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차 타도 대기 77번… “급식소 없으면 종일 굶어”[밥 굶는 노인들]
50명 중 28명은 ‘독거 노인’
33명은 월수입 60만원 이하
“전기·수도세 두달 넘게 밀려”
결식노인 13명 거동까지 불편
평일 도시락, 주말까지 먹기도 中>
“부천에서 첫차 타고 오전 6시에 무료급식소에 도착했는데, 대기 번호가 벌써 77번이네요.”
지난 10일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원각사 무료급식소에는 이른 오전부터 200여 명의 노인이 줄을 서 아침밥을 기다렸다. 12년 전 아내와 사별하고 독거노인이 됐다는 최모(75) 씨는 ‘77번’이라 적힌 대기번호를 보여주며 “아침, 점심, 저녁 3끼를 모두 무료급식소에서 해결한다”며 “집에 가면 라면밖에 없고, 요리해 먹을 엄두도 못 낸다”고 말했다.
문화일보가 지난 5일부터 10일까지 무료급식소·도시락 배달 현장에서 만난 ‘결식노인’ 50명에게 ‘밥을 굶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묻자 “돈도 없고, 힘도 없고, 함께 먹을 사람도 없다”고 토로했다. 이들 4명 중 한 명은 “무료급식 지원 사업이 없으면 하루에 한 끼도 못 먹는다”고 답했다.
◇“가스비, 전기세도 못 내고 있어” = 끼니를 거르는 이유에 대해 이들 중 절반 이상인 26명이 ‘경제적 어려움’을 호소했다. 33명은 한 달 수입이 기초연금과 수급비 등을 포함해도 60만 원 이하라고 답했다. 근로소득이 있는 노인은 거의 없었다. 무료급식 외 이들이 꼽은 주식은 ‘라면’이 가장 많았다. 편의점 도시락, 교회에서 나눠주는 떡 등의 답변도 나왔다. 80대 권모 씨는 “가스비와 전기세, 수도세 등 공과금이 두 달 넘게 밀려 있다”며 “식비로 지출할 돈이 없어 매일 무료급식소에서 아침, 점심을 해결하고 저녁은 굶는다”고 말했다. 고령에도 병든 아들을 돌보고 있다는 김모(86) 씨는 아들의 약값과 병 수발에 기초연금 30만 원을 전부 쓴다고 했다. 남은 생활비에서 월세 등을 제외하면 한 달 가용 식비는 10만 원에 불과하다. 아픈 아들은 흰 죽, 자신은 라면이 주식이다. 봉사단체가 주 1회 가져다주는 반찬을 일주일 내내 조금씩 나눠 먹는다.
◇“병든 몸, 요리·이동 불가” = 결식노인들은 지병 등으로 거동이 불편한 경우가 많았다. 장을 봐오거나 무료급식을 주는 경로당 등을 방문하는 것조차 힘든 상황이다. 50명 중 13명은 끼니를 거르는 이유를 ‘식사를 차려 먹을 환경이 안 돼서’라고 답했다. 무료 도시락에 끼니를 의지하고 있다는 최모(71) 씨는 허리협착증을 앓고 있다. 허리를 펴고 걷는 것조차 극심한 고통을 수반해 장을 보러 나갈 수도, 불 앞에 서서 요리를 할 수도 없다. 복지관에서 평일 점심에 배달해주는 도시락으로 연명하고 있지만 주말엔 이마저도 없다. 최 씨는 평일에 받은 도시락 반찬을 조금씩 남긴다. 주말에 먹기 위해서다. 류머티즘 관절염을 앓는 전모(84) 씨는 관절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밥 먹다 숟가락을 여러 번 떨어트릴 정도다. 똑바로 서서 걷는 것도 힘들어 집에서 ‘사족보행’ 하듯 팔뚝을 사용해 기어다니다가 피부가 전부 쓸렸다. 휠체어를 타지 않으면 열 걸음도 못 걷는 전 씨에게 오르막을 20분 올라야 나오는 마트에서 장을 봐오는 일은 불가능하다. 전 씨는 “구청과 봉사단체의 도시락 배달이 없으면 굶어 죽는다”고 말했다.
◇“돌봐줄 가족도 없어” = 이들의 절반 이상인 28명은 독거노인이었다. 40년째 홀로 살고 있다는 이모(69) 씨에게 ‘외롭지 않냐’고 묻자 “해결해주지도 못할 거면서 왜 묻냐”는 답이 돌아왔다. 결혼 5년 차에 이혼한 후 반평생을 혼자 살았다는 이 씨는 외로움이 갈수록 심해져, 밥을 먹고 살아가야 할 의미를 모르겠다고 한탄했다. 매일 아침 원각사 무료급식소에서 다른 노인들과 나누는 ‘생존 신고’가 이 씨의 유일한 사회적 활동이다. 무료 도시락 배달 봉사단체 관계자는 “어르신 댁을 방문하다 보면 집 안까지 들어와 얘기 좀 나누다 가라며 통사정하는 분들이 많다”며 “사실 이들이 기다리는 것은 도시락이 아니라 사람의 손길일지도 모른다는 인상을 받는다”고 말했다.
박승희 성균관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빈곤층 노인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이유로 끼니를 거르는지, 예를 들어 경제적 이유인지, 신체적 이유인지, 사회적 이유인지 유형 분석이 지원책과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전수한·김린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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