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신들린 군인들도 한숨쉬던 짬밥, 그속에서 빛나던 ‘추억의 음식’ [말록 홈즈]
‘G.I.’는 본래 Government Issue의 줄임말입니다. ‘정부가 보급한 물품’이란 뜻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주제, 쟁점’으로 인식하는 단어 ‘issue’에는 ‘발행, 지급, 보급’이란 의미도 있습니다. 본래 고대프랑스어(Old French)였던 issue는 ‘출구, 나가는 길, 최종 사건’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라틴어 ‘exire’에서 왔다고 합니다. Ex는 ‘밖으로’, ire는 ‘가다’를 뜻합니다. 보급품을 가리키는 영역이 사람으로 확대되어, GI는 군인을 가리키는 속어로 자리잡습니다. 군인도 ‘정부 소속 자산이나 물자’라는 뜻을 품은 자조적 유머 같습니다. 남성 군인은 G.I. Joe, 여성 군인은 G.I. Jane이라고 부릅니다. 우리 상황에 맞추면, ‘국방부 보급품 지호’나 ‘정부 발행 지현이’쯤으로 추정해 봅니다.
곧 장마철이 시작됩니다. 매년 그렇듯이, 폭우가 내리고, 폭염도 이어질 겁니다. 우리 대한의 지호와 지현이들이 모두 안전하고 건강하길 기원합니다. 특히 국가와 국민을 위해 끌려와서 청춘의 황금기를 헌신하는 지호들에겐, 말뿐인 ‘대한의 건아’라는 공치사 대신 노력과 헌신에 걸맞은 경제적 보상과 감사의 마음이 따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명예와 긍지가 자리잡습니다. 병역을 이행한 대한민국 남성 중에,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기로 스물두 살과 스물 세 살을 꼽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그 시간을 소중하고 의미 있게 간직하려면 제도적 개혁이 필요합니다. 병사로 군대 안 가본 사람들은 평생 설명해 봐야 공감하기 힘들겠죠. 하지만 이 나라를 이만큼 발전시켜 온 주축중 하나는, 그 돈 없고 빽 없어 군대 다녀온 보통사람들이란 걸 기억해 주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국군통수권자께서, 현장의 애환과 고충에 귀기울여 변화를 이끌어 주신다면, 고단한 우리 병사들도 명예와 에너지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병사도 우리나라의 주인인 국민입니다.
신체 건강한 대한남아라 꽃다운 청춘에 나라를 수호하러 입대했다가, 떠들었다는 이유로 가혹행위로 숨진 훈련병. 가장 싱그럽고 활기찬 나이에, 고통과 슬픔 속에 시들어간 젊은이의 죽음을 애도하며 명복을 빕니다.
자랑스런 우리 병사들을, 소중한 우리 젊은이들을, 당신들이 함부로 막 부려도 되는 노비 취급하지 말아라!
*보너스 글(이라기보단 먼저 썼던 글)
[육개장, 짬밥천국의 성자]
1995년 가을부터 26개월 동안 국방부 자산으로 머물렀습니다. 자연과 어우러진 국방색 옷을 입고, 애인 같은 M-16 소총도 모시고 다니던 시절이었죠. 군대 다녀온 이들이 ‘M16 라이플’을 ‘애무16’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단순히 영어 공부가 모자라서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20대 초반의 에너지는 혈기를 넘어 광기에 가깝습니다.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온종일 삽질과 갈굼에 굴러도, 룰라와 비비에 열광할 에너지는 남아있었습니다. 그 원천은 바로 왕성한 식욕과 소화력에 이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복무(복역?)하던 논산훈련소의 식단은 참 안쓰러웠습니다. 취사병 10여 명이 2300명분 식사를 준비해야 했기 때문에, 식재료를 정성스레 다듬고 맛깔스럽게 조리하는 건 불가능했습니다. 타오르던 청춘들은 십 원짜리 동전마저 씹어삼킬 듯한 소화력을 보유하고도, 식판을 바라보며 그늘 진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곤 했습니다. 엄청난 양의 음식쓰레기가 남았고, 이 잔반(殘飯: 남을 잔, 밥 반)은 딸딸이(문화어: 경운기)에 실려, 인근 농가의 돼지와 닭을 살찌우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먹고 남은 밥 ‘잔반(殘飯)’이 뜻 모르고 따라 부르다보니, ‘짬밥’으로 발음되었습니다. 다리가 얽힌 낙제어(絡蹄魚: 얽힐 락, 발굽 제, 물고기 어)가 낙지가 된 것과 비슷한 경우 같습니다. 복무한 기간이 길수록 남긴 잔반량도 많아, 군경력이 ‘짬밥’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 예문) “내가 남긴 짬밥에, 너 같은 이등병 1개 분대는 넉넉하게 묻혀 죽는다!”
