연대회 수상자를 표지모델로 천거했는데 권 부장은 ‘노’라고 답했다는 것이다. 우린 모두 권 부장의 무용담에 박수로 화답했다. 권 부장은 동아투위 사태가 발생하자 데스크로서는 이례적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표를 던졌다. 기자로서의 자존심과 의기가 하늘을 찌르는 선배였다.
후석 천관우 선생(1925~1991)은 동아일보 전성기를 이끈 편집국장, 주필이었다. 일찍이 소년시절부터 천재로 불렸으며 서울대 사학과 졸업논문인 ‘반계 유형원 연구’는 실학연구의 새 지평을 연 것으로 평가된다. 군계일학의 사학자로서의 길이 탄탄한데 굳이 언론인의 길을 걸은 것은 혼탁한 시국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언관 사관(言官 史官)’이란 선생의 저서가 상징하듯 신문기자는 사실의 기록자로서의 사관적 가치관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천 선생은 1968년 신동아 ‘차관’ 필화사건으로 동아일보를 떠났다가 다음 해 상근이사로 복귀했는데 편집에 관여하지 않고 사사(社史)를 담당했다.
이 시기 거구에 한복을 입고 두툼한 책보를 들고 출근하는 후석의 풍모는 그 자체로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후석의 사무실은 출판국과 편집국을 잇는 구름다리 끝에 있어 오다가다 자주 뵙게 되었다. 한번은 점심시간이었는데 같이 식사를 가자고 해서 현재의 교보빌딩 근처에 있는 복엇국집에 갔는데 예의 소주 3병 반주에 장단을 맞추다 녹아떨어졌다. 짜장면이나 해장국이 주 메뉴였던 시절이라 천 선생의 점심 초청은 호강 그 자체였다.
천 선생은 1971년 함석헌 선생 등과 함께 민주수호국민협의회 대표로 ‘반 박정희’운동에 앞장서기 시작했으며 그해 말 동아일보를 영원히 떠나게 된다. 천 선생이 동아일보를 떠나도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학생들이 키팅 선생을 향해 “오 캡틴 나의 캡틴”을 외치듯 동아일보 젊은 기자들에겐 여전히 우상이었다. 1974년 말 천 선생은 민주회복국민회의 결성을 주도하고 유신헌법개정 청원운동을 벌였다. 이때 나는 천 선생의 지시로 여러 사람의 개헌청원서명을 받아 전달했다.
이 일로 악명 높은 남산 중앙정보부에 연행돼 조사를 받게 되었다. 수사관들은 공갈과 협박으로 공포를 조장하며 천 선생과의 관계를 추궁했다. ‘악법은 철폐돼야 한다는 게 내 평소 소신’이라며 버티던 새벽, 수사관이 뭔가를 들고 와 디밀었다. “짜샤 니 두목이 다 불었으니 너도 빨리 쓰고 나가.” 천 선생 글씨를 잘 알고 있던 나는 그게 페이크가 아니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두 번의 해직으로 땀 흘리는 해외 건설 역군이 되다
1974년은 금기시되던 언론노조를 탄생시킨 의미 있는 해였다. 고준환 기자를 PD로 전보한 인사에 대한 반발로 시작된 우연처럼 보였으나 실상 그동안 여러 차례의 자유언론수호운동을 강화하기 위한 필연의 단결투쟁으로 봐야 한다. 중앙정보부원이 신문사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편집국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노조라는 합법적 기구를 통해 단결을 담보하는 것이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 우리 스스로도 놀랄 지경이었다. 조학래(지부장), 정영일(사무국장), 성유보(조직부장), 이부영(섭외부장) 등 노조 간부는 모두 향후 전개될 자유언론실천운동의 핵심이었다.
나는 총무부장을 맡아 노조의 마당쇠 역할을 했다. 동아일보는 전가의 보도인 해임의 칼을 빼들었다. 노조 간부 11명과 진작 미운털이 박힌 박지동 선배와 심재택을 포함해 총 13명을 즉각 해임했다. 그러나 우습게도 회사 측은 한 달여만에 기자들에 대한 노조 관련 징계를 ‘사면’한다며 후퇴했다. 이는 유신의 동토에서도 기자들이 단결만 한다면 어떤 권력과도 합법적으로 싸울 수 있다는 중대한 의미를 함축한 사건이었다. 우리의 노조 결성 경험을 한국일보 등 타 언론사에도 전수할 수 있었던 것은 큰 보람이었다.
