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가의 황제 제이미 다이먼, 정치로 나서나
미국의 최대 은행 JP모건체이스의 제이미 다이먼 회장(68)이 최근 처음으로 자신의 은퇴 계획을 구체적으로 밝히자 미국은 물론 전 세계 금융가의 관심이 뜨겁다. 다이먼 회장은 재임 시 JP모건을 자산 규모 3조9000억 달러의 최대 은행으로 키웠고, 미국 경제가 위기에 처할 때면 종종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구원투수’ 구실을 해왔다. 그의 은퇴 시 누가 후임이 될지에도 눈길이 쏠리지만, 현실 정치에 관심이 많은 그가 정치인의 길을 걸을지 여부도 큰 관심사다.
2006년부터 JP모건을 이끌어온 다이먼 회장은 최근까지도 은퇴 시점에 관한 질문을 받을 때 늘 “5년”이라며 농담조로 대답을 피해갔다. 하지만 그는 5월20일 열린 자사 투자자 행사에서 관련 질문을 받자 작심한 듯 “더는 5년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시점은 밝히지 않았지만 은퇴를 공식화한 것이다. 그는 “아직은 정정하다. 하지만 운동 셔츠를 혼자 못 입거나 물건을 못 들면 그만둬야 한다. 후임 선정 작업은 내부적으로 잘 진행 중이다”라고 덧붙였다.
뱅크오브아메리카의 분석 보고서는 그가 2025년 말이나 2026년에 은퇴하리라고 전망했다. 〈월스트리트저널〉 보도에 따르면 JP모건체이스 이사회는 2021년, 그에게 오는 2026년까지 회장직을 유지할 경우 주식평가차액교부권(SAR) 형식으로 스톡옵션 150만 주를 보너스로 지급하겠다고 약속했다. 즉 옵션 행사 시점에 회사 주가가 옵션 제공 당시보다 높으면 그 차액을 현금으로 지급하겠다는 것인데, 업계에선 그가 10년 뒤 최소 5000만 달러(약 688억원) 이상을 챙길 것으로 내다본다.
터프츠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하버드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석사(MBA)를 딴 다이먼은 30세에 ‘컨트롤 데이터’라는 소비자 금융회사의 재무책임자로 발탁돼 일찌감치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는 아메리칸익스프레스를 거쳐 한때 1990년대 시티그룹에서 중역으로 일하다가 2000년 3월 당시 국내 서열 5대 은행인 뱅크원 회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어 4년 뒤 그는 JP모건과 합병을 주도하며 지금과 같은 최대 은행으로 일궈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그가 취임한 뒤 최근까지 회사 주식은 700% 이상 투자수익률을 거뒀다. 그 과정에서 실패도 겪었다. 특히 2012년 자사 런던지점 투자가의 어처구니없는 투자 실수로 최소 20억 달러(약 2조7500억원) 손실을 내고 연방정부의 수사까지 받게 되자 그는 내부 감독에 소홀했다며 자신의 경영책임을 시인하기도 했다.
다이먼 회장은 미국을 덮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다른 금융사들의 회장이 줄줄이 물러난 시기에도 오히려 위기를 극복하며 살아남은 최장수 회장으로도 유명하다. 특히 금융위기 당시 그는 악성 주택담보대출로 도산 위기에 처한 베어스턴스 투자은행과 상업은행 워싱턴뮤추얼을 인수하고 뉴욕의 최대 상업은행이던 체이스맨해튼 은행을 합병해 금융시장의 위기를 해소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구원투수 역할은 지난해에도 입증됐다. 지난해 3월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실리콘밸리 은행(SVB)이 전격 파산한 뒤 견실한 지역은행인 퍼스트리퍼블릭 은행으로 위기가 확산될 기미를 보이자 연방정부는 다이먼 회장에게 긴급 지원 요청을 했다. 그는 뱅크오브아메리카, 시티은행, 웰스파고 은행 등 초대형 은행의 회장들을 설득해 총 300억 달러(약 41조3000억원)의 구제안을 마련해 해당 은행을 극적으로 살렸다. 당시 〈파이낸셜타임스〉는 이를 두고 재닛 옐런 재무장관, 제롬 파월 연방준비제도 의장, 제이미 다이먼 회장의 첫 이름을 거론하며 “제이(J) 세 명이 퍼스트리퍼블릭 은행을 구제했다”라고 이례적으로 다이먼 회장의 수완을 높이 평가했다.
미국 경계 전문지 〈포천〉이 500대 기업 회장의 나이를 조사한 바에 따르면 65세 이상 회장은 89명에 불과하다. 최고령자는 올해 93세인 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이다. 은행권에서 다이먼 회장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은 세계 최대 사모운용펀드사 블랙스톤의 스티븐 슈워즈먼 회장(77), 리처드 페어뱅크 캐피털원 회장(73), 래리 핑크 블랙록 회장(71) 정도다.
