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ㅣ'K2의 눈물' 펴낸 이원섭 변호사] 죽음의 산 K2에서 산화한 숨은 영웅들 이야기

신준범 2024. 6. 14. 16:57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2008년 K2, 11명이 죽었던 그날을 치밀하게 책으로 쓰다

2008년 K2는 이틀 동안 11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 많은 이들이 죽은 걸까?

이원섭(77) 변호사는 원정을 다녀온 지 8년 만에 담담하고 냉정한 시선으로 당시를 돌아보고, 스페인과 영국까지 찾아가 당시 K2에 있었던 외국 원정대원들을 만나 인터뷰하며, 검사와 변호사를 거친 특유의 논리력으로 이야기를 써내려갔다. 그가 쓴 8년 전 K2에서의 이야기, 신간 <K2의 눈물>을 만나보자.

이원섭 변호사는 1959년 서울대 법학과에 입학해 법대 산악부 활동을 했다. 대학시절 북한산 인수봉과 도봉산 선인봉, 주봉 등이 그의 주된 등반 무대였다. 대학 4학년 때 사법고시에 합격한 그는 검사 생활을 했다. 변호사 전직 후에는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의 담당 변호사를 맡았을 정도로 실력 있는 법조인이었다.

서울대 법대산악부 출신인 이원섭 변호사는 환갑이 넘은 나이에 고산등반을 시작해 엘브루즈와 칸텡그리를 올랐다.

그를 산으로 다시 이끈 건, 위암이었다. 2002년 위암 수술을 받게 되었고 체중이 10kg이나 줄어들었다. 몸을 회복하며 운동의 필요성을 느낀 그는 해외 트레킹에 나섰다. 2003년 히말라야 칼라파타르(5,550m)를 다녀오면서 산에 대한 열정이 다시 깨어났다.

환갑이 넘은 나이에 그는 고산등반을 시작했다. 2004년 엘브루즈(5,642m), 2007년 칸텡그리(7,010m)를 올랐다. 같은 해 한왕용 대장이 이끄는 실버클린마운틴 대원으로 마칼루 하이캠프(5,700m)까지 올랐다. 고산등반에 자신감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 변호사는 "산에 대해서 겁이 없었다. 젊은 사람들보다 천천히 갈 뿐 못 갈 이유는 없다"고 했다.

2008년 그는 만 69세, 즉 우리 나이 70세에 K2 원정에 나섰다. 원래 8,000m 고봉들 중에서 그나마 등반이 수월하다고 알려진 초오유(8,201m) 원정을 준비했으나 티베트 반정부시위로 현지 사정이 악화되어 원정이 무산되었다. 이때 2007년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송귀화(당시 60세)씨의 권유로 K2 원정에 나서게 되었다. 김재수 대장의 경남연맹 팀에 합류한 것이다.

이 변호사는 김재수 대장에게 "정상에 가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라며 "갈 수 있는 데까지만 가겠다"고 안심시켰다. 또 "이번 원정을 기록해 원정기를 책으로 쓰겠다"고 얘기했다. 7,300m 지점인 C3까지 진출했던 이 변호사는 "원정기가 사고보고서가 되어 버렸는데, 이걸 책으로 써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산악사고에 대해 사실대로 밝히는 책이 나와야 한다는 일념으로 완성하게 되었다고 얘기한다.

K2 등반루트.

BC에 9개 나라의 원정대 모여

2008년 7월 말 파키스탄 K2 베이스캠프에는 한국, 세르비아, 노르웨이, 네덜란드, 이탈리아, 미국, 프랑스, 스페인, 싱가포르까지 9개 나라의 원정대가 모였다.

가장 규모가 큰 팀은 한국이었다. 8,000m 14좌 도전에 나선 산악인 고미영(2009년 낭가파르바트 하산 중 실족사)과 김재수 원정대장과 황동진 등반대장을 비롯한 경남연맹의 대원들이었다. K2의 날씨는 나빴다. 2000년대 들어 5년간 날씨 때문에 정상 등정 팀이 나오지 않은 적도 있었다. 2008년의 K2 역시 날씨는 나빴다. 고소적응차 C3(7,300m)까지 가는 것도 바람이 너무 강해 실패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7월 28일부터 8월 2일까지 날씨가 좋아진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단 며칠 동안 9개 나라의 원정대가 모두 올라가야 했기에, 베이스캠프에서는 원정대장들의 회의가 열렸다. 선두에서 루트를 개척하며 픽스로프를 설치할 선발대가 선정되었다. 한국팀의 황동진 등반대장이 연합 선발대의 리더를 맡았고, 박경효 대원과 각국의 유능한 셰르파, 하이포터까지 9명이 뽑혔다. 박경효 대원은 선발대의 장비를 점검하는 임무를 맡았다.무거운 짐을 한국팀과 황동진 등반대장이 맡은 셈이었다.

