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꼬무 찐리뷰] 맨몸으로 일본까지 헤엄쳐 간 조오련…그가 전설이 된 이유
[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13일 방송된 '그가 전설이 된 이유,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배우 정희태, 수영선수 출신 박태환, 배우 유이가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수영에 미친, 낯선 녀석의 등장
때는 1968년 11월, 서울 종로야. 한 건물 안 사무실이 시끌시끌해. 까까머리 앳된 소년과 중년 남자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어. 소년은 사정사정하며 매달리고, 직원으로 보이는 남자는 손사래를 쳐. 여기서 큰 목소리가 들리는 이유는, 이 작은 종이 한 장 때문이야.
수영장 회원권이야. 원래 11월 7일에 만료가 된 회원권인데, 소년이 7 앞에 2를 붙여서 27일로 바꿨다가 직원 아저씨한테 딱 걸린거야.
"제가 진짜 성공해서 꼭 갚을게요. 수영만 하게 해 주세요."
소년이 통 사정을 한 끝에, 한 번만 봐주기로 했어. 대신 소년은 벌로 수영장 청소를 하기로 했어. 이 때가 1968년이야. 수영, 어떤 스포츠였을까? 수영 선수도 있고, 경기도 있을 때지만, 스포츠로 생각하진 않았어. 수영이란 건 단지, 생존 수영이나 물놀이 정도로 여겨졌지. 굳이 따지자면 특별한 사람들이나 하는 '고급 운동'이야. 이때 우리나라에 수영장이 단 세 개만 있었거든. 하나는 일제 강점기 때 만들어진 동대문운동장 수영장, 하나는 워커힐 호텔 수영장. 그리고 마지막 하나가 바로 여기, 종로에 있는 YMCA 건물 안에 실내 수영장이 있어. 연습용 실내 수영장은 딱 하나, 바로 이 YMCA 수영장뿐이었어.
좋은 기록을 내려면 연습을 많이 해야 하잖아. 근데 실내 수영장이 없으면 연습을 못 해. 겨울에 야외에서 수영할 수가 없으니까. 수영할 환경 자체가 척박한 거야. 아무나 수영을 할 수도 없어. 근데 형편도 넉넉지 않아 보이는 소년은, 왜 회원권을 위조하면서까지 수영을 하려는 걸까?
당시 학교 수영부 쌍두마차는 오산고와 양정고. 유명한 수영 명문고야. 전국체전에 나갔다 하면, 우승을 휩쓰는 게 두 학교야. 두 학교 선수들은, 학교 끝나면 다들 YMCA 수영장에 모여서 같은 꿈을 꾸면서 실력을 겨눴어.
근데 그 사이로, 웬 낯선 녀석이 나타났어. 회원권을 위조해서 수영장 청소를 하게 된 소년.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녀석이 와서 첨벙첨벙 물살을 신나게 가르는 거야. 소위 '개헤엄'이라고 하잖아? 영, 폼도 어설프고 본적 없는 영법이야. 근데 이상하게 빨라. 까까머리 소년은 금세 수영장 유명인사가 됐어. 소년의 얼굴을 보여줄게.
혹시 누군지 알아보겠어?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이야.
▲ 해남 소년의 잠재력을 알아본 귀인
오련이는 저 멀리 땅끝마을 해남에서 왔어. 수영하겠다고 다니던 학교도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왔단 거야. 시골에서 왔다고 툭툭 건드는 친구들도 있었고, 연습을 방해하는 것도 다반사야. 그런데 오련이는 기죽는 법이 없어. 수영장에 마지막까지 남아 끝까지 연습했대.
그런 오련이를 유심히 지켜보는 사람이 있어. 바로, 오산고 1학년 석기. 석기도 오련이처럼 항상 그 수영장에 마지막까지 남았거든. 석기는 수영에 대한 열정도 있었고, 집이 수영장이랑 가까워서 늦게까지 연습했어. 그런데 오련이는 집도 절도 없는 신세야. 그래서 수영장 근처 간판 가게에서 일하며 임시 방편으로 숙식을 해결했어. 친구인 석기가 보기에, 오련이는 어떻게 보였을까?
"오련아, 합숙소라 생각하고 그냥 내 방에서 지내. 엄마한텐 내가 말씀드릴게."
석기와 오련이는 그렇게 친구가 됐어. 참 따뜻하지? 둘은 신나게 수영장을 돌고, 집에 올 땐 라면을 사 들고 왔어. 둘이 얼마나 먹었을 것 같아? 무려 열 봉지. 운동하느라 얼마나 허기져. 그렇게 허겁지겁 먹고 기절하듯 바로 잠이 들어. 그리고 새벽 5시면, 종로에서 남산까지 매일 같이 뛰는 거야.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뭐라도 해보자는 마음으로 달렸어. 열일곱, 인생을 건 도전은 그렇게 시작됐어.
