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원의 사견] '어려운 시험'을 위한 변명

서정원 기자(jungwon.seo@mk.co.kr) 2024. 6. 14.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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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6월 모의평가 직후 영어 난이도에 대한 불만이 폭주했다.

기함했다.

요즘 수능 범위는 과거 대비 반 토막이다.

"오늘날 학생들은 (제대로) 평가받지 않고, 평가받는 것 자체에도 관심이 없다. (중략) 자신이 뭘 잘하는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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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6월 모의평가 직후 영어 난이도에 대한 불만이 폭주했다. 이의신청 게시판은 어렵다는 볼멘소리만 절반 가까이였다. 특히 본인을 교사라 밝힌 A씨는 "수업 시간에 가르친 것이 하나도 도움이 안 되는데 이렇게 하면 일선에서 수업하기 정말 힘들다"고 했다.

기함했다. 어찌 무지보다 앎이 부끄러운 것이 됐나. 가르치기 편한 게 깊이 익히는 것보다 우선인가. 까다로우면 또 어떤가. 살다 보면 그런 것들투성이다. 원서에 낯선 단어가 많다고 덮을 텐가. 외국인이 말 길게 하면 뒤돌아설 건가. 언젠가부터 한국 사회에서 반지성주의의 징후가 곧잘 포착된다. 무식자가 왕이다. 뭬 자랑이라고 당당히 큰소리친다. '학문의 즐거움'은 어디 가고, '사교육비 축소' '내 새끼 지상주의'가 앞선다.

요즘 수능 범위는 과거 대비 반 토막이다. 미적분·확률과 통계·기하는 이과의 기본 소양인데, 이 중 하나만 골라야 한다. 국어도 선택제를 도입해 문법맹 졸업자들이 허다하다. 3년 뒤엔 기하가 아예 빠진다. 사교육 걱정을 없애겠다는 사람들이 만든 세상이다. 목표라도 달성했으면 모를까 사교육비는 3년 연속 최고치를 경신했다.

이젠 교실 앞으로 나와 문제를 풀라고도 못 시킨다. 수치심을 유발한다고, 왜 우리 애 기죽이냐고, 아동학대 아니냐고 민원이 들어와서다. 이러니 '문해력 소동'이 날 수밖에. '금일' '○명' '심심한 사과'라는 표현을 쓴 이들에게 비난이 쏟아졌다. 생경할 수 있다. 하나 알아가려고 하기는커녕 외려 "유식한 체하느냐"며 성내는 건 야만이요, 반지성이다.

10여 년 전만 해도 정상이었다. 고등학교 친구들은 지목됐을 때 기발한 풀이를 내놓기 위해 몇 날 며칠 궁구했다. 난 공학도였지만 교양 강의 '유럽지성사'를 수강했다. '군주론' '유토피아' '자유론' 등을 한 주마다 한 권씩 강독했다. 담당 교수 오인영은 "매주 치러야 할 독서 테스트는 유유자적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자리가 없어 못 들을 정도였다. 꼭꼭 톺아 소화한 고전은 지금도 영혼을 살찌우고 있다.

지적 낭만의 시절도 있었다. 1980~1990년대를 풍미한 지식인 정운영은 글 '대학서곡'에서 "철학자 스피노자는 '웃지도 말고, 울지도 말고, 오직 알려고만 하라'고 권고했는데, 대학이 바로 이래야 한다고 믿는다"고 썼다. 1960~1970년대 사랑받은 수필가 전혜린은 '목마른 계절'에서 고백한다. "밤을 새우고 공부하고 난 다음 날 새벽에 닭이 일제히 울 때 느꼈던 생생한 환희와 야생적인 즐거움을 잊을 수 없다. 머리가 증발하는, 그리고 혀에 이끼가 돋아나고 손이 얼음같이 되는, 그리고 눈이 빛나는 환희의 순간이었다. 완벽하게 인식에 바쳐진 순간이었다."

'쉬운 배움'이란 없다. 고돼야 과실이 달다. 안락함은 세계적 명문대 학생들조차 나태하게 만든다. 하비 맨스필드 하버드대 정치학과 명예교수는 최근 월스트리트저널과의 인터뷰에서 고등교육이 쇠락한 원인 중 하나로 '학점 인플레이션'을 꼽았다. "오늘날 학생들은 (제대로) 평가받지 않고, 평가받는 것 자체에도 관심이 없다. (중략) 자신이 뭘 잘하는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서정원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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