노조의 성공 경험은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을 이전의 언론자유수호선언과 질이 다른 실천운동으로 격상시켰다고 평가한다. 왜냐하면 선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제작 거부 등 기자들의 단결된 물리적 힘으로 맞서 유신 이후 신문지면에서 자취를 감췄던 학생운동과 종교계의 인권회복기도회를 지면에 반영할 수 있는 동력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실천에 무게가 실렸다. 동아일보가 한 발짝 나아가면 다른 신문들도 한 발짝 나아갔다. 박정희와 중앙정보부는 유신 이후 언론을 마음대로 주물러왔으나 10·24 이후 이게 마음대로 안 되자 꺼낸 카드가 바로 광고탄압이었다.
동아일보 지면에서 광고가 사라지는 기괴한 현상이 벌어지자 시민들은 이것이 바로 박정희 정부의 언론탄압이라는 것을 즉각 알아차렸다. 동아일보의 백지광고 사태에 분노한 시민들은 격려광고로 응수했다. 이 기막힌 파쇼권력과 시민운동의 팽팽한 대립은 몇 달간 지속됐고 워싱턴포스트 등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무소불위의 유신권력도 통제할 수 없었던 자유언론의 불꽃은 김상만 사장의 배신으로 막을 내렸다.
1975년 3월 거리의 언론인이 된 우리는 즉각 동아투위를 구성하고 맨몸 투쟁에 나섰다. 성유보와 나는 유인물 제작 담당이었다. 우리가 진짜 동아일보라며 이른바 가리방 유인물을 제작해 시민들에게 박정희와 김상만의 야합을 규탄했다. 이 시절 나는 불과 만 29세에 불과했으나 이미 여덟 식구의 가장이었다. 첫 딸을 낳은 2년 후 쌍둥이 아들을 얻었고 세 젖먹이의 육아를 위해 가정부와 함께 장인·장모도 같이 와 있었다. 동아일보에서 두 번째로 해임되고 수입이 끊어지자 아이들의 우유값마저 위협받는 상황이었다.
그해 말 이계익 선배가 흥극통상이란 무역회사에 취직시켜줘 우유값 걱정은 면할 수 있었다. 이 회사엔 재벌이자 민주화운동의 숨은 공로자 채현국 회장과 당대의 협객 박윤배씨가 이사로 있었다. 1년여 지나 동기생 고준환의 주선으로 좀 더 안온한 직장인 호남정유(현 GS칼텍스)에서 사사(社史)를 쓰게 됐다. 월급도 넉넉하고 근무환경도 좋았으나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특히 ‘땡전뉴스’를 보는 것은 곤혹스러웠다. 문득 해외로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땡전뉴스를 보지 않을 수만 있으면 하는 생각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안 보면 될 거 아니냐고 했는데 그게 말처럼 되지 않았다.
그러다 우연히 대우의 해외 근무 사원모집 광고를 보게 됐다. 대우가 리비아에서 10억 달러 상당의 대형 프로젝트를 수주해 현장에 근무할 경력사원을 뽑는다는 것이었다. 대우에 입사해 바로 리비아행 비행기를 탔다. 땡전뉴스를 보지 않는 것은 다행이었으나 가족과 동아투위 동지들, 그리고 죽마고우들과 멀리 떨어져 지내는 것이 즐겁지만은 않았다. 다행히 직속 상사인 현장 소장이 신문사 근무하다 들어온 관리과장이 신기했는지 해외 현장의 특성을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특별히 챙겨줘 잘 적응할 수 있었다. 그분과는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왕래가 있을 정도로 정이 많이 들었다.