오련이의 고향은 전라남도 해남. 어린 시절엔 산과 물이 친구였어. 집 앞 저수지에서 신나게 수영하고 산에 올라서 젖은 몸을 말렸어. 그런데 오련이가 고등학교에 가면서 머릿속엔 미래에 대한 걱정이 가득했다. '돈 있는 애들은 다 서울 가서 공부한다는데, 이래서 대학은 가려나' 이런 생각이 들었어. 한참 고민 많을 때잖아. 그때마다 생각나는 장면이 하나 있었어. 몇 년 전에 아빠 따라 제주도에 갔다가 우연히 한 수영대회를 봤는데, 1등 하는 학생을 보면서 '뭐야, 저 정도는 나도 하겠는데?' 하는 생각이 든 거야.
그래서 오련이는 결심했어. 내복 하나, 책 두 권 들고, 무작정 상경한 거야. 그리고 들고 온 용돈을 탈탈 털어서, 수영인들의 메카라는 YMCA 수영장에 무작정 등록을 했어. '내가 성공할 길은 수영 뿐이다! 성공하기 전엔 안 내려가겠다' 다짐하면서.
오련이의 하루는 엄청 바빠. 아침운동을 하고 나면, 생활비를 벌기 위해 오후엔 간판 집에서 일하고. 오후엔 수영장 청소를 해야 해. 나머지 시간은 온통 수영이야. 이런 일과를 반복했어.
그러던 어느날, 급히 우동 한 그릇 먹고, 또 수영장으로 뛰어들려고 하는데, 한 남자가 오련이를 붙잡아 세웠어.
"학생이 학교도 안 가고 수영만 하는 거야? 그 수영은 대체 어디서 배운 거야?"
수영장 회원 중에 장형숙 씨라고, '장 선생님'으로 불리는 분이 있었어. 소싯적에 수영부에서 활동을 좀 하신 분이었거든. 근데 장 선생님이 보니까 학생이 열심히는 하는데 뭔가 어설픈 거야. 장 선생님은 답답한 마음에 오련이한테 발차기하는 법을 좀 알려주고, 물 밖으로 나왔어. 씻고 사우나도 하고 한참 뒤에 탈의실을 나오는데, 저기 수영장 한쪽에서 쉴 새 없이 물보라가 일어. 오련이가 미친 듯이 발차기만 내내 하는 거야.
'이놈 봐라?'
장 선생님은 곧장 오련이를 데리고 나가서 국밥 한 그릇을 먹였어. 그리고 '학생, 앞으로 수영비는 내가 내줄 테니 한 번 열심히 해봐'라고 말했어. 장 선생님이 오련이의 후원자가 되기로 한 거야.
왼쪽이 장 선생님이야. 장 선생님은 오련이의 개인 코치가 됐고, 친구들까지 불러다 일명 '조오련 후원회'를 만들었어.
이제 오련이가 할 수 있는 건 연습, 오직 연습뿐이야. 연습을 얼마나 열심히 했을 것 같아? 정말 미친 듯이 연습을 했대.
"오련이 형은 기분에 따라 수영을 하지 않아요. 스케줄을 만약에, 이번 주에 10만km을 잡아놨다 그러면 10만을 오전, 오후 해서 10만을 정확히 채워요. 새벽에 아침에 5시에 물에 들어가서 8시까지 3시간 운동을 해요. 그럼 밥 먹고 좀 쉬었다가 10시부터 또 2시간 더 하잖아요. 그 다음 또 쉬었다가 4시부터 6시, 7시까지 또 하잖아요. 연습량이 너무 많고. 그 사람들이 1년간 했던 걸 자기는 한 달 만에 해본다든가. 이런 정도의 악이, 근성이 있었죠."
-이관웅, 조오련의 수영 후배
▲ 슈퍼스타의 탄생
오련이는 성공하겠다는 의지가 엄청났어. 그런데 이때 우리나라 수영 수준이라는 게, 수영에 기술이 필요하단 생각도 못 하던 때야. 그래서 장 선생님은 오련이에게 턴 기술을 집중적으로 가르쳤어. 자유형 때 턴하는 거 본 적 있지? 앞구르기 하듯 발로 벽을 힘껏 밀면서 나오잖아. 그 추진력으로 속도를 내는 거야. 일명, '퀵 턴', '플립 턴'이라고 해. 수영선수한테는 기본적인 기술이지. 근데 당시에는 플립 턴이 아니라, 헤엄치던 손으로 벽을 치고 도는 게 당연했어. 그러던 어느 날 '꼭 손으로 벽을 터치해야 하나?' 누군가 이런 생각을 한 거지. 당시 우리나라에 플립 턴은 아주 선구적인 기술이었어. 오련이는 이 기술을 집중적으로 연습했어. 그저 반복, 열심히 하는 것만이 답이야.
