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시시즘 사회는 개인을 고독으로 몰아넣는다 [책&생각]
신자유주의와 나르시시즘 연결 해석
“주체는 자아이상 향해 투쟁하지만
남는 것은 고독 속에 버려진 개인”
나르시시즘의 고통
우리는 왜 경쟁적인 사회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가
이졸데 카림 지음, 신동화 옮김 l 민음사 l 1만8000원
이졸데 카림(65)은 ‘나와 타자들’이라는 저서로 국내에 이름을 알린 오스트리아의 여성 철학자다. 철학 저술과 언론 활동을 병행하는 카림은 오스트리아의 극우화에 맞서 정치적 저항운동을 벌이는 실천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나르시시즘의 고통’(2022)은 우리 시대의 현실을 분석하는 카림의 철학적 사유가 번득이는 저작이다. 이 책에서 카림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가 개인의 나르시시즘적 욕망을 통해 작동함을 밝혀 보인다.
이 책은 16세기 프랑스 정치철학자 에티엔 드 라 보에시의 ‘자발적 예속에 관한 논설’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떻게 민중은 폭군의 압제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가? 라 보에시는 민중이 압제를 받아들이는 이유를 ‘기만과 유혹’, ‘습관과 교육’ 따위에서 찾았다. 하지만 이런 설명은 폭군이 사라져도 ‘자발적 복종’은 남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자발적 복종은 ‘외적 관계’가 아니라 ‘내적 관계’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 관계를 밝힌 사람이 17세기 네덜란드 철학자 스피노자다. 스피노자는 ‘신학정치 논고’에서 “마치 자신의 구원을 위한 것인 양 사람들은 자신의 예속을 위해 투쟁한다”고 썼다. 복종함으로써 구원받는다고 여길 때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복종을 받아들인다. 가장 전형적인 경우가 신에 대한 복종이다. 이 신의 이미지가 군주에게 투사될 때 현실의 자발적 복종이 나타난다. 그러니까 자발적 복종의 중심에는 신적인 권위에 대한 개인의 내적 관계가 있다.
20세기 프랑스 철학자 알튀세르는 이 내적 관계를 ‘호명’(이름 부름)이라는 말로 설명했다. 신과 같은 권위적 존재, 곧 군주‧국가‧아버지가 이름을 부른다. 이때 권위적 존재는 대문자 주체가 되고, 부름을 받은 자는 그 대주체의 부름에 응답함으로써, 다시 말해 자발적으로 복종함으로써 작은 주체가 된다. 알튀세르는 이 자발적 복종을 받아들이는 이데올로기의 공식을 이렇게 제시했다. “이데올로기란 개인이 자신의 현실적 실존 조건과 맺는 상상적 관계를 표현한다.” 여기서 ‘현실적 실존 조건’이란 그 자신을 둘러싼 사회적 관계를 말한다. 우리의 존재가 사회적 관계의 톱니바퀴와 같다고 해보자. 톱니바퀴에 지나지 않는 삶을 견디게 해주는 것이 바로 ‘상상적 관계’다. 상상적 관계 안에서 우리는 자신을 톱니바퀴가 아니라 주체로 여기며, 세계를 ‘내가 중심에 있는 나의 세계’로 여긴다. 상상적 관계 안에서 내가 주체가 되고 세계가 나의 세계가 됨으로써 나는 자발적으로 그 세계의 부름에 응한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지배적인 상상적 관계는 무엇인가? 이 책이 그 물음의 답으로 제시하는 것이 ‘나르시시즘’이다. 여기서 카림은 프로이트의 나르시시즘 개념을 뜯어본다. 프로이트는 나르시시즘을 두 단계로 나누었다. 첫 번째가 유아기의 나르시시즘이다. 이 유아기 나르시시즘은 엄마와 일체를 이루던 시기의 완전한 충족감, 내부와 외부가 따로 없는 상태의 전능감이다. 그러나 아기는 머잖아 이 낙원에서 추방당할 수밖에 없다. 쾌락원칙만 알던 아이에게 외부 세계의 가혹한 현실원칙이 밀어닥친다. 아이는 황량한 현실 세계에 버려진다. 그러나 그런 뒤에도 유아기의 전능감과 충족감은 영혼에 흔적을 남긴다.
