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으로 동시대 비틀기, 싱어롱의 미학[이주영의 연뮤덕질기](27)
“고향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 저 하늘 저 산 아래 아득한 천 리/ 언제나 외로워라 타향에서 우는 몸/ 꿈에 본 내 고향이 마냥 그리워.” 연극 <활화산>(차범석 작·윤한솔 연출)은 등장인물이 모두 극에서 빠져나와 ‘꿈에 본 내 고향’을 합창하며 1막을 닫는다.
극 중 망자인 이 노인(정진각)이 마이크를 들고 무대 앞으로 걸어 나와 선창하고 아내 심씨역 백수련은 “오랜만에 명동예술극장서 관객과 만난다”라며 무대인사까지 한다. 극의 끝이 아닌 인터미션(공연 막간의 휴식 시간) 직전에 벌어지는 상황이라 관객은 어리둥절하면서도 익숙한 멜로디에 끌려 따라 부른다. 브레히트적 ‘낯설게 하기(서사에 매몰되지 않도록 연극임을 환기하는 장치들)’이다.
군부독재 시절인 1960년대 말, 몰락한 양반가의 아들 상석(구도균)이 가산을 털어 출마한 축산조합장 선거에 낙선하자 극은 급전환된다. 공간적 배경인 웅장한 한옥이 뿌리 뽑히듯 무대 위로 올려지고 충격으로 사망한 이 노인의 영정이 무대를 가득 메운다. 이 노인의 49재 마지막 날, 살림을 이끄는 며느리 정숙(강민지)이 시어머니 심씨를 비롯한 대가족 앞에서 읍소한다. 빚더미에 앉았으니 어린아이들까지 끌고 다 같이 죽거나 구습을 타파하고 다 같이 살 것인지 선택하라는 제안이다.
사실주의를 대표하는 차범석 작가의 1974년 극작을 각색과 윤색 없이 그대로 옮긴 <활화산>은 윤한솔 연출을 통해 초현실주의 작품으로 재탄생했다. 새마을 운동을 독려하기 위한 프로파간다 극작은 연출의 변화만으로도 기존 질서와 방향에 의문을 제기하는 문제작이 됐다. 집채만 한 분홍색 돼지 조형물이 자리한 2막은 국적과 시대구분이 모호하다. 다양한 의상은 일괄적인 녹색 작업복으로 대체된다. 양돈 농가로 자리매김한 정숙 일가는 가족이 노동에 동참하며 가난에서 벗어난다. 몇 년 후 정숙 부부는 마을 공동 축산을 견인하고 ‘잘살자’라는 대의를 향해 주민들과 열심히 달린다. 전쟁 상흔으로 다리를 못 쓰는 시숙 내외와 주점을 하는 인천댁 등 노동에 방해되는 인물이 무대에서 치워진 듯 보이지 않는다. ‘한 방향으로만 달리기’는 압제를 동반하고 천장에 매달려 있는 거대한 한옥으로 시각화된다.
인권에서 배제된 섬이 되지 않기 위한 몸부림
음악극 <섬: 1933~2019>(장우성 작·이선영 작곡·박소영 연출)는 사회에서 치워져 외딴 섬이 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쓸모없거나 불편하다는 이유로 격리되고 배척된 사람들의 잔잔하지만 질긴 목소리다. 대표 넘버(노래)인 ‘사랑이 머물던 시간’은 편견의 섬에 갇힌 수많은 사회적 약자와 장애가 있는 이들의 바람이다. 출연진들이 “사랑이 머물던 시간, 사랑이 그리운 시간, 바람에 실려 파도에 실려 사랑이 머물던 시간”을 반복한다. 그저 사랑과 사람이 그리우니 연결돼 머물기를 바란다는 소박한 희망으로 관객이 객석을 나서며 흥얼거리게 만든다.
1966년부터 소록도에서 40년 넘게 봉사하며 사랑과 희망을 키워온 간호사 마리안느와 마가렛의 실제 이야기가 중심에 있다. 1933년 일제강점기 한센인들을 격리하고 인권을 박탈해온 백수선 중심의 소록도와 1966년 간호사 마리안느와 마가렛에 의해 일상의 평온을 되찾기 시작하는 소록도, 2009년 발달장애아를 낳고 편견에 시달리며 2019년 특수학교 설립 반대에 대항하는 고지선까지 시공간을 넘나들며 장애와 편견에 대한 목소리 내기가 이어진다. 인권과 소통에서 배제된 ‘섬’이 되지 않기 위한 90여 년의 몸부림이다.
