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블루오션이라 욕심 냈던, 실록으로 그린 조선사
한겨레 만평 ‘한겨레그림판’ 데뷔
호흡 긴 만화 그리려 조선사 관심
만화가는 어렸을 때부터의 꿈이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꿈과 먼 삶을 살다가 서른이 되어서야 만화가의 길에 도전했다. 늦은 나이에 기성 만화가의 문하생으로 들어갈 수도 없고 해서 혼자 습작하며 여러 공모전을 두드렸다. 그러나 프로의 벽은 높았고 결국 만화가의 길을 포기하기로 했다. 그리고 반 년쯤 지났을 때 한겨레에서 박재동 선배의 뒤를 이을 ‘한겨레그림판’ 담당자를 뽑는다는 공모가 나왔다. 이미 포기한 터라 못 본 척 두어 달을 보내다가 마감 하루 전날에야 밤을 새워 일곱 장의 만평을 그려 보냈다. 응모자가 많아 2차, 3차, 4차까지 치열한 과정을 거치고서야 최종 선발되었고 나는 만화가가 되는 행운을 얻었다.
그러나 한겨레그림판 작가란 자리는 너무도 무거웠다. 한겨레그림판 보는 재미로 한겨레신문을 본다고들 할 정도로 박재동 선배의 만평은 장안의 화제였고, 그 후임자인 나는 기껏해야 대학 때 학보에 10여 컷 그려본 게 전부인 아마추어였으니 독자들의 실망이 오죽했을까. 결국 1년 만에 한겨레그림판 자리를 내주고 새롭게 ‘박시백의 그림세상’이란 타이틀로 만화칼럼 혹은 만화에세이라 부를 만한 형식의 여러 컷 만화를 그리게 되었다. 이번엔 독자들도 제법 응원과 격려를 보내주었다. 그런데 3년쯤 그리다 보니 걱정이 자라나 갈수록 커져갔다. 나의 만화적 역량은 작은 샘물 같은데 하루에 솟아나는 물보다 퍼내는 물이 더 많아 오래지 않아 고갈돼버릴 것 같다는 불안이었다.
나는 오래도록 만화가로 살고 싶었고 그러려면 호흡이 긴 작품을 해야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박시백의 그림세상’ 작업을 해오면서 막연하나마 어떤 정보나 지식을 만화로 옮기는 일이 내게 잘 맞겠다 생각해오던 터였다. 당시 나는 ‘왕과 비’란 사극을 즐겨봤는데 내 배경지식이 초등학교 때 읽었던 역사책 수준에 머물러 있음을 알았고 틈틈이 신문사 자료실에서 조선사를 다룬 책들을 찾아 탐독하게 되었다. 자연스레 조선 정치사를 그리기로 방향을 잡았는데, 때마침 한겨레에 ‘조선왕조실록’ 국역판 시디(CD)를 판매한다는 광고가 실렸다. 조선사를 다룬 여러 책을 보면서 의아했던 게 동일한 사건을 두고 해석만이 아니라 종종 팩트 자체가 다르게 다뤄지는 것이었다. 아마도 어떤 이는 야사를 기반으로, 어떤 이는 실록을 기반으로 서술함으로써 나타난 문제였으리라. 그렇다면 나는 철저히 ‘조선왕조실록’에 기반해서 작업하자고 결론을 짓고 나니 마음이 급해졌다. 누구도 가지 않은 블루오션이라 어영부영하다간 다른 누가 먼저 해버릴 것만 같았다. 시디를 구입하기도 전에 회사에 사표부터 냈다.
장장 10년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진행할수록 ‘실록 위주’ 두드러져
퇴사 뒤 시디를 구해 공부하는 한편 조선사에 대한 느낌을 얻기 위해 궁궐이나 왕릉을 자주 찾곤 했다. 전체 스무 권으로 구상하고 작업을 이어가던 중에 100여 쪽의 초고를 만들어 을지로에 가서 다섯 부를 인쇄했다. 마음에 둔 다섯 군데의 출판사를 찾아갈 요량이었다. 마침 근처에서 지금은 작고한 서울신문의 백무현 화백을 만났는데 소개할 출판사가 있다며 거기부터 가자고 했다. 그렇게 찾아간 곳이 ‘휴머니스트’였고 결과적으로 남은 네 부는 쓸모가 없어졌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은 휴머니스트에서 2003년 1권을 출간하는 것으로 시작해 일 년에 두 권씩 꼬박꼬박 이어 내면서 장장 10년이 지난 2013년에 완간되었다.