여기서 두 번째 나르시시즘이 나온다. 현실의 가혹함에 시달리는 주체는 무의식에 남아 있는 그 원초적 충만 상태를 동경한다. 동경은 최초의 나르시시즘을 되찾도록 우리를 몰아댄다. 이때 우리 안에서 생겨나는 것이 ‘자아이상’이다. 자아가 어떤 대상에 완전성과 충만성을 투사해 이상으로 삼은 것이 자아이상이다. 자아이상은 부모일 수도 있고 부모를 대신하는 사회적 권위일 수도 있다. 원초적 나르시시즘을 회복하려는 주체는 자아이상을 향해 투쟁한다. 이것이 이차적 나르시시즘의 운동이다. 나르시시즘적 이상은 자아에게 “너는 너의 이상이 되어라”라고 명령한다. 자아는 이상의 부름에 자발적으로 복종한다. 이것이 우리 시대의 보편적 상황이다. 자아이상은 프로이트가 말하는 ‘초자아’를 닮았다. 그러나 초자아가 무언가를 금지하는 명령이라면, 자아이상은 무언가를 하도록 고무하는 명령이다. 초자아의 명령을 받들지 못하면 ‘양심의 가책’이 따라오지만, 자아이상의 명령을 실행하는 데 실패하면 열등감과 모욕감이 번진다.
이 대목에서 카림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질서를 이야기한다. 신자유주의 질서가 과거의 자본주의 질서와 극명하게 다른 점은 모든 것을 경제 논리로 환원한다는 데 있다. 신자유주의에선 인간마저 ‘인적 자본’이 된다. 그리하여 주체는 자신을 자본으로 삼아 자신을 경영하는 ‘자기 자신의 기업가’가 되도록 독려받는다. 이 신자유주의 체제에 순응하는 주체가 바로 나르시시즘적 주체다. 신자유주의는 모든 것을 경쟁으로 바꾸어놓고 주체들에게 각자의 독특한 개성을 극한으로 발휘해 그 경쟁에서 최고가 되라고 요구한다. 개성의 극한적 발휘야말로 자아이상을 실현하는 길이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개인들의 자아이상을 연료로 삼아 작동한다. 나르시시즘적 주체는 이 자아이상에 자발적으로 복종해 이 이상을 향해 쉼 없이 나아간다. 나르시시즘은 고통이 된다.
분석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나르시시즘 사회는 주체들이 각자 개별적 자아이상을 추구하는 사회다. 그 자아이상은 주체 자신 말고 다른 어디에도 준거가 없는 자기준거적 이상이다. 나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은 나 자신이다. 이런 사태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가 ‘젠더 정체성의 자기 결정’이다. 내가 어떤 성적 정체성을 지녔는지 사회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정한다. 사회는 여기에 동의하는 데 머물러야 한다. 성적 정체성을 표시하는 기호가 LGBTQIA+로 끝없이 늘어나는 것이 이 사태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정체성의 이런 자기결정은 지배적 사회를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적 사회를 더 급진화하는 것이라고 카림은 말한다. 신자유주의 개성화 요구를 급진적으로 충족시키는 행위라는 얘기다.
정체성의 자기 결정의 최종 국면은 ‘나는 나다’라는 동어반복의 일반화다. 이런 국면에 이르면 진정한 교류도 진정한 사회도 존재할 수 없게 된다. 그 결과는 “깊디깊은 내적 고독 속에 버려진” 개인이다. 고독화는 나르시시즘 사회의 불가피한 흐름이다. 이 책은 이 재앙 같은 미래를 그려 보임으로써 나르시시즘 사회를 넘어설 길을 찾으라고 촉구하고 있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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