선발대가 고정로프를 설치하는 데 필요한 로프 역시 각국 원정대가 나누어 제공하기로 합의했다. 선발대 내에서 앞에서 픽스로프를 설치 맡은 이는 세르비아팀의 고소포터인 샤헨과 후세인이었다. 이들은 2004년 K2를 등정한 경험이 있었다. 로프가 부족했는데, 이것은 미국팀이 준비한 낚싯줄로 대신하기로 했다. 각 원정대는 노멀루트인 아브루치능선 루트와 체센 루트로 올라 C4에서 만나서 황동진 등반대장이 이끄는 선발대가 로프를 깔기로 했다. 이들은 7,700m지점인 아브루치능선에서 만나 그곳에 C4를 설치하고 최종 등정 준비에 들어갔다. 실질적으로 네덜란드와 한국팀은 각각의 루트에서 엄청난 장비와 인력을 투입하며 픽스로프를 깔았고, 나머지 팀들은 C4까지 이들이 설치한 픽스로프로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올라왔다. 문제는 C2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할 선발대의 셰르파 리더 샤헨이 C2에서 폐수종으로 하산하게 되어 후세인 혼자 그 역할을 이어받게 되었다.

7월 31일 C4에 한국, 세르비아, 네덜란드, 이탈리아, 노르웨이, 미국, 프랑스팀의 대원과 셰르파, 하이포터까지 30명이 도착했다. 그러나 C4에 도착했을 때 계획했던 로프마저 모자라는 일이 발생했다. 총 800m를 가져오기로 했으나 전체 로프는 740m였다. 또한 C4까지 대나무 막대와 낚싯줄을 가져왔으나, 장비점검에서 이를 누락하는 실수를 범했다.

8월 1일 0시 선발대가 출발하기로 했는데 황동진 대장과 박경효 대원이 텐트에서 늦게 나오는 바람에 1시간 늦게 출발하게 되었다. 본대는 새벽 3시에 출발했다. 본대는 한국팀의 김재수 대장, 고미영 대원, 김효경 대원이 앞장서고, 세르비아, 노르웨이, 네덜란드, 프랑스, 이탈리아와 미국팀 순서로 따라왔다.

후세인은 C4를 출발한 지 40분도 안 되어 고정로프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비교적 쉬운 구간에 낚싯줄을 설치하지 않고 무려 400m의 고정로프를 사용하는 판단 실수를 범한 것이다. 결국 로프가 부족해 셰르파 두 명이 다시 내려가 로프와 아이스스크루를 회수해 와야 했다. 이로 인해 2시간이 더 지체되어 총 3시간이 지체된 것이다.

8월 1일 K2에서 가장 육체적·정신적으로 컨디션이 좋았던 사람은 스페인의 알프레드 제랑이다. 셰르파와 포터도 없이 단독으로 온 그는 C3에서 2시간 만에 C4에 도착했다. 트레일러너였기에 뛰다시피 고산을 오른 것이다. 7월 31일 C3에서 다른 원정대가 출발하는 것을 지켜보며 낮잠을 자며 휴식을 취한 그는 22시에 C3를 출발해 24시에 C4에 도착했다. 그러나 선발대의 출발이 늦어지는 바람에 한 시간을 떨면서 기다려야 했다고 한다. 그는 선두의 후세인을 따르다 가장 난코스인 설빙벽에서는 아예 본인이 선등으로 고정로프를 설치하며 올랐다. 그러나 로프가 부족해 "More rope!"라고 계속 소리 지르며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이후 알프레드 제랑을 비롯한 외국 산악인들은 후세인의 판단 실수를 사고의 시발점이라 평했다. 1초가 중요한 고산에서 몇 시간씩 지체되는 큰 판단 실수를 한 후세인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파키스탄 산악회는 "고산에서의 고정로프 설치는 전문 산악인들의 몫이고, 셰르파나 하이포터의 몫이 아니다"라는 입장을 표명했다. 후세인의 능력을 너무 과신해 지나치게 일임한 것도 이후 문제로 제기되었다. 또한 선발대 리더인 황동진 등반대장과 장비를 C4에서 제대로 점검하지 못한 박경효 대원에게도 책임이 없지 않다고 이야기했다.