11년 가까운 대우 근무 기간 동안 7년을 해외에 근무해 본의 아니게 땀 흘리는 산업역군이 되었다. 해외 건설 현장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은 6개월에 한 번씩 국내 휴가를 다녀올 수 있었다. 그러나 기능공으로 불렸던 우리 노동자들은 휴가제도가 없었다. 몇 년씩 연속 근무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다 돈 많이 벌어 가족들에게 안락한 생활을 제공하고 싶은 열망 때문이었다. 어쩌다 계약기간 도중에 중도 귀국을 신청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대부분 부인의 일탈 때문이었다. 이들과 상담하는 것도 내 임무 중 하나였는데 상담하다 말고 같이 부여잡고 울은 적도 있었다. 해외 건설 붐의 이면에는 이런 아픔도 있었다.
해외 근무 기간 동안 언론 지형도 많이 바뀌어 한겨레신문이 창간됐다. 귀국해 양평동 한겨레 사옥을 방문, 성유보 편집위원장을 만나봤으나 이미 자리가 꽉 차서 내가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어 보였다. 장윤환 선배 등 한겨레에 자리 잡은 동아투위 동지들이 한겨레 근처에 있는 주막에서 막걸리 한잔 사줘 잘 먹고 돌아온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현역언론인들이여 언관의 무게를 느껴보시길
1991년 말 문화일보가 창간되면서 나에게도 기회가 왔다. 권도홍 부장이 이규행 발행인한테 추천해 16년 만에 언론계에 복귀할 수 있었다. 대우에서 내 마지막 직책은 대우통신 홍보실장이었는데 갑자기 사표를 내자 경악과 분노의 표정을 짓던 사장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미안한 마음이 그지없었으나 신문사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어찌하랴. 문화일보 논설위원실에는 우승용 선배, 박순철, 이종욱 등이 있었고 편집국에 국흥주와 내가 근무하게 됐다. 이규행 발행인도 동아일보 출신으로 동아일보가 좋은 기자들을 무 베듯 잘라낸데 대한 안타까움이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이미 한국경제 사장으로 언론사 경영에 탁월한 능력을 입증한 이규행 사장은 동아투위 위원들이 긴 언론계 공백에도 불구하고 중견 언론인으로서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으리라는 혜안을 갖고 있었다. 특히 경제부 데스크를 맡고 있던 국흥주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누군들 국흥주의 천재성이 번득이는 글을 좋아하지 않으랴.
문화일보는 특히 품격 높은 칼럼과 논설로 낙양의 지가를 올렸으나 정주영씨가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출발한 태생적 한계와 현대그룹과의 특수 관계라는 약점을 갖고 있었다. 언론이 재벌에 종속되면 알게 모르게 제약이 오게 마련이다. 그래서 더욱 동아일보의 독자들에 대한 배신이 안타깝다. 광고탄압 사태 때 격려광고로 보여준 우리 국민의 열화 같은 지지와 성원은 세계 어디에도 없는 창조적 저항운동이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후일 촛불운동에서 이런 감동을 맞볼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유신시대는 이런 국민적 지지를 받는 언론이 있었고 지금은 없다는 것이 불가사의하다.
최근의 우리 언론 상황은 가슴이 무너질 만큼 개탄스럽다. 얼마 전 ‘국경없는기자회’는 올해 한국의 언론자유지수가 전년 47위에서 62위로 15계단 추락했다고 발표해 이를 증명하고 있다. ‘기레기’라는 말은 얼굴이 뜨거워질 만큼 모욕적이다. 동아투위와 조선투위가 주축이 돼 창간한 한겨레신문마저 때로는 조·중·동 수구언론과 크게 다르지 않은 보도 행태를 보일 때 의아하기 짝이 없다. 현재 자유언론을 억누르는 윤석열 정권의 무도한 압력이 유신독재의 폭압보다 엄혹하다고는 보지 않는다. 물론 법치를 가장한 언론 탄압이 교묘하고 간특하긴 하다. 이런 시기에 현역 언론인들이 가슴에 새겨야 할 것은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의 한 문장이다.
“본질적으로 자유언론은 바로 우리 언론종사자들 자신의 실천과제일 뿐 당국에서 허용 받거나 국민 대중이 찾아다 쥐어 주는 것이 아니다.” 물론 어려운 환경에서 분투하는 다양한 매체의 현역 언론인들에게 존경과 격려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래도 현역 언론인들에게 천관우 선생이 언급한 ‘언관’의 무게를 느껴보라고 감히 권고해 본다.
※자유언론실천선언 50주년 준비위원회 후원
NH농협 301-0240-368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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