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정원식물 클러스터’를 아시나요 [김선미의 시크릿가든]
식물원이나 수목원, 정원박람회에 다니다 보면 궁금해진다. 이 식물은 누가 어디에서 키운 걸까. 식물 업계에는 유명해도 일반 대중은 잘 모르는 사실이 있다. 충남 천안이 ‘한국의 정원식물 클러스터’라는 것이다. ‘산내식물원’, ‘미산식물’, ‘도담식물’, ‘열린식물원’ 등의 업체들이 천안에 모여 정원식물을 재배한다. ‘허니가든’ 등 신생 업체도 정원식물의 메카에 힘을 더한다. 새로운 품종을 발굴해 보급함으로써 국내 정원산업 생태계를 떠받치는 주역들이다.
●우리 정원식물을 키워내는 손길들
도담식물의 이정관 대표(50)는 충남 태안의 천리포수목원 가드너 출신이다. 대학에서 조경과 원예학을 전공한 후 7년 동안 일했던 천리포식물원은 새로운 식물이 가득한 천국 같은 곳이었다. 그런데 역시 천리포수목원 가드너 출신인 송기훈 대표(63)의 ‘미산식물’을 업무상 종종 방문하면서 관심이 점점 식물 농장으로 향했다. 송 대표가 다양한 식물을 수집하고 번식시키는 모습, 그러면서도 경제적 안정을 이룬 모습이 크게 부러웠다고 한다.
정원식물 농장을 세우는 꿈을 안고 이 대표는 천리포수목원을 나와 미산식물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실장으로 3년을 일했다. “식물원에서 배우지 못한 것들을 농장에서 배우면서 독립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이 대표를 키운 업계 선배인 송기훈 대표는 지금의 국내 ‘그라스(사초과와 벼과 식물) 열풍’을 불러온 주역이다. 2003년 정원식물 업계에 뛰어들어 당시 국내에 생소하던 억새와 수크령 등을 육종하고 보급했다. 일례로 잎에 흰색 줄무늬가 있는 ‘딕시랜드’라는 품종의 억새는 이 농장의 한 포기 풀에서 비롯돼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이 대표는 2011년 3월 천안 풍세면 보성리의 농지를 매입해 ‘도담식물’을 창업했다. “식물원에서 경제 관념 없이 식물에만 빠져 살았기 때문에 사업자금 준비가 미미해 사업 초반에는 무척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래도 선·후배들이 일하는 식물원들이 주요 식물 납품처가 되면서 큰 힘이 됐습니다. 최근에는 각종 정원 행사가 많아지고 정원 작가라는 직업이 뜨면서 다양한 식물을 찾아 농장을 방문하는 분들이 늘었습니다.”
4500평 부지에 자리 잡은 도담식물은 하우스(3000평)와 노지(1500평)에서 1000여 종의 숙근초와 관목을 재배하고 있다. 국내 식물원과 수목원에 식물을 공급하고 조경용 식물 생산과 납품, 정원 컨설팅도 한다.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알파인 정원의 차이브 ‘실버 차임스’, 서울식물원의 애기말발도리 ‘던컨’, 강원 춘천 제이드가든의 맥문동 ‘스프링 스노우’ 등이 이 농장에서 재배돼 공급된 식물들이다. 특히 스프링 스노우는 맥문동 군락에서 우연히 씨앗이 떨어져 나온 개체 중 봄에 새순이 흰색으로 돋아나는 개체를 선발해 이 대표가 특허 등록한 것이다. 그가 육종한 부채붓꽃 ‘스노우 윈디’, 노란색 잎의 느티나무 ‘마이다스 터치’도 특허 등록됐다.
이 대표는 선배로부터 받았던 도움의 손길을 이젠 후배에게 내민다. 천리포수목원 식물팀장을 지냈던 ‘허니가든’의 이주헌 대표(45)는 이정관 도담식물 대표의 도움으로 인근의 농장 부지를 구해 지난해 창업할 수 있었다. 총 13년간 천리포수목원에서 일하고 조경 설계와 정원시공 회사도 다닌 이주헌 대표는 “그동안 관심을 많이 못 받던 우리 자생식물을 정원식물로 키우겠다”는 꿈을 갖고 있다. 천안의 업계 선배들이 주로 식물원과 수목원, 농가를 대상으로 식물을 공급하는 데 비해 갓 창업한 그는 “일반 개별 소비자도 대환영”이라고 한다.
●새로운 품종 개발과 식물 출처 관리가 힘
천안은 물류망이 발달해 전국으로 식물을 공급하기에 편리하다. 또 정원식물 재배 업체가 모여 있어 관련 전공 학생들의 견학 코스로도 손색이 없다. 식물로 맺어진 업계 선·후배들의 정보 공유와 식물 교류도 ‘한국의 정원 클러스터’를 가능케 하는 힘이다. 무엇보다 전문성을 갖춘 대표들이 유행에 편승하지 않고 새로운 식물 품종 개발에 매달린다는 게 이 클러스터의 가장 큰 특징이다. 식물의 학명과 유통명이 달라 혼란을 일으키기 일쑤인 국내 식물 시장에서 이들은 식물 출처를 정확하게 밝혀 전파한다.
앞으로의 과제는 뭘까. 이정관 도담식물 대표는 말한다.
“몇 년 사이에 엄청나게 다양한 식물이 국내로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국내 기후와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식물들도 많고, 이것들을 제대로 평가하는 기회도 부족한 것 같습니다. 무분별하게 들여오기보다는 잘 자랄 수 있는 강건한 품종들을 선발하고 육성해야 합니다.”