정상으로 이어진 길의 고비는, 보틀넥(bottleneck·병목지점) 구간과 이어지는 트래버스 구간이다. 가파른 벽을 등반해야 하기에 정체가 일어나는 가장 어려운 구간이며, 트래버스 구간도 거대한 세락의 붕괴 위험이 있어 가장 위험한 구간으로 꼽힌다.

K2에서 죽은 이들을 기리는 기념비를 찾은 대원들. 맨 앞부터 고미영, 송귀화, 이원섭, 황동진 등반대장, 손병우, 김효경, 맨 뒤 김태규 대원.

외국 원정대원 도우려다 추락한 드렌

첫 번째 희생자는 8월 1일 오전 11시쯤에 생겼다. 노르웨이팀에 신혼부부인 남편 롤프 배와 아내 세실리 스콕 대원이 있었다. 스콕은 트래버스 구간을 등반하던 중 로프가 산소마스크 호스를 눌러 산소공급이 잘 되지 않는다고, 로프를 치워달라고 세르비아팀 드렌 멘딕에게 부탁했다. 이에 드렌은 고정로프를 풀고 로프를 풀어준 뒤 다시 그녀를 추월하려고 앞으로 가다 미끄러져 100m를 추락해 숨졌다. 스콕은 드렌이 추락하는 모습을 목격하고도 7대륙 최고봉 초등 여성 산악인답게 등반을 계속했다.

두 번째 사고는 프랑스팀의 하이포터인 제한 베그가 산소통을 전달하는 임무를 끝내고 하산하던 중 드렌의 시신 운구를 돕다 미끄러져 추락했다.

2008년 K2 시즌 첫 등정은 15시에 도착한 알프레드 제랑이었다. 한국팀은 17시 40분에 정상을 밟았다. 박경효 대원, 김재수 대장, 고미영 대원, 황동진 등반대장, 노르웨이팀 여성 산악인 세실리 스콕, 한국팀 셰르파 주믹 보테가 올라왔다. 외국팀 대원들이 정상 도착 10분 만에 하산한 반면, 한국팀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김효경 대원이 아직 올라오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18시가 넘자 기온이 떨어지기 시작해 고미영 대원은 내려가자고 얘기했으나 김재수 대장은 평생 김효경 대원에게 원망을 들을 수 없어 그를 기다리자고 했다. 결국 김효경 대원은 19시에 올라왔다. 울산 출신의 김효경 대원은 권투선수 출신으로 국내 훈련 테스트에서는 거의 전 종목에서 1등을 할 정도로 강철체력이었지만 고산등반 경험이 없었다.

이어 19시 30분 네덜란드팀 셰르파와 미국팀 셰르파가 무산소로 등정했다. 10분 후 프랑스팀 대장 우고 도바레드와 하이포터 카림 메헤르반, 네덜란드팀 대장 윌코 반 루이젠과 대원 제라드 맥도넬(아일랜드인), 카스 반 게벨이 올라왔다. 20시 15분 마지막으로 정상에 선 이는 이탈리아팀의 마르코 콘포톨라였다.

한국팀은 70m 로프로 하산했다. 외국팀들도 로프가 없어, 15명이 70m 로프를 함께 사용하게 되어 시간은 더욱 지체되었다.

21시경 노르웨이팀 롤프, 스콕, 네싸는 30m 간격으로 하산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산이 흔들리고 세락이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스콕은 남편 롤프가 세락 붕괴에 휘말려 사라지는 것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21시경 한국팀 셰르파 주믹 보테와 파상 라마는 하산했다. 한국팀 대원들을 버리고 하산한 파상 라마는 이후 "몹시 추웠고 몸이 떨렸기 때문에 떠날 수밖에 없었다"고 실토했다.

8월 2일 새벽 4시와 5시30분에 김재수 원정대장과 고미영 대원이 C4로 내려왔다. 황동진 등반대장은 남은 대원들을 기다리기로 했다. 지친 상태로 정상에 섰던 김효경 대원은 하산 중 완전 탈진했다. 박경효 대원과 주믹은 김효경 대원을 부축해 새벽 2시 황동진 대장이 있는 곳에 닿았으나 모두 탈진한 상태였다. 이후 김효경 대원은 추락해 숨진 것으로 추측된다. 황동진 등반대장은 마지막 무전에서 거친 숨을 쉬며 "여기는 매우 춥다. 따뜻한 물을 보내 달라"고 말했다. 결국 이들은 트래버스 구간 진입 앵커에 확보를 하고 비박을 감행했다.