그리고 마침내, 기회가 찾아와. 1969년 6월, 전국체전. 학교 소속이 없던 오련이는 성인들이 뛰는 '일반부' 소속으로 경기에 출전했어. 결과는 어땠을까?
"조오련 군이 남대부 자유형 1500 미터에 출전, 21분 18초로 대회 신기록을 수립해 주목을 끌었다."
-당시 신문 기사 中
오련이는 쟁쟁한 일반부 선수들을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했어. 사람들은 깜짝 놀랐어. 이때, 엄청난 일이 일어나. 대한체육회 회장님이 그 경기를 직관한 거야.
"저 친구, 태릉 선수촌에 당장 입촌시켜!"
이때가 마침, 태릉선수촌에 수영장이 막 만들어지던 때야. 타이밍 기가 막히지? 오련이에겐 그야말로 기적이 일어난 거야. 그 뒤론 일사천리였어. 해남에서 못다 마친 학교까지 다니게 됐어. 수영 명문, 양정고에 입학허가가 난 거야.
태릉선수촌에 입촌한 오련이는, 이제 돈 걱정 없이 온종일 수영을 할 수 있다는 게 가장 좋았대. 오련이는 연습에 더 박차를 가했어. 선수촌에서도 독한 놈으로 통해.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대.
"저희들이 이제 50미터 잠수를 하고 다시 돌아서 75미터 이쯤에 물 위로 나온단 말이에요. 우리 같은 같이 하는 사람들은 75미터에서도 물 위로 나오고, 80미터에서도 나오잖아요. 오련이 형은 그거를 안 지려고, 오다가 기절해서 물속에 빠져버린 적도 있어요. 우리가 가서 끄집어내서 나오죠. 그러면 '또 하자, 또 하자' 그래요. 그 사람이 기본적으로 독한 거, 독한 면이 많아요."
-이관웅, 조오련의 수영 후배
오련이는 승부욕이 어마어마해. 그렇게 태릉 선수촌에서 실력을 갈고 닦았어. 그 뒤로 연달아 전국 대회에 나갔는데, 나가는 대회마다 우승을 휩쓸어. 그것도 매번 기록 경신. 한 해에만 11번의 한국 신기록을 깼어. 그야말로 혜성처럼, 한국에 수영 천재가 등장한 거야. 그리고 오련이는 마침내, 왼쪽 가슴에 태극 마크를 달게 됐어. 국가대표 발탁이야. 수영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 채 1년도 안 됐을 무렵이야.
1970년, 제6회 아시안게임. 태국 방콕에서 열리는 경기야. 대한민국을 대표해서 레인 앞에 선 사람, 조오련. 불과 1년 전에 해남 저수지를 헤엄치던 소년이 국제 무대에 서게 된 거야. 당시 아시아의 수영 강자는 일본. 지난 아시안게임에서 경영 남녀 종목은 총 26개였는데, 금메달 26개를 일본이 싹쓸이 했어. 사실상 오련이에겐 한일전을 앞둔 거야. 첫 경기를 앞둔 오련이는 코치에게 이렇게 말했대.
"어떻게 되든 일본 선수들과 한번 겨뤄 보겠습니다. 지쳐 자빠지면, 물에서 건져나 주십시오."
첫 경기는 자유형 400미터. 출발선에 일곱 명의 선수가 도열하고, 탕! 운명의 레이스가 시작돼. 오련이는 있는 힘을 다해 팔을 휘저었어. 치열한 접전에 장내는 고요해졌어. 일본의 독주일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거지. 어느덧, 마지막 50미터. 선수들의 막판 스퍼트가 이어져. 오련이도 필사적으로 피치를 높였어. 그리고 마침내, 터치패드에 손을 찍었어. 눈꺼풀의 물방울을 털고 전광판을 보는데, 전광판 가장 위에 랭크된 건 'KOR'. 대한민국이었어.
"만세!!! 조오련! 금메달!!"
대한민국 경영 첫 금메달이 탄생하는 순간이야. 일본 선수를 무려 1초 앞지르고 승리했어. 당시 아시아 신기록이었어. 오련이의 기록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어.
"이번 대회 영웅 조오련 선수는 수영 400미터 경기에서 아시아 신기록을 세운 뒤, 다시 남자 자유형 1500미터에서 17분 25초 7로 아시아 신기록을 세우고 우승, 우리나라 최초의 수영 2관왕이 됐습니다."
-당시 뉴스 보도 中
조오련은 무려 아시안게임 2관왕을 기록했어. 수영으로는 최초야. 일본을 꺾고, 시상대 가장 높은 곳에 선 거야.