올해 68세인 다이먼 회장이 결심하면 70세 이후에도 JP모건을 계속 이끌 수 있지만 그는 은퇴 쪽을 택했다. 일각에선 그가 근 20년째 재계 최장수 최고 기업인으로서 역할을 다했고, 건강에 이상은 없지만 2014년과 2020년 심장 수술을 포함해 두 차례 큰 수술을 받은 병력, 더불어 새 삶에 대한 도전도 은퇴 결심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본다. 또 지난해 봄 후계 작업을 순조로이 마치고 13년 만에 은퇴한 제임스 고먼전 모건스탠리 회장(65)의 처신에 자극받았을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오랫동안 추측으로 떠돌던 그의 은퇴가 구체화되면서 누가 뒤를 이을지 관측이 무성하다. 〈월스트리트저널〉을 비롯한 주요 언론보도에 따르면 현재 유력한 후보로는 대부분 20년 이상 JP모건에서 뼈가 굵은 제니퍼 핍스잭(54), 트로이 로어보 상업·투자 은행부문 공동대표(54), 메리앤 레이크 소비자금융부문 대표(54)가 1순위로 꼽힌다. 메리 에르도스 자산부문 대표(56), 제러미 바넘 최고재무책임자, 대니얼 핀토 최고운영책임자도 물망에 올랐지만 후순위다.
“난 트럼프만큼 강하고, 더 똑똑하다”
다이먼 회장은 지난 1월 경영진 개편을 단행해 핍스잭과 함께 소비자금융부문을 이끌어온 레이크 공동대표를 단독 대표로 승진시켜 발령했다. 반면 2020년 3월 심장 수술 당시 임시회장을 맡아 경영 공백을 메우면서 한때 자신의 후계자로 떠오르던 핀토 최고운영책임자의 경우 그간 겸하던 기업 및 투자은행 부문 대표직에서 물러나게 했다. 이렇게 보면 다이먼의 후임은 핍스잭, 레이크 대표 등 두 여성과 로어보가 겨루는 삼파전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 나온다.
다이먼 회장이 탐독한다는 〈뉴욕포스트〉는 “레이크 대표가 최고재무책임자를 지냈고, 회사의 경영 리스크를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 경쟁 후보보다 유리한 편이다”라고 전했다. 레이크 대표가 다이먼의 뒤를 이을 경우 2021년 3월 시티은행 회장에 취임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제인 프레이저(56)와 함께 초대형 은행의 여성 CEO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다이먼 회장의 은퇴 후 거취도 큰 관심거리다. JP모건의 한 중역은 〈뉴욕포스트〉에 “다이먼 회장은 일주일 내내 근무하고, 취미도 없고 일만 사랑하는 사람이라 은퇴 후 뭘 할지 상상이 안 간다”라고 말했다. 그 때문에 그가 회장에서 물러난 뒤 JP모건 이사회 의장으로 잔류할 것이란 관측도 많다.
하지만 세간의 큰 관심사는 그가 과연 정계에 입문할지 여부다. 그는 지난해 5월 블룸버그 뉴스와 인터뷰하면서 “언젠가 이 나라를 위해 봉사할 날이 올 것이다”라고 말해 대선후보로 나서는 게 아니냐는 관측을 불러일으켰다. 자신의 발언이 폭발적 관심을 일으키자 출마설을 일축했지만 세간의 관심은 꺼지지 않았다. 앞서 그는 2018년에도 “난 트럼프만큼 강인하고, 그보다 더 똑똑하다. 차기 대선에서 트럼프를 이길 수 있다고 본다”라고 말해 큰 정치적 파장을 일으켰다가 나중에 출마를 포기한 적도 있다. 아무리 성공한 기업가라도 공화·민주 당적이 아닌 무소속 신분으로 대선에 출마해 당선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가 대선 출마의 꿈을 접었는지는 몰라도 현실 정치에 대한 관심은 여전한 것 같다. 실제 지난 4월 주주들에게 보낸 연례보고서에서 그는 경제 현안 외에도 국가안보를 언급하면서 “우크라이나는 민주주의의 최전선이다. 정치 지도자들이 ‘어떤 일이 있어도 우크라이나를 지켜내는 게 미국의 확고한 의지’라고 국민을 설득하는 게 급선무다”라고 말하며 당시 이 문제로 지지부진한 의회를 질타한 적도 있다. 이를 두고 유력 인터넷 매체 ‘악시오스’는 “JP모건 회장 취임 후 끊임없이 스스로를 재창조해온 기업인 다이먼은 본질적으로 정치인이 다 됐다”라고 분석했다. 월가에선 과거 헨리 폴슨 골드만삭스 회장이 2008년 금융위기 시절 재무장관을 지낸 전례를 들어 현실 정치의 끈을 놓지 않은 다이먼 회장이 차기 행정부에서 입각하거나 다른 고위직을 맡을 수도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워싱턴∙정재민 편집위원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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