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열의 산썰(山說)] 24. 산에 길을 낸 죄를 묻다니, 무도즉안전(無道則安全)의 오판

최동열 2024. 6. 14.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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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릉시 성산면에 있는 대관령 옛길 표지석.

■관찰사 고형산(高荊山)의 애민(愛民)의식이 담긴 관동대로

험산에 길을 낸 죄로 사후에 무거운 형을 당한 사람이 있다면 믿을 수 있을까. 그런데 실제로 험준한 산길에 사람들이 다니기 편하도록 길을 넓혔다가 치죄를 당한 사람의 전설이 전해진다. 조선시대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고형산(高荊山·1453∼1528년)이다.

조선 중종 임금 때 호조·형조·병조판서와 우찬성 등 요직을 두루 거친 청백리인 고형산은 1511년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한 뒤 대관령에 우마차가 다닐 수 있도록 길을 넓히는 등 한양으로 통하는 관동대로를 대대적으로 정비한 인물이다. 관찰사 재직 시절, 강릉성과 삼척진 등 동해안 5개 지역과 포진에 성을 쌓고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게 하는 선견지명 대책까지 실행에 옮겼으니, 국방과 백성들의 평안을 위해 노심초사하는 목민관의 전형을 그를 통해 볼 수 있다.

그런 그가 대관령에 길을 낸 죄로 사후에 부관참시라는 극형을 받았다는 얘기가 전해지니, 전설이라고는 하지만, 그 죄의 연유가 무엇인지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다.

▲ 대관령 옛길. 계곡을 따라 산길이 펼쳐지다가 산고개로 급하게 오르는 형태로 이어진다.

‘부관참시(剖棺斬屍)’가 무엇인가. 무덤에서 시신을 파내 주검을 베거나 목을 베어 거리에 내걸었던 형벌이다. 그 사람이 살아 있었다면 거열이나 능지처참 등의 극형으로 죄를 물어야 했으나, 이미 죽은 목숨이니 무덤의 시신이라도 파내 능지처참 못지않은 형벌을 내려야 한다는 차원에서 부관참시 형이 행해졌다.

그런데 고형산이 부관참시를 당한 죄는 대관령에 큰 길을 낸 죄이다. 잔도(棧道·벼랑에 걸린 길)나 조도(鳥道·새가 넘나드는 길)라 불릴 정도로 험준한 대관령 고개에 백성들이 넘나들기 쉽도록 넓은 길을 냈으니 오히려 큰 상을 내려도 모자랄 판에 무덤이 파헤쳐지는 극형을 당하다니. 요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대목이다. 사재(私財)까지 들여 대관령에 길을 닦았다고 하니 지금 생각으로는 “세상에 이런 관리가 어디 있냐”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것이 순리다. 그런 공적에도 불구하고 고형산이 사후에 형을 받은 이유는 그가 닦은 대관령 길이 나중에 외적의 침략 루트로 사용됐다는 것 때문이라는 것이다.

전해지는 얘기인즉, 병자호란 때 청의 군사 일부가 동해안 강릉에 상륙한 뒤 대관령을 넘어 곧바로 한양으로 직행하는 상황이 빚어지면서 대관령에 길을 낸 고형산이 임금의 진노를 사게 된 것이다. 나중에 서울로 통하는 대관령 길의 활용도가 높아지면서 목민관으로서 백성들의 고충과 불편을 살핀 그의 공적을 재평가해 조정에서 위열공(威烈公)이라는 시호를 추증하고 땅을 내리기도 하지만, 강릉∼한양 간 길을 닦았다가 극형으로 다스려졌다는 고형산의 일화는 비록 전해지는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과거 왕조시대에 ‘무도즉안전(無道則安全)’ 인식이 얼마나 팽배했는지를 확인케 하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 대관령 옛길. 계곡을 따라 산길이 펼쳐지다가 산고개로 급하게 오르는 형태로 이어진다.

■성(城)을 쌓는 자는 망하고, 길을 내는 자는 흥한다

무도즉안전은 한자 뜻 그대로 ‘길이 없으면 안전하다’는 뜻이다. 곧게 펴진 좋은 길을 만들면 북방이나 남방의 이민족들이 그 길을 타고 쉽게 한양 도성까지 침략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예로부터 병가(兵家), 즉 군(軍)의 입장에서는 길을 내는 것은 걱정을 더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외침에 시달린 국난 극복사를 살펴보면 그런 인식에 한편으로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소극적인 방어책으로 인해 우리의 육로 교통은 근대에 이르기까지 열악한 사정을 벗어나지 못했다. ‘성(城)을 쌓는 자는 망하고, 길을 내는 자는 흥한다’는 말이 있다. 오늘날 유럽 문명의 기틀을 다지면서 정신적 지주가 된 고대 로마는 사통팔달 로마 가도를 닦음으로써 세계 경영의 토대를 구축한 반면, 동시대 중국의 통일제국 진(秦)나라는 만리장성이라는 거대한 성벽을 쌓는데 국력을 허비하면서 민심이 이반되고, 결국은 망국의 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관찰사 고형산이 대관령을 비롯 관동대로에 영동∼서를 연결하는 넓은 길을 낸 때문에 후일 병자호란 때 청군 일부가 한양으로 쉽게 진격하는 화(禍)를 불렀다고 진노한 인조 조정은 남한산성이라는 벽에 의지한 채 준비 없는 저항을 하다가 결국은 백성들 희생만 키운 채 무릎을 꿇었다. 그냥 항복을 한 것이 아니라 왕이 삼전도 나루에 끌려 나가 오랑캐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라는 우리 역사상 유례없는 항복 의례까지 올렸으니 이만저만 치욕이 아니다. 그런 치욕을 당하고도 국가 경영의 대책을 제대로 마련하지 않고 대관령에 넓은 길을 냈다는 이유로 옛 신하의 무덤을 파헤치고 부관참시의 극형을 내려 이 땅에 묻힐 자격조차 박탈하려고 했으니 한심하고,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개인이든 국가든, 장벽을 쌓아 보신에 급급하기보다는 길을 닦아 외부와 소통·교류하는데 힘써야 미래가 열린다는 것을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최동열 강릉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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