"어떻게 우리가 수영을 일본을 이길 수가 있지? 너무나 감격적이었고, 우리가 일본을 이겼다고 난리가 났었죠."
-이관웅, 조오련 수영 후배
한국에 돌아온 오련이에겐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비행기 트랩을 내려오자마자 헹가래에, 여의도에서 시청을 가로질러 카퍼레이드까지 쫙 펼쳐졌어. 스포츠계를 뒤흔든 수영 스타의 등장이었어. 해남 소년은 '국민 영웅', '국민 남동생'이 됐어. 이때 생긴 별명이 바로 '아시아의 물개'야.
조오련의 등장으로 우리나라엔 수영 열풍이 불기 시작해. 전국에 수영장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하고, 수영을 배우겠단 강습생도 엄청 늘었어. '수영으로 성공할 수 있다' 이런 꿈을 꾸게 된 거야. 그 중엔 우리가 잘 아는 분도 있어.
"학교를 가는데 라디오에 온종일 그게 나오는 거예요. 조오련 선배에 대해서 뉴스에. '나도 수영을 해야 되겠다' 이미 금메달을 따고 나서의 그 일화는, 해남 섬마을 소년이 어떻게 고생했고 그런게 쭉 나오는 거였어요. 그건 저 뿐만이 아니라, 그거를 듣고 종로 YMCA에 와서 끊어서 하는 꿈을 안고 오는 친구들이 참 많았어요. 수영을 하려고."
-노민상, 전 수영 국가대표 감독
전 수영 국가대표 감독인 노민상 감독도 조오련을 보면서 꿈을 키웠대. 손짓하나 눈빛 하나하나까지 다 닮으려고 했대.
"우상이 하는 건 다 영웅같이 보이는 거예요. 아무리 그게 나쁘고 좋고 하더래도, 다 멋있게 보이는 거예요. 하물며 벙거지 모자 자체도 멋있게 보였으니까."
-노민상, 전 수영 국가대표 감독
근데 진짜 닮고 싶은 건 정신력이었어. 조오련이 직접 쓴 수기가 있어.
"선수촌에서 다른 선수들은 크로스컨트리를 맨몸으로 하나, 나는 8킬로의 모래주머니를 메고 뛰며, 선수촌에서 합숙 중 잠이 안 올 때면 운동장을 뛰곤 했다. 건방진 말인지 몰라도 적어도 남을 이기려면 남모르는 고통을 통한 무단의 노력이 필요하다. 나는 방콕에 와서도 복싱 선수들이 6시부터 시작하는 로드 워킹을 기다려 함께 뛰었다. '이 시간에는 일본 선수들이 잠자고 있겠지' 생각하면서. 그러나 나는 뛴다는 자부심을 가졌다."
-조오련의 수기 中
그로부터 4년 후, 1974년 테헤란에서 열린 제7회 아시안게임. 오련이는 이번에도 출전했어. 이전 대회와 달리, 어느 정도 오련이의 전력이 다른 나라에 노출된 상태잖아. 당연히 견제가 들어오겠지. 하지만 조오련은, 이번에도 금메달을 땄어.
"한국의 조오련 선수는 아시아대회 신기록으로 우승, 6회 대회에 이어 2연패 했습니다."
-당시 뉴스 보도 中
그런데 경기를 끝낸 오련이가 가방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내. 흰 모시옷과 고무신, 그리고 태극 머리띠야. 시상대에 오를 때, 보통 트레이닝복을 입잖아? 그런데 오련이는 한복을 입고 고무신을 신고 머리에 태극띠를 두르고 나타났어. 스물셋, 애국청년 오련이의 모습은 국민들에게 큰 위로와 감동을 줬어.
특히 오련이는 1500미터에 사활을 걸었대. 1500미터는 레이스가 길잖아? 자기가 선두에서 앞서가면, 그만큼 오래 대한민국을 뽐낼 수 있으니까.
하지만, 거기까지였어. 4년 후, 3연패를 꿈꾸며 아시안게임에 다시 출전했지만, 성적은 접영 200미터 동메달. 물론 새로운 종목에서 따낸 값진 메달이었지만, 찬란했던 시절은 지나고 있었어. 당시 나이 스물일곱. 지금이야 관리를 잘하면 선수들이 더 나이가 들어서도 선수 생활을 하지만, 그때만 해도 20대 후반이면 선수로서 전성기가 지났다고 했어. 화려한 스포트라이트가 이제 사라지고 있던 거야. 조오련은 이 아시안게임을 끝으로, 사실상 선수 생활 은퇴를 하게 돼.
근데 오련이의 이야기는 여기가 끝이 아니야. 진짜는 지금부터야.
