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부한 싸움, 그러나 은근하고 예의 바르게 돌려서 [책&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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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읽기 수업을 개설한 고등학교 교사가 있다.
그 학생은 교내에서 가장 우수한 성적을 거두는 학생이었고, 교사는 그 학생을 생각하며 수업을 구상하고 전개한다.
고전의 진가를 알고 진심으로 수업에 임하는 학생이 있다는 것은 커다란 위안이자 열심히 수업 준비를 하게 만드는 동인이다.
'빨갱이'의 대명사인 마르크스의 이름 앞에 교사와 학생, 학부모, 교장이 내놓는 대응 방식은 각각의 전형을 이루지만, 전형적인 모양새 사이로 보일 듯 말 듯 틈이 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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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교양
2024 제15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수록
김기태 지음 l 문학동네(2024)
고전 읽기 수업을 개설한 고등학교 교사가 있다. 학생들에게 진정한 ‘공부’를 시켜주겠다는 부푼 꿈을 안고 추진한 일이다. 아무도 신청하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이 되지만, 한편으로는 기대가 된다. 누군가 진정으로 고전에 관심을 갖는 학생이 와서 눈을 빛내리라는, 그리하여 가르치는 자신과 학생이 함께 의미 있는 순간을 만들어내게 될지 모른다는 기대다.
현실에서, 수업에 온 학생들 대부분은 엎드려 자거나 다른 과목을 공부한다. 예상을 했음에도 큰 실망감을 안게 되지만, 그래도 교사에겐 한 가닥 위안이 있었다. 학생들 중 한 명이 지대한 관심을 갖고 고전 읽기 수업에 참가했던 것이다. 그 학생은 교내에서 가장 우수한 성적을 거두는 학생이었고, 교사는 그 학생을 생각하며 수업을 구상하고 전개한다. 고전의 진가를 알고 진심으로 수업에 임하는 학생이 있다는 것은 커다란 위안이자 열심히 수업 준비를 하게 만드는 동인이다.
수업 시간에 다루는 책 리스트에 마르크스의 책을 넣지 않았다면 고전 읽기 수업은 아무 문제 없이 부드럽게 유종의 미를 거두었을지도 모른다. 마르크스라는 붉은 이름 앞에서 교사도 일순간 고민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신념에 따라 과감하게 마르크스의 책을 밀어붙였다. 인류가 남긴 고전 리스트에 마르크스의 작품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그 결과 교사는 학부모로부터 민원을 받기에 이른다. 그것도 가장 눈을 빛내며 듣는 단 한 명의 학생의 아버지로부터.
‘빨갱이’의 대명사인 마르크스의 이름 앞에 교사와 학생, 학부모, 교장이 내놓는 대응 방식은 각각의 전형을 이루지만, 전형적인 모양새 사이로 보일 듯 말 듯 틈이 나 있다. 그리고 그 틈새로 작가가 살짝 비틀어 내놓은 반전은 일부러 진부하게 보이려고 설정한 듯한 전체 상황과 어우러져 기시감 섞인 아이러니를 선사한다. 눈에 띄는 것은 교사의 대응이다. 교사는 아꼈던 학생이 내놓은 반응 앞에 멈칫한다. 그러나 이내 평정을 되찾고 자기 세뇌에 들어간다. 입시라는 대한민국의 철통 현실 앞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라고 요약해도 무방할 전형적인 세뇌이다.
정교하게 읽지 않으면 독자가 교사의 마음에 인 파장을 눈치채지 못하고 지나갈 수 있는 위험성은 처음부터 끝까지 ‘은근하고 예의 바르게 돌려 말하기’로 일관하는 이 소설의 독특한 분위기와 직결돼 있다. 때문에 초반에 작가의 의도와 지향점을 인식하고 문장을 주의 깊게 따라 읽지 않으면 의외의 사건에 대한 교사의 반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채기 힘들다.
이 세련된 단편소설과 소설이 실린 소설집 전체와의 관계가 만들어내는 조화도 눈여겨볼 흥미 포인트다. 소설 속 주인공인 교사가 제게 일어난 일에 대응하는 방식은 작품집 말미에 나오는 배명훈의 다소 비판적인 심사평을 그대로 실은 출판사의 대응과 똑 닮았다. 자본주의 체제에 저항해 싸웠던 체 게바라가 넘쳐나는 자본주의 체제 상품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은 현상, 혹은 프랑스 철학자인 푸코가 미국에서 루이뷔통처럼 소비되며 철학의 대명사로 통용되기에 이른 현상을 떠올리게 하는 병렬형 에피소드라 할 수 있겠다.
정아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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