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중인격’은 과연 존재하는가? [책&생각]
영혼 다시 쓰기
다중인격과 기억의 과학들
이언 해킹 지음, 최보문 옮김 l 바다출판사 l 2만7800원
이언 해킹(1936~2023)은 캐나다의 과학철학자다. 젊어서 과학적 대상의 실재성을 옹호하는 ‘존재자 실재론’으로 이름을 알린 해킹은 1990년대 이후 미셸 푸코의 영향을 받아 의학·심리학 같은 현재의 인간과학이 출현한 역사적 맥락을 캐는 고고학적 작업을 했다. ‘영혼 다시 쓰기: 다중인격과 기억의 과학들’(1995)은 이 후기 과학철학 연구의 성과를 보여주는 저작이다. 20세기 말에 정신의학에서 큰 쟁점이 됐던 ‘다중인격장애’를 주제로 삼아 다중인격 진단의 존재론적·인식론적 함의를 살피고, 19세기 정신의학 탄생기의 역사를 고고학적으로 탐사해 다중인격을 포함한 ‘기억의 과학’이 태어나는 과정을 들추어낸다. 최보문 전 가톨릭대 의과대학 신경정신과·인문사회의학과 교수가 전공을 살려 우리말로 옮겼다.
이 책의 논의 주제인 ‘다중인격’은 1970년대 초반 미국에서 갑자기 등장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 도화선이 된 책이 1973년 출간된 ‘시빌: 16개의 독립된 인격을 가진 한 여자에 관한 실제 이야기’다. 과학저널리스트 플로라 리타 슈라이버가 쓴 이 책은 시빌(본명 셜리 메이슨)이라는 여자 환자의 11년에 이르는 정신분석치료 이야기를 담았다. 이 책에는 분석치료 과정에서 성격·직업·국적·성별·연령이 각기 다른 총 16개의 인격들이 수시로 바뀌는 장면이 상세히 기술됐다. 또 이 책은 시빌이 아동학대 피해자임도 밝혔다. 시빌은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서 잔혹한 신체적·성적 학대를 당했지만 그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다. 분석치료를 통해 시빌은 억압된 기억의 회복을 거쳐 16개의 인격들이 하나로 통합돼 17번째 인격으로 다시 태어났다.
‘시빌’은 그해 베스트셀러가 됐고, 이 책에서 처음 등장한 ‘다중인격’이라는 말은 급속도로 퍼졌다. 1980년대가 되자 환자는 수십만명으로 불어났고 다중인격전문치료센터, 다중인격지지운동단체, 전문학회와 전문학술지가 잇따랐다. 다중인격은 1990년대까지 엄청난 대중의 관심을 받았다. 그러나 다중인격이 과연 실재하는지에 관한 의문은 끊이지 않았고 반론도 거세게 일었다. 1994년 미국정신의학협회는 다중인격장애의 명칭을 ‘해리성 정체감 장애’로 바꾸었다. 온전한 인격이 여러 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온전해야 할 인격이 붕괴해 파편화한 것이 문제의 핵심이라는 것이었다.
이 책의 ‘옮긴이 서문’에는 ‘시빌’의 그 뒷이야기가 실려 있다. 한때 시빌을 대리진료했던 허버트 스피겔이 1997년 ‘뉴욕리뷰오브북스’와 인터뷰하던 중에 ‘시빌’의 진실이 드러났다. 스피겔은 시빌이 다중인격이 아니라 고도의 암시성을 지닌 히스테리아 환자였으며, 시빌을 치료한 정신분석가 코넬리아 윌버가 거짓기억을 심어 다른 인격을 만들어냈다고 밝혔다. 스피겔은 녹음테이프도 공개했는데 거기에는 시빌에게 다른 인격들에 이름을 붙여주며 설명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다중인격이 ‘만들어진 병명’이라는 것이 이 과정을 통해 명확히 드러났다.
이 책은 이런 사실이 드러나기 전인 1995년에 출간됐다. 하지만 이언 해킹은 그 뒤의 일을 예견이라도 하듯, 자신은 다중인격의 실재를 의심하는 많은 정신의학자들과 함께 다중인격이 “일종의 거짓의식”이라고 느낀다고 말한다. “거짓의식은 철학자들이 자유라고 부르는 것과 정반대의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최선의 비전에 반대되는 것이다.”
이 결론에 이르기에 앞서 다중인격에 관한 논의를 통해 해킹은 ‘기억’이라는 것을 둘러싼 커다란 물음을 던진다. 기억에 관해 찾아내야 할 심층적 사실이 존재하는가? 해킹의 대답은 부정적이다. 현재의 언어적 도식이 가닿지 못하는 과거의 사건을 현재의 언어로 서술하는 과정에는 필연적으로 자의적 왜곡이 끼어든다. 과거를 소급하여 재해석할 때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의도와 의미가 씌워지고 더 나아가 현재 유통되는 새로운 의미의 사건으로 재분류되는 의미론적 전염이 일어난다. 과거가 다시 쓰이는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 옮긴이는 이렇게 해설한다. “좋든 나쁘든 감정적 부하가 많이 걸려 있는 과거는 재편집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의미론적 전염으로 당시에는 느끼지 않았던 감정까지도 현재의 서사구조에 맞춰 재구성해낼 수 있다는 점에서 플래시백의 진정성도 지금은 의혹의 대상이 됐다.” 정신장애의 진단과 범주는 복합적인 담론과 합의를 통해 사회적으로 구성되기에 정신병리의 객관적 근거를 찾기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이런 특수성 탓에 “정신의학이 성숙한 과학이 되는 것은 매우 요원한 일”이라고 이 책은 말한다. 그렇다면 정신질환의 진단과 처방도 그만큼 신중해져야 할 것이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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