▲ 수영장 밖, 원대한 계획
다시 땅끝마을, 해남이야. 고향 후배인 관웅 씨가 전화를 받았어. 목포 선착장에서 보자는 오련이 형의 연락이야. 호출을 받고 나갔더니, 오련이 형이 대뜸 배 한 척을 띄우고 그 배를 따라서 저 멀리 섬까지, 바다 수영을 하자는 거야.
"전국 체전 끝나면 시간이 많잖아요. 그럼 목포에서 배를 갖고 가요. 배는 천천히 가고, 우리는 뒤에 따라 수영하고. '저 섬까지 가자' 하면 저 섬까지 가고요. 또 내려서 좀 쉬었다가 밥 먹고 또 '저 섬까지 가자'…"
-이관웅, 조오련 수영 후배
수영장도 아니고 종일 바다를 수영으로 돌면, 힘이 남아나겠어? 근데 오련이 형은 지치는 법이 없어. 현역인 관웅 씨가 못 따라갈 정도야.
"저희들은 하루 바다 수영하면 입안이 팅팅 불어 터져 갖고, 입술이 여기까지 오거든요. 근데 그 형님은 다음 날 아침에 또 나가자고 해요. 밥만 먹고 나가자 그 얘기야. 그래서 '이상한 사람이네' 우리는 놀러 가는 걸로 생각을 하는데. 막 기를 쓰고 훈련하는 거예요."
-이관웅, 조오련 수영 후배
한동안 그렇게 바다를 헤엄치던 어느 날. 조오련은 누군가를 찾아가. 바로 수영 선배, 지봉규 씨야. 지봉규 씨는 지금도 그날을 잊지 못한대.
"하루는 오더니, '나 저기 대한해협을 건너가려는데 어떻겠어요?' 그래. '뭐 안 될 게 뭐 있어 하면 되지'. 다른 사람들한테 다 물어봤더니 안된다고 그러더래요. '네가 아시아의 1등인데, 아 그럼 못할 게 뭐 있냐. 하면 되지'…"
-지봉규, 조오련 수영 선배
대한해협을 건너겠다는 계획이야. 그러니까, 일본까지 헤엄 쳐서 가겠다는 거야. 장난이 아니라 실제 상황이야.
대한해협은, 대한민국과 일본 규슈지방 사이의 바다를 말해. 일본까지의 최단 거리는, 부산 태종대에서 대마도 북단 사오자키 등대까지 약 48km야. 근데, 바다를 헤엄쳐 건너는 건 직선거리와는 달라. 해류를 생각하면 60km 정도로 봐야 해. 60km면 마라톤 풀코스를 한참 넘는 거리야. 시속 3km 정도로 간대도, 20시간을 헤엄쳐야 해. 이게 가능한 일일까?
만약 성공한다면, 대한해협을 건넌 최초의 인류가 되는 거야. 조오련이 도전장을 던진 것도, 그 이유야. 많은 사람들이 만류했지만, 선배 지봉규 씨는 확신했어. 이 사람은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이니까. 지봉규 씨는 대한해협 횡단 감독을 맡기로 해.
실내 수영과 바다 수영은 천지 차이야. 낮은 수온과 조류의 영향을 다 버텨내야 해. 물길을 안내해 줄 선장, 훈련을 함께할 코치와 감독, 도전을 기록할 기자단까지 한 팀이 꾸려졌어. 디데이는 그나마 수온이 오르는 7월에서 8월 사이로 정했어. 남은 시간은 8개월 정도.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엄청난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거야.
▲ 인간 한계에 도전하다
장거리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건 지구력이야. 횡단 팀의 첫 코스는 도보 행군이었어. 서울에서 조오련의 고향, 땅끝 해남까지 걸었어. 이어지는 건, 잠 안 자고 버티기 훈련. 제주도를 무려 22시간 동안 쉬지 않고 돌았어. 이동한 거리만 91km야.
그 사이, 지 감독은 바다 상황을 계속 확인했어. 지역 어부들을 만나 자문을 구하는데, 흔한 일은 아니지만 상어가 나타날 가능성도 있대. 상어가 아니더라도, 여러 해상동물의 공격을 받을 수 있다는 거야. 며칠 동안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지 감독님은 고기 잡을 때 쓰는 족대를 활용하기로 했어. 커다란 그물 안전망을 제작하는 거야. 배에 그물을 연결해서 끌고 그 안에서 안전하게 헤엄치게 하는 거야.
조오련은 이제, 바다 적응 훈련에 집중해. 장거리 연습부터 캄캄한 밤 수영까지, 실전에 가까운 연습을 이어갔어. 그사이 몸에 큰 변화도 생겼어. 70킬로였던 몸무게가 85킬로까지 분 거야. 대한해협의 수온은 낮아도 한참 낮아. 그런 바다에서 장시간 수영하면, 저체온증으로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대. 그래서 지방을 늘리기로 한 거야. 한 달에 먹는 고기만 무려 100근이었대.
