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북 확성기에 DMZ 고라니들만 감동”…소음 지옥 다시 열리나
일부 탈북민 단체가 뿌린 대북 전단이 북한의 오물풍선 살포→한국의 대북 확성기 방송 재개→북한의 대남 확성기 설치로 이어졌다.
지난 9일 대통령실은 대북 확성기 방송 재개 방침을 밝히면서 “우리가 취하는 조치들은 북한 정권에는 감내하기 힘들지라도, 북한의 군과 주민들에게는 빛과 희망의 소식을 전해 줄 것”이라고 했다. 대북 확성기는 북한군과 주민들의 내부 동요를 유발할 수 있는 치명적인 심리전 무기란 이야기다. 탈북 외교관 출신인 태영호 전 의원도 “휴전선 30㎞ 안에 북한군 70만명이 나와 있는데, 이들이 수년간 확성기 방송을 통해 한국의 음악·뉴스 등을 계속 접하다 고향으로 돌아가면 북한 체제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북한 정권이 감내하기 힘들다’는 대북 확성기의 효과에 대한 객관적 근거는 제시된 바 없다. 국방부가 ‘작전’과 ‘보안’을 내세워 대북 확성기의 성능, 방송 시간과 장소 같은 구체적인 내용을 밝히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대북 확성기의 성능부터 베일에 가려 있다. 일부에서는 대북 확성기가 전방 20~30㎞까지 소리를 보낼 수 있어 최전방 북한군뿐만 아니라 개성, 황해도에서도 방송을 들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2018년 3월 감사원이 공개한 대북 확성기 사업 감사보고서를 보면, 이는 사실과는 거리가 있는 주장이다.
감사원 보고서를 보면, 국군심리전단은 2016년 대북 확성기 작전운용성능 조건으로 가청거리 10㎞를 제시했다. 기존에 도입된 확성기의 가청거리 10㎞를 고려한 기준이었다.
소리가 퍼져 나갈 때는 바람, 습도, 주변 소음 같은 변수에 따라 가청 거리가 달라지는데 대북 확성기의 가청거리 10㎞는 이런 변수를 고려하지 않았다고 한다. 비무장지대에는 산과 계곡이 있고 때로는 바람도 강하게 분다. 여름에는 수풀이 우거져 소리 전달을 막는다. 대북 확성기의 가청거리가 서류상 10㎞라고 해도 막상 비무장지대(DMZ)에서 장병들이 운용하면 날씨와 지형의 영향을 많이 받아 실제 가청거리는 10㎞에 훨씬 못 미쳤다고 한다. 남북이 확성기 방송을 한창 할 때 군 내부에서 “대북방송이 DMZ 고라니들만 감동시킨다”라는 뒷말이 나왔던 이유다.
북한 대남 확성기의 ‘제압 방송’도 대북 확성기 가청거리에 영향을 줬다. 북한은 1980년대까지는 “미제 식민지 남반부에서 고생하지 말고 사회주의 지상낙원인 북으로 넘어오라”며 대남 확성기 방송을 공격적으로 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경제난·식량난으로 북한의 형편이 무척 어려워지자 공세적이었던 북한의 대남 확성기 방송이 소극적이고 방어적으로 바뀌게 됐다.
북한은 최전방의 한국군에게 “입북하라”고 회유하던 대남 확성기 방송 내용을 ‘제압 방송’으로 바꿨다. 제압 방송은 한국의 대북 확성기 방송을 최전방 북한 군인들이 듣지 못하도록 하는 출력·전파방해 중심의 방송을 말한다. 이 방송의 목적이 대북 확성기 방송 내용의 차단이므로 특정한 내용이나 메시지 전달보다는 자체 확성기의 출력을 최대로 높여 대북 확성기 방송을 무력화시키는 맞불개념으로 운용했다.
대북 확성기 방송과 대남 확성기 제압 방송 소리가 뒤섞이면 웅웅거리는 소음만 들리고 대북방송이 북쪽에서는 거의 들리지 않게 된다고 한다. 박근혜 정부 당시 이뤄진 대북 확성기 시험 평가는 가청거리인 10㎞ 떨어진 지점에서 실시했지만 북한의 제압방송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이뤄졌다.
윤석열 정부는 대북 확성기 방송을 재개하면서 비무장지대 지형과 기후 특성이 반영된 대북 확성기의 실제 가청거리, 북한의 제압방송 극복 대책 등을 구체적으로 설명한 바 없다. 대북 확성기 방송 재개 뒤 이와 관련된 기자들의 질문에 군 당국은 작전과 보안을 내세워 침묵한다. 북한 현지 조사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일부 탈북민의 단편적인 전언을 빼면 대북 확성기 방송을 북한군과 북한 주민이 얼마나 듣는지, 어떤 인식 변화를 가져왔는지 등 방송 효과 검증도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윤석열 정부는 대북 확성기 방송이 ‘북한이 감내하기 힘든 조치’라고 주장하나, 현재까지 이 주장을 뒷받침할 대북 확성기의 기술적 성능, 대북 심리전 효과를 구체적이고 객관적 자료로 제시한 바는 없다.
2018년 4월까지 비무장지대와 남북 접경 지역 일대에서는 남과 북에서 트는 확성기 소리가 온종일 요란했다. 당시 북한은 대남 확성기 출력이 약한 한계를 극복하려고 대북 확성기 방송이 뜸한 심야와 새벽에 방송을 자주 했다. 이 통에 장병들과 주민들이 귀마개를 하고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분단 이후 남북은 전단(삐라)과 확성기를 심리전의 주요한 도구로 삼았다. 전단이 소리 없는 ‘종이 폭탄’이라면 확성기는 시끄러운 ‘소리 폭탄’이다. 남북이 서로에게 확성기를 틀면 최전방의 군 장병과 접경지 주민에겐 ‘소음 지옥’이 다시 열리게 된다. 남북이 윙윙거리는 확성기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을 서울과 평양에서 확성기 방송 관련 결정을 한다는 점은 닮은꼴이다.
권혁철 기자 nu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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