그래도 그 ‘잔반천국’에서 우리를 기쁘게 한 성자가 계셨으니, 그 분의 존함 ‘육개장’이었습니다. 얼큰하고 깊은 국물에 푸짐한 고기 건더기, 여기에 당면과 채소와 달걀이 어우러졌습니다. 그나마 외부세계에 가장 가까운 ‘사제’의 맛을 선사한 국님이셨습니다. 육개장이 나온 날 아침은 설렜습니다. 군기 바싹 든 이등병부터 귀찮다고 아침 거르는 말년병장까지, 모두의 표정에 사랑과 평화가 넘치는 ‘우정의 무대’가 움텄습니다.
이런 육개장을 육계장으로 아는 분이 많습니다. 아마, 고기 육(肉)에 닭 계(鷄)를 연상했기 때문일 겁니다. 육개장의 ‘육’은 고기 육 자가 맞습니다. 장(醬)은 고추장이나 된장 같은 발효소스 ‘장’입니다. ‘장국’이란 말은 ‘장을 넣어 끓인 국’을 의미하죠.
그렇다면 가운데 ‘개’는 어떤 한자를 쓸까요? 개는 한자가 아닙니다. 네, ‘댕댕이’, ‘멍멍이’, ‘땡칠이’, ‘누렁이’가 맞습니다. 아시다시피 우리 조상들은 육류 섭취 기회가 적었습니다. 무더운 여름날 뙤역볕이 내리쬐는 들판에서 밭을 매고 논을 갈려면, 채소가 아닌 육류 특별식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가축으로 ‘보양음식’을 끓여 함께 나눠먹었습니다. 그 재료는 주로 개였답니다. 보신탕의 원래 이름은 ‘개장국’이었습니다. ‘개고기에 된장을 풀어 끓인 국’이라는 의미였죠.
그런데 지체 높은 양반들께서는 체면과 위신 때문에 개를 입에 댈 수 없었습니다. 대신 쇠고기를 비슷한 양념으로 끓인 국이 바로 육개장입니다. 쇠고기(肉)를 넣어 끓인 개장국이란 뜻입니다.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육개장국’이 되겠지만, 너무 길어서 육개장이라고 부르나 봅니다. 짜장면을 짜장, 물냉면을 물냉이라고 줄여 부르는 것과 비슷한 경우입니다.
그렇다면 닭개장은 뭘까요? 닭을 넣어 끓였으니 닭계장(닭鷄醬)이라고 유추하는 분들을 많이 봤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개장’을 씁니다. 닭개장은 ‘닭으로 만든 개장국’이란 뜻이기 때문입니다.
내일 점심엔 육개장이 당길 것 같습니다. 대파천지 육병장이나 짠개장 육화수 같은 유사 육개장 말고, 결대로 찢은 고기에 칼칼한 듯 부드러운 국물이 어우러진 진짜 육개장이 그립네요. 서울에 그런 육개장 있는 집 아시면 추천 부탁드립니다.··*
[필자 소개]
말록 홈즈. 어원 연구가/작가/커뮤니케이터/크리에이터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분야에서 22년째 활동 중. 기자들이 손꼽는 쉽고 재미있게 설명하는 커뮤니케이터. 회사와 제품 소개에 멀티랭귀지 어원풀이를 적극적으로 활용. 어원풀이와 다양한 스토리텔링을 융합해, 기업 유튜브 영상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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