1980년 8월 11일 자정. 8개월을 준비한 도전, 바로 그 날이야. 기상상황을 고려해 한밤중에 출발하는 거야. 바다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누구도 알 수 없어. 칠흑같이 어두운 방파제 앞. 하얀 모자와 수영복을 입은 조오련이 나타나자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져.
8월 11일 00시 5분. 사람들의 응원을 뒤로한 채 풍덩! 조오련은 힘차게 물을 가르며 다대포항을 떠났어.
출발은 아주 좋아. 커다란 안전망이 조오련을 감싸고, 조오련은 빠른 속도로 앞으로 나아가. 시속 4km 정도의 속도로 한 시간을 가더니, 그 다음 한 시간은 무려 시속 7km를 넘어섰어. 그런데 그때, 조오련이 신호를 보내. 금세 에너지가 떨어져 배가 고프다는거야. 바다 수영하면서 식사, 어떻게 할 것 같아?
조오련은 바다에 뜬 채 따끈한 깨죽으로 첫 해상 식사를 했어. 그리곤 속이 거북할지 몰라 소화제를 탄 더운 물을 들이켰어. 따뜻한 죽을 먹이려고 배 안에선 종일 죽을 쑤고 있었대.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갑자기 문제가 생겼어. 갑자기 조오련이 괴로워하는 거야.
"한두 시간 갔거든. 그랬더니 딱 멈춰달라고 그래요. '왜 그러냐' 그랬더니, '몸이 따가워서 아주 못하겠다'는 거야. 물에 들어가서 보니까, 그냥 해파리가 안전망에 꽉 붙었어요."
-지봉규, 대한해협횡단 감독
지 감독이 급히 바다로 뛰어 들었어. 근데 해파리가 많아도 너무 많아. 지 감독은 안전망 밖으로 오련이를 나가게 하고, 안전망을 반대로 돌렸어. 물살을 이용해 해파리를 떼내려고 한 거야. 다행히 해파리떼가 사라졌어.
그 뒤론 평온한 시간이 이어졌어. 컴컴한 망망대해의 물살을 가르는 사람 하나. 어둠 속의 바다, 헤엄쳐 본 적 있어? 조오련은 무섭기보단 환상적이었대. 수면 위로는 저 멀리 오징어잡이 배 불빛이 비추고, 바닷속은 형형의 빛이 가득 해. 플랑크톤이 빛을 받으면서 빛나는 거야. 조오련은 힘든 와중에도, 조명을 꺼달라 요청을 해왔대. 꿈 같은 바다를 즐기려는 거야. 이때 마치 은하수 속을 떠가는 기분이었대.
어느덧 새벽 5시를 넘어섰어. 조오련은 무려 5시간 넘게 쉬지 않고 헤엄을 친 거야. 기진맥진하지. 그리고 같은 걸 무한 반복하니 지치고 지루해. 응원할 방법이 있을까? 조오련 팀은 음악을 준비했어. 넓고 푸른 바다 위로 신나는 음악이 울려 퍼져. 조오련은 음악의 효과인지, 더 힘차게 물살을 갈랐어. 하지만 위기가 또다시 찾아와.
"새벽 되기 전에, 오련이가 자꾸 이상한 행동을 하는 거예요. '야 너 왜 그러냐' 하니까, 멀미가 난다는 거예요. 자꾸만 몸이. 물 속 해류에 섞여 있는 것들이 물보라를 이렇게 치면 그게 싹 움직이면서 새파랗게 돼. 그러니까 바깥에 무덤가에 도깨비불 파랗게 떠다니는 것 같이 그렇게 돼. 하다가 보니까 어지러운 거지."
-지봉규, 대한해협횡단 감독
오랜 시간 아무런 좌표도 없는 망망대해를 헤엄치고 있잖아. 그러다 보니 어지럽고 환각까지 보인다는 거야. 조오련은 그 와중에도 쉼 없이 팔을 젓고 있어. 이건 그냥,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 상황이지.
▲ 대한해협 횡단, '인류 최초'의 기록
어느덧 출발 12시간 째야. 그때, 지 감독 눈에 저 멀리 뭔가 보여. 저 멀리 어렴풋이 수평선이 펼쳐지더니 대마도 등대가 모습을 드러낸 거야. 예상보다도 엄청나게 빠른 페이스였어. 조오련의 얼굴엔 드디어 미소가 번져. 필사의 힘을 다해 팔을 내 저었어. 어느새 목적지가 1km 앞으로 다가와.