나무와 면 장막으로 구성된 따뜻한 무대는 실존 인물과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소재임에도 영상을 사용하지 않는다. 현대의 소록도 관광 장면도 작은 플래카드로 대신한다. 안무와 연기, 합창을 통해 시공간을 상상하게 이끄는 아날로그 작품이다. 작품의 백미는 소록도 ‘수탄장(울며 슬퍼하는 장소)’ 재현이다. 한센인이 낳은 자녀들은 격리 양육해야 한다는 정부 방침이 있던 시절, 부모 자식임에도 손 한번 잡아보지 못하고 거리를 둔 채 한 달에 한 번 얼굴만 멀리 보고 안부를 전하는 장면이다. 2019년 특수학교 건립을 위해 지역 주민과 싸우는 학부모 고지선은 “장애는 5분만 함께하면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남의 일이니 세상에 더 나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의 소수 성향을 드러내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뮤지컬 <헤드윅>(존 카메론 미첼 대본, 스테판 트래스크 작사·작곡, 손지은 연출)에 억압과 차별은 존재하지 않는다. 뮤지컬 오프닝과 엔딩을 장식하는 ‘wicked little town’은 인기 넘버다. “운명이 널 시험해도 힘들어하지 말고 헤쳐나가길/ 미움과 증오에 지쳐 원망과 좌절에 빠져 뜨겁고 차가운 바람 세차게 몰아쳐 길 잃고 헤매는 당신 따라와 나의 속삭임/ 건너요 차가운 도시 wicked little town”은 도전과 저항, 내재된 슬픔을 내포한다.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날 태어나 동독에서 자란 헤드윅은 가족과 연인의 폭력과 방치 속에서 자유를 꿈꾼다. 미군과 사랑에 빠져 결혼으로 동독을 탈출하기 위해 싸구려 성전환 수술을 했으나 실패해 남성 성기 일부를 달고 사는 미완의 존재다. 미국에 도착해 연인에게 버림받고 모호한 젠더로 살아가지만 음악이 있다. 냉전 시대 희생양인 난민 출신 밴드 동료들과 공생하며 억압을 주고받지만, 이 또한 음악으로 푼다. 한국에서는 2005년 라이센스 초연 이후 올해가 14번째 시즌이다. 매 순간 관객과 상호작용하는 록 뮤지컬의 진수로 긴 금발에 좌우로 흔들리는 요란한 헤어스타일은 헤드윅만의 상징이다.
다양성 배제한 한 방향 달리기 압제 동반
자신의 문제를 드러내고 당당히 살아가는 것은 인간 존엄의 기본이고, 자율성이 전제돼야 한다. 연극 <활화산>은 2막 전체에서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로 시작되는 ‘새마을 노래’를 변주한다. 뭉근한 선동 코드다. 국회의원이 선거용 선심으로 해주겠다는 마을 다리 건설에 대해 “우리 힘으로 해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정숙은 “우리는 죽은 화산이 아니라 살아 있는 화산이다. 우리는 일어서야 한다. 가난을 몰아내야 한다”고 외친다. 이상하고 불편하지만 정숙의 행동과 주장은 모두 ‘맞는 말’이다.
무대는 괴기스러운 녹색 조명으로 바뀌고 녹색 작업복을 입은 전체 등장인물들이 연호한다. 그 순간 정숙 부부는 맥락 없이 5분이 넘는 긴 키스에 돌입한다. 정숙의 당찬 연설 장면의 오디오가 반복해서 천천히 재생되는데 이 순간 관객은 그의 주장이 ‘무조건 맞는 말이 아닐 수도 있음’을 깨닫는다. 실험 영화에서 시도되는 어긋나는 사운드 편집은 관객에게 경종을 울리는 브레히트적 장치로, 다양성을 배제하고 한 방향으로 달리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감지하게 만든다. 1막의 마지막을 장식한 합창곡 ‘꿈에 본 내 고향’은 2막에서 전체주의에 선동된 관객을 깨우기 위한 음악적 장치일 수 있다. 연극 <활화산>은 6월 17일, 뮤지컬 <헤드윅>은 6월 23일, 음악극 <섬>은 7월 7일까지 상연한다.
이주영 문화 칼럼니스트·영상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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