요즘 우리 자생종을 정원에 도입하려는 다양한 시도에 대해서도 의견을 피력했다.
“자생종의 중요성에는 충분히 공감하지만, 자생종을 정원에 사용하기에는 기후적으로 맞지 않거나 구하기 힘든 게 현실입니다. 자생종들은 개화 기간이 짧거나 더위에 약한 것이 많습니다. 또 농장에서 자생종을 재배해도 홍보나 판매가 어려워 대부분 폐기되고 맙니다. 자생종과 자생종, 자생종과 외래종 등의 교잡을 통해 우리 정원에 맞는 훌륭한 식물을 육성하는 게 꼭 필요한 사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송기훈 미산식물 대표의 말도 들어보았다.
“한국은 주거 형태가 아파트 위주라 정원식물의 내수 시장이 여전히 크지는 않습니다. 과거에는 골프장과 식물원, 요즘에는 아파트에 조경이 많이 들어가죠. 외국에 비해 시장이 훨씬 늦게 시작됐는데도 산림청이 수목원·정원의 조성 및 진흥에 관한 법률을 만들어 지원해 주면서 관 주도로 빠르게 활성화했어요. 장기적으로는 민간 주도로 시장이 커 나가야 할 것입니다.”
●‘도담 브라이트 가든’에서의 오후
이정관 도담식물 대표의 개인 정원인 ‘도담 브라이트 가든’에 가 봤다. 그는 2016년 천안 풍세산업단지 인근의 전원주택단지인 ‘조은자연마을’의 단독주택으로 이사했다. 관리되지 않은 커다란 벚나무와 회화나무, 벌레들이 가득한 유실수가 빽빽하게 자리 잡아 답답한 첫인상을 주는 집이었다. 우편 집배원이 “이 집이 마을에서 가장 더러운 집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는 기존의 나무들을 정리하고 울타리와 배수로를 새롭게 설치했다. 식물이 잘 크려면 무엇보다 토양이 좋아야 하기에 집 앞마당과 뒤뜰은 양질의 마사토로 복토를 했다. 대지가 220평인 이 집에 조성한 100평 규모의 정원 이름은 ‘도담 브라이트 가든’. “천리포수목원 가드너로 일할 때부터 무늬가 있는 식물, 잎 색상이 밝은 식물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밝은 식물들에서 기쁨을 얻고 싶었어요.”
전문 가드너가 만든 정원은 키 큰 교목과 그보다 낮은 관목이 적절하게 어우러져 짜임새 있는 작은 숲을 이루고 있었다. 처음부터 울창한 교목을 심은 게 아니었다. 잎 색상이 보라색인 자엽 자작나무는 심을 땐 연필 크기였는데 4년 만에 8m 높이로 훌쩍 자랐다. 무늬 자작나무, ‘울프 아이’라는 품종의 산딸나무는 잎에 무늬가 있어 잔잔하면서도 화려했다. 유럽너도밤나무와 모감주나무는 길쭉한 직립 형태로 이국적 느낌을 전했다. 이 대표가 가녀린 줄기를 접목해 6년간 키웠다는 무늬 층층나무 사이로는 흰 나비가 날아다녔다.
집 앞쪽과 뒤쪽은 사뭇 다른 분위기다. 햇볕이 잘 드는 마당 앞 화단에는 풍년화, 실목련, 고광나무, 매자나무, 미국수국, 분꽃나무, 히어리 등을 심었다. 뒤쪽에는 반그늘을 좋아하는 자주받침꽃, 산수국, 만병초, 헬레보러스(크리스마스 로즈), 100여 종의 비비추와 천남성 등이 있다.
“정원에 식물을 심을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공간과 질감입니다. 서로 다른 느낌의 식물을 주변에 배치하는 것이 질감이 비슷한 식물을 연속적으로 심는 것보다 자연스러운 배치가 됩니다. 예를 들어 직선적 느낌의 향나무 주변에 억새처럼 둥그런 수형의 식물을 배치하고, 털수염풀의 부드러움 사이에 알리움의 강렬한 느낌을 더하면 식물들이 서로 대비를 이루면서 아름다움을 만들어내지요. 요즘 정원식물로 추천하고 싶은 건 자주터리풀 ‘엘레간스’입니다. 잎은 단풍 모양으로 깨끗하게 갈라지고, 꽃도 진한 분홍색으로 크고 예쁘거든요.”
무려 400여 종의 식물이 자라고 있는 이 정원은 이 대표의 식물 시험장이기도 하다. 새롭게 도입한 식물을 심어 사진처럼 꽃은 잘 피는지, 여름과 겨울은 잘 이겨내는지, 생육속도와 병충해는 어떤지 살펴보고 관찰한다. 이런 테스트를 통해 좋다고 판단되면 대량으로 증식하고 상품으로 재배하는 것이다.
그는 정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이라고 말한다. “식물과 추억을 쌓지 않고 처음부터 완벽한 정원을 원하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묘목과 작은 포트에 담긴 꽃을 심어 그 성장 과정을 살펴보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데요. 꽃이 피어난 것을 보며 기뻐하고, 힘든 하루의 휴식이 되는 정원이 제게는 즐거운 놀이터에요.”
‘한국의 정원식물 클러스터’를 이루는 천안의 업체 대표들은 식물을 보러 주로 산을 함께 다닌다고 한다. 그들이 산을 함께 오르며 식물을 관찰하고 의견을 나누는 장면을 흐뭇하게 상상해 보았다. 업계의 열정과 노력, 식물과 함께 하는 정원문화가 어우러져 우리 풍토에 맞는 정원식물이 더 풍성하게 개발되기를 기대해본다.
천안=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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