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말 없는 죽음[오늘을 생각한다]
2024. 6. 14. 16:02
군인이 지키는 사람은 누구인가. 국민이다. 군인은 외적으로부터 국민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의 국군은 ‘국가의 군대’가 아니라 ‘국민의 군대’다. 국민을 지키고, 국민에게 충성하며,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군인도 국민이다. 지키는 이도, 지켜지는 이도 국민이다. 이걸 국민개병제라 한다. 민주공화국의 군대는 권력자의 결단이나 선의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자신을 지키기 위한 무력을 갖추기로 합의하여 만든 것이다.
그러나 이 땅엔 딴 세상에 사는 사람들도 있다. 임성근 전 해병대 1사단장이 채 상병 사망 사건으로 입건된 부하 대대장들을 선처 탄원한답시고 경북경찰청에 낸 탄원서가 부글부글 공분을 사고 있다. 탄원서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다. “군인은 국가가 필요할 때 군말 없이 죽어주도록 훈련되는 존재들입니다.” 임무 수행을 위해 죽음을 강제할 수 없는 군인으로 구성된 군대는 군대라고 보기 어렵다는 말도 덧붙였다.
기가 차는 소리다. 그러는 임 전 사단장은 대통령이 필요로 하면 당장 죽을 수 있는가? 외적의 침입을 방비하러 간 것도 아니고, 수해 복구에 투입한 장병들을 두고 ‘군말 없이 죽을 준비’ 같은 궤변을 늘어놓다니 놀라울 뿐이다. 구명조끼 하나 갖추지 못하고 수중 수색에 투입돼 세상을 떠난 채 상병의 사망 책임을 묻는 수사를 진행 중인 경찰을 향해 ‘군인의 죽음은 어쩔 수 없는 일’이란 소리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수십 년 동안 장교로 복무하며 수많은 부하를 통솔하던 장군이 이런 사고방식으로 부대를 지휘해왔다면 진실로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군인을 국가의 도구로 인식하는 이들이 힘을 가진 한 얼차려를 받다 죽고, 맨몸으로 물속에 들어가 죽고, 병원에 못 가서 죽을 수밖에 없다. 이들의 통곡은 도돌이표일 수밖에 없다. 군말 없이 죽어도 되는 군인은 없다.
유사 이래 누구와 무엇을 위해 목숨을 걸 준비를 해야 하는지 이해시키는 과정이 결여된 군대가 임무에서 승리했다는 말을 들어본 적 없다. 타인을 위한 희생은 타당한 목적을 갖춘 결심에 따른 결과지 무조건적 복종의 결과일 수 없다. 민주공화국의 군대라면 더욱더 그렇다. 전쟁에 나선 군인이 죽음을 감수하는 건 국가 권력이 그러라고 명령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공동체를 위한 희생과 헌신의 몫을 구성원이 나눠 짊어지기로 했기 때문이다. 민주공화국에서 군대가 작동하는 원리를 구성원이 이해하는 부단한 과정을 건너뛰고 ‘군인이니 당연히 희생해야 한다’는 말만 반복하는 건 공염불이다. 매 순간의 희생을 무겁고, 또 무섭게 여기지 않는 군대는 진실로 희생이 요구되는 순간을 감당할 수 없다.
보훈의 달을 맞아 현역 장성으로부터 저런 말을 듣고 있자니 날마다 군대에서 삶이 지는 이유를 알 법도 하다. 군인을 ‘임무를 수행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죽을 수도 있는’ 국가의 도구로 인식하는 이들이 힘을 가진 한 얼차려를 받다 죽고, 맨몸으로 물속에 들어가 죽고, 병원에 못 가서 죽고, 괴롭힘을 당하다 죽고, 보복과 2차 가해를 당하다 죽을 수밖에 없다. 이들의 통곡은 도돌이표일 수밖에 없다. 이 세상에 군말 없이 죽어도 되는 군인은 없다.
김형남 군인권센터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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