뒤에서 늦게 하산하던 마르코와 윌코, 제라드는 새벽 2시경 하산을 포기하고 비박했다. 다음날 이들은 하산 중 한국팀을 만났다. 이들은 앵커에 확보한 채 탈진하여 기력이 없는 상태였다. 윌코는 이들을 구조할 체력이 없었고 시력이 점점 나빠지는 설맹 증세가 있어 이들을 두고 떠나야 했다고 한다.

마르코와 제라드는 황동진 대장이 편안히 앉도록 해주었다. 제라드는 정신을 잃은 주믹이 가지고 있던 무전기로 구조 요청을 했다. 이에 C4에서 마중 나와 있던 셰르파 파상 보테(주믹의 사촌형)와 치링이 응답하고 구조에 나섰다. 파상 보테는 15시경 이들과 상봉했다. 이 소식을 무전으로 들은 한국팀 원정대는 "살았다!"며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나 문제는 세락 붕괴가 염려되는 트래버스 구간을 지나는 것이었다.

이들이 무사히 트래버스 구간을 지나 보틀넥 아래 설빙벽으로 내려서자, 쿵쾅거리는 소리가 났다. 세락이 터진 것이다. 주믹의 친동생인 치링 보테는 아래에서 지켜보다 급히 몸을 숨겼다. 주믹과 파상, 황동진 대장, 박경효 대원은 숨을 거두었다.

제라드는 마르코와 같이 하산할 수 있었으나, 한국팀 구조를 도왔다. 오전 10시경 제라드가 박경효 대원을 돕는 모습이 망원렌즈에 포착되었다. 그 역시 세락 붕괴로 숨을 거두었다. 아일랜드인 최초로 K2를 등정하고 하산하던 그가 한국팀을 돕다 숨을 거둔 것이다.

실수는 했을지언정 그들은 영웅이었다

이원섭 변호사는 데날리에서 조난산악인을 구조해 데날리상을 수상한바 있는 의협심 있는 제라드가 곤경에 처한 한국 팀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라고 한다.

박경효 대원과 주믹은 비박 대신 30분 정도면 내려서는 구간을 4시간이란 오랜 시간 동안 김효경을 부축해 황동진 등반대장이 있는 앵커지점까지 왔다. 현명한 선택은 아니었지만,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끝까지 의리를 지킨 것이다.

한편 프랑스팀 대장 우고와 하이포터 카림 메헤르반은 하산 중 각각 조난되었다. 카림은 다음날 경로에서 완전히 떨어진 능선의 세락 위에서 발견되었다.

K2에서 11명이 죽음을 당하자, 세계 언론과 일반인, 산악인들은 원정대들을 비난했다. <뉴욕타임스>는 '그날 산악인들은 목적의식 없이 스릴과 자기만족을 좇아 올라가던 무리들이다', '미안하지만 이번 결과에 동정하지 않는다. 이런 잘난 체하는 사람들에 대해 한 치의 동정심도 느껴선 안 된다'는 독자들의 비평을 실었다.

라인홀트 메스너는 "그들의 행동은 매우 어리석었다. 전문가의 등반이라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라함 보울리는 "등반 역사상 최악의 사고였고,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지 의문이 간다"고 평했다.

산악 저술가 모리스 이써만은 "이번 K2 사고에서는 산악인들이 남남으로 올랐다가 남남으로 떠나갔다"고 결론지었다.

이원섭 변호사는 "여러 실수들이 단초가 되어 큰 비극이 생겼다"고 얘기한다. 정상까지 고정로프 설치를 맡았던 한국팀 선발대에게 책임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남남으로 왔다가 남남으로 갔다'는 말에는 수긍하지 않는다. 김효경 대원을 버리지 않고 목숨 걸고 끝까지 함께했던 박경효 대원, 셰르파 주믹, 황동진 등반대장과 이들을 독려하고 도운 아일랜드 산악인 제라드, 만류를 뿌리치고 구조하려 죽음의 지대로 뛰어든 파상 보테. 비록 산화했지만 이들의 용기는 제대로 평가 받아야 하며, 등반 과정에서 실수는 했어도 사람은 결코 버리지 않았던 영웅이라 평가하고 있다.

Copyright © 월간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