여기서부턴 배가 안전망을 끌고 갈 수 없어. 조류가 엄청 세거든. 이제 오련이 혼자 가야해. 안전망 속을 헤엄치던 조오련은 힘차게 그물을 빠져나왔어. 혼신의 힘을 다해 이를 악물고 양쪽 팔을 저었어.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리고 마침내, 목적지인 대마도 등대에 도착해.
맨몸으로 수영해서 일본까지 건넌 거야. 조오련은 힘차게 태극기를 흔들었어. 기록은 13시간 16분 10초. 예상했던 기록을 6시간이나 앞당긴 거야. 그만큼 초인적인 힘으로 물살을 갈랐어.
입항 절차를 마치고 부두에 발을 딛자, 엄청난 환호가 쏟아졌어. 소식을 듣고 찾아온 재일 동포들이야. 기진맥진한 조오련을 향해 꽃다발을 막 안겨. 도전 후, 조오련은 이런 말을 했어.
"내가 수영을 끊임없이 하는 진짜 이유는, 나를 이기는 힘. 있는 힘을 끝까지 다 써서 마지막에서 뭍으로 나와서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 때 쾌감을 자꾸만 다시 느끼고 싶기 때문이다."
그때 느낀 희열과 쾌감, 엄청났겠지? 조오련은 다시 한번 아시아의 물개란 걸 증명했어. 영화 '친구'에 그런 대사가 나오잖아.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하고 바다 거북이하고 둘이 헤엄치기 시합하면 누가 이길 것 같노?'라는 대사. 그만큼, 조오련이란 이름은 이제 '수영' 하면 떠오르는 고유대명사가 됐어.
그 후 조오련은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오랜 꿈이던 수영 교실도 열었어. 이제 힘들었던 시절은 추억으로 남겨놓고 평온한 삶을 즐기기만 하면 돼.
▲ 다시 바다로, 20년 만의 도전
그런데, 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나봐. 대한해협 횡단에 성공한 지 20년 후. 마흔 아홉의 조오련은 다시 바다에 나타났어. 2000년 방영됐던, SBS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뷰티풀 라이프'의 '대한해협 횡단 프로젝트'를 통해서.
"안녕하십니까? 조오련입니다. 제가 1980년도 8월 11일날 대한해협을 횡단했지마는 그 당시에 한 50살이 넘으면 다시 한 번 횡단해봐야겠다, 국민들하고 약속을 했었는데. 계주로서, 훌륭하신 분들과 함께 릴레이로 대한해협을 횡단코자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배우 이훈, 소지섭, 그룹 베이비복스 등이 출연했던, 이 프로젝트 알아? 당시 2002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한국과 일본을 이어줄 초대형 이벤트로 마련됐어. 조오련이 빠질 수 없잖아. 다시 한번 대한해협을 건너기로 한 거야. 근데 여러 사람이 하는 프로젝트라, 어찌 보면 더 험난할 지도 몰라.
"저는 그때까지 수영을 못했어요. 그래서 '나는 안 한다'고 했는데, 조오련 선생님이 가능하다는 거예요. 제가 매일 수영 연습을 했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아킬레스건염이 오고요. 수영을 한 일주일 쉬었어야 됐고. 그런데 조오련 선생님이 전화 오신 거예요. '너 더 이상 쉬면, 못 건너간다' 진짜로 저를 야단치기도 하고, 독하게 가르쳤죠 진짜. 고생 많이 했어요."
-이훈, 연예인 횡단 팀장
횡단팀 팀장이었던 배우 이훈. 수영 실력은 부족했어. 하지만, 조오련은 열정적으로 팀원들을 챙겼어. 차츰 서로에 대한 믿음도 생기고 팀원 모두가 의기투합하기 시작해. 어느새 실력도 많이 발전했어.
마침내 그날이 됐어. 2000년 8월 12일, 대망의 대한해협 횡단 날이야. 횡단팀은 각자 소중한 사람들과 반드시 성공해 돌아오겠다는 인사를 나눴어. 떨리는 그 시작, 횡단 첫 주자는 누구일까?
바로 조오련. 조오련이 바위 위에 홀로 섰어. 스물아홉 나이로 대한해협을 건넜던 조오련이, 마흔 아홉이 되어 다시 출발점에 선 거야.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 포기를 모르는 위대한 여정
시작은 순탄했는데, 예상치 못한 샛바람이 엄청나게 부는 거야. 파도가 높아지면서 안전망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배 안으로도 바닷물이 들이쳐. 기상이 더 나빠지면 위험해. 배가 전복될 수 있어.
결국 철수를 결정했어. 횡단을 시작한 지 벌써 10시간, 반 이상 오긴 했는데 거기까지였어. 안전이 중요하니까.