앞에서 밝혔듯이 ‘정치사를 위주로 한다’ ‘실록 위주로 최근 연구 성과를 차용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해석에 개입한다’ ‘성인 독자들을 주된 대상으로 삼되 어린이가 보아도 무방하게 그린다’ 세 가지를 원칙으로 삼았다. 4권 즈음에 이르러선 실록을 위주로 한다는 원칙이 더욱 강해졌다. 공부하면 할수록 참으로 선조들의 위대한 유산이란 생각에 ‘조선왕조실록’을 제대로 소개해야겠다는 사명감이 생겼달까. 글이 너무 많다는 출판사 측의 우려도 종종 접했지만 필요하면 상소문을 그대로 옮기는 등 당시의 정황과 흐름을 바로 전하는 길이란 생각에서 고집을 밀고나갔다. 10권 즈음부터 독자들이 붙기 시작한다는 느낌이 들더니 완간되고 나서는 말 그대로 폭발적 반응이었다. 10년이 넘는 그간의 고생이 한꺼번에 보상받는 기분이었고 참으로 감사한 일이었다. 전문학자의 논문이었다면 화제가 됐을 법한 인물이나 사건 묘사와 해석이 제법 있을 텐데 그렇게 다루어지지 못했다는 점이 다소 아쉽지만, 욕심임을 안다.
완간된 지도 어느덧 10여 년이 지났다. 지금 같았으면 엄두가 나지 않았을 법한데 무모한 결정으로 이 작업을 해낸 젊은 날의 내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만화가
그리고 다음 책들
35년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이 망하는 날까지를 다루었다. 7권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조선이 망한 날로부터 해방되는 날까지의 35년 시간을 5년 단위로 끊어 구성했다. 독립운동사나 혹은 특정한 사건 위주로 다룬 책은 많지만 의외로 일제강점사를 다룬 통사는 흔치 않다. 이책은 총독부에 의한 일제통치사, 이에 대한 저항의 독립운동사, 그리고 일제에 부역한 친일파들의 행태를 모두 취급한다. 등장인물과 사건이 많으면 접근이 어려워지게 마련인데 그걸 감수하더라도 되도록 많은 독립운동가와 친일파를 정면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생각에 그렇게 했다. 그 때문에 만화이지만 작정하고 공부하듯이 보아야 할 책이다. 전 7권.
비아북(2018~2020)
친일파 열전
‘35년’ 출간 이후 친일파들만 따로 모아서 엮어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처음엔 ‘35년’ 중에 소개된 친일파들의 이야기만 따로 편집해 내놓을 생각이었는데 이해를 돕기 위해 앞부분에 친일의 역사를 새로 구성해 넣었고, 이어 시대별 친일파들을 소개하는 한편 부록으로 그들의 약력을 실었다. 친일파들에 대한 소개는 ‘친일인명사전’을 기본 텍스트로 했다.
비아북(2021)
박시백의 고려사
정사(正史)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를 기반으로 그렸고 역시나 고려 정치사다. 모두 5권으로 구성됐는데 ‘조선왕조실록’을 20권으로 그린 것과 비교해 너무 소략하다는 질책을 받곤 한다. ‘조선왕조실록’처럼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기록이 충분하지 않은 때문이기도 하고 고려 전기의 기록이 빈약해서 그에 맞추어 후기 시대를 구성한 때문이기도 하다(고려 후기는 기록이 제법 풍성하다!). 마지막 5권은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권과 시대가 거의 겹치는데 보다 고려 중심의 시각에서 다룬 점에서 차이가 있다. 전 5권.
휴머니스트(2022~2024)
사노라면: 그 시절, IMF의 추억
이 책은 한겨레에 연재했던 ‘박시백의 그림세상’을 모아 엮은 것이다. ‘박시백의 그림세상’을 모아 엮은 책으론 ‘박시백의 그림세상-우리시대의 자화상’(해오름, 2002)이 먼저다. 사실상 내 이름으로 나온 첫 책이기도 한데 지금은 절판 상태다. 연재했던 시기가 속칭 아이엠에프(IMF) 시대라 불리던 때로 나라와 국민 대부분이 어려움에 빠졌던 시절이다. 부제를 ‘IMF의 추억’이라 붙인 데엔 나름의 이유가 있다. 현대사에서 그때만큼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감정을 이입하여 내 일처럼 아파한 적이 있었을까. 우리의 시선이 위로만 향하지 않고 주변과 아래를 향했던, 그래서 한편으론 아름다운 시절이기도 했다는 점에서 선택한 이름이다. 정치적 사건들을 다루기보다는 IMF를 이겨낸 사람들의 이야기를 주로 담아냈다.
휴머니스트(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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