횡단팀은 다시 의지를 다지면서 2차 도전을 시작했어. 그런데 하늘이 맑은가 싶더니, 시간이 쌓일수록 파도가 높아져. 게다가 해파리 떼의 공격까지 시작됐어. 갖가지 역경을 헤치며, 그래도 바다를 계속 헤엄쳐 갔어.
"내가 24년 동안 살면서 제일 길었던 한시간이예요."
-배우 소지섭
어느덧 출발한 지 15시간을 넘어섰어. 다들 지칠 대로 지쳤어. 그런데 그때!
"대마도다 대마도!"
마침내 대마도가 모습을 드러냈어. 20년 만에 맨몸으로 대마도에 다다른 거야.
"마지막에 17명이 다 입수했어요. 그래도 대마도 땅을 밟을 때는… 지금 생각해도 짜릿할 정도로 성취감. 짜릿할 정도로 행복했죠."
-이훈, 연예인 횡단 팀장
꼬박 18시간 11분을 헤엄친 끝에, 75km 대한해협 횡단에 성공했어. 여정이 마무리되는 순간, 다들 만세를 부르며 얼싸 안았어. 20년 전 조오련이 홀로 싸워온 길을, 이번에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이겨낸거지.
그런데, 조오련의 도전은 끝나지 않았어. 2005년, 일명 '물개가족 독도 횡단' 프로젝트. 두 아들과 함께 울릉도에서 독도까지 120km를 헤엄쳤어. 독도가 우리 땅인 걸 알리려고.
또 3년 후엔, 민족대표 33인을 기리는, 독도를 33바퀴 도는 도전을 했어. 7월 1일 도전을 시작해서 31일, 마지막 33바퀴를 도는 데 성공했어. 그때 그의 나이, 56세였어.
조오련은 왜, 이런 도전을 계속 했을까. 주변에서 그를 본 사람들은, 조오련은 새로운 도전을 통해 국민들에게 계속 희망을 전하려 하는 거 같았대. 그에게 도전은, 삶의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2010년, 환갑을 앞둔 나이. 조오련은 고향 해남으로 돌아와서 마지막 도전을 선언했어. 30년 만에 대한해협을 다시 건너겠단 거야. 이번엔 혼자서. 조오련의 각오는 남달랐어. 한 기자가 물었어. "내일모레면 환갑을 바라보는데 힘들지 않으십니까"라고. 그러자 이렇게 대답했어.
"힘든 게 걱정이겠소.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온몸을 내 던져야제."
그 어느 때보다 들뜬 모습이었어. 그런데, 그렇게 한창 바다로 갈 준비를 하던 어느 날, 조오련은 쓰러진 채로 발견돼. 심장마비였어. 그리고 그길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버렸어.
너무도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된 거야. 국민들은 물론이고 동료들에게도 엄청난 충격이었어.
"자기는 운동선수가 직업이니까 그것밖에 없다. 최선을 다해서 죽을 때까지 그걸 해야 된다, 그걸 딱 머릿속에 갖고 있었던 사람이에요. 다른 건 얼마든지 할 수 있었잖아요. 수영장도 했었고. 근데 자기는 그 수영장, 편한 것이 안 맞은 거예요. 자기는 도전을 해야 돼… 저희 형님 곁에 가서 다시 한번 수영하며 사는 그런 세상을 맞이하고 싶습니다. 형님, 보고싶네요."
-이관웅, 조오련 수영 후배
"바다를 사랑한 만큼, 바다가 저한테 사랑을 주더라고요. 언제가 제일 좋냐 그러면, 전 배는 좀 나왔지만 수영복 입을 때가 제일 행복합니다."
-조오련 생전 인터뷰 中
얻은 명성만으로 편안한 삶을 살 수도 있었는데, 조오련은 도전을 멈추지 않았어. 2020년, 조오련은 대한민국 스포츠 영웅으로 선정됐고, 체육인 중 6번째로 국립 현충원에 안장됐어. 조오련의 오랜 벗, 서울에 상경했을 때 방까지 내줬던 박석기 감독이 이런 이야기를 전해왔어.
"저는 학교라는 울타리 속에서 성장을 했어요. 하지만 오련이는 일단 시작 자체가 도전이잖아요. 서울에 올라온 것 자체가 도전일 테고. 잠시도 그 친구는 긴장을 풀지 못했을 거예요. 처음부터 집념과 야망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라 인생을 스스로 개척하면서 살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 오련이 덕에 저도 마음속으로 경주를 하면서 더 성장한 것 같습니다. 참 부러우면서도 응원하지 않을 수 없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이 서글펐어요."
-박석기, 조오련 친구
양정고에 있는 조오련 기념비엔 조오련이 했던 말이 적혀 있어. '무모해 보일지 모르지만 시작하는 순간 도전이 된다'라고. 그에게 도전은, 어떤 의미였을까?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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