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쓰는 일’ 천대받던 실험들, 과학 발전 이끌다 [책&생각]

최재봉 기자 2024. 6. 14.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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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아닌 몸 쓰는 일이라 천대받던 실험
가설 검증하고 새로운 발견 내놓으며 과학발전 추동
지체, 후퇴 뚫고 앞으로 나아간 ‘아름다운’ 실험들
‘루이 파스퇴르’(1885), 알베르트 에델펠트, 캔버스에 유채. 오르세 미술관 소장. 소소의책 제공

아름다운 실험
세상을 증명하는 실험과학의 역사
필립 볼 지음, 고은주 옮김 l 소소의책 l 3만8000원

과학은 실험을 통해 반증될 수 있는 가설로 이루어져 있다고 칼 포퍼는 주장했다. 실험은 무지를 일깨우고 오해를 바로잡으며 새로운 발견을 이끈다. 그런 점에서 “과학의 중심에는 실험이 있다.” 영국의 과학 저술가 필립 볼의 책 ‘아름다운 실험’은 바로 이 문장으로 시작한다.

‘아름다운 실험’은 과학사에 큰 획을 그은 주요한 실험들에 초점을 맞춘 과학 교양서다. 천체물리학, 고전 물리학, 화학, 고전 광학과 양자론, 생명체, 동물 등 여섯 분야로 나누어 모두 60개의 실험을 시간 순서대로 추렸다. 그림과 사진 등 풍부한 도판을 배치하고, 주요 인물들의 생애와 업적을 작은 상자에 담아 소개했으며, 실험에 얽힌 일화들과 논점을 따로 정리한 ‘쉬어가는 페이지’를 두어 가독성을 높였다.

옥스퍼드 대학교 머튼 칼리지의 천문대에 있는 로저 베이컨. 어니스트 보드, 캔버스에 유채. 웰컴 컬렉션 소장. 소소의책 제공

과학에서 실험은 사실 오랫동안 수준 낮은 활동으로 여겨졌다. 머리를 쓰는 작업이 아니라 몸으로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소수의 선각자들은 과학 발달에서 실험의 중요성을 깨닫고 그에 기꺼이 몸을 던졌다. 기원전 3세기에 활동한 그리스 수학자 에라토스테네스는 지구의 크기를 최초로 추정해 기록으로 남겼다. 지구의 크기를 직접 측량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는 하짓날 이집트 도시 시에네(지금의 아스완)와 그곳에서 정북향에 있는 알렉산드리아에 드리운 해그림자의 길이 및 두 위치 간 거리의 비율을 계산해 지구의 둘레를 추정했다. 그가 계산한 지구 둘레 4만8천킬로미터는 오늘날 적도 둘레로 알려진 4만72킬로미터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이탈리아 피사 출신인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피사의 사탑에서 중력에 의한 물체의 자유 낙하 실험을 했다는 속설은 와전된 것이다. 갈릴레이가 이에 관해 글을 쓴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로 실험을 한 사람은 네덜란드의 기술자 시몬 스테빈이었고 그가 실험을 한 장소는 피사의 사탑이 아니라 네덜란드 델프트의 신교회 탑이었다. 무거운 물체가 가벼운 물체에 비해 빨리 떨어지는 까닭이 공기 저항 때문이라고 처음 언급한 것이 갈릴레이였다. 1971년 아폴로 15호의 선장은 진공 상태인 달 표면에서 망치와 깃털이 같은 속도로 떨어지는 모습을 시연했다.

‘공기펌프 속 새에 관한 실험’(로버트 보일의 실험을 재현한 작품, 1768), 더비의 조지프 라이트, 캔버스에 유채. 내셔널 갤러리 소장. 소소의책 제공

갈릴레이는 가속도 법칙을 추론하고자 공이 굴러 내려갈 수 있는 경사면을 지닌 장치를 만들었다. 갈릴레이의 경사면은 “양적 실험 연구만을 위해 설계한 최초의 장치”였다. 초기의 과학자들은 실험에 필요한 장비를 따로 구하기 어려워 제 손으로 직접 만드는 일도 많았다. 1670년대에 네덜란드의 포목상 안톤 판 레이우엔훅은 자기 손으로 만든 단일렌즈 현미경으로 빗물 한 방울에서 매우 작은 생물체인 ‘극미동물’을 발견했다고 런던 왕립학회에 보고했다. 그는 거의 모든 것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았고, 그중에는 부부의 침대에서 나온 자신의 정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뱀처럼 구불구불 앞으로 나아가며” 긴 꼬리가 있는 ‘극미동물’이라는 그의 묘사는 정자에 관한 최초의 관찰 보고로 꼽힌다.

11세기 초에 활동한 이슬람 학자 아부 알리 알하산 이븐 알하이삼은 고대 시대부터 알려진 카메라 오브스쿠라라는 광학 장치를 직접 만들어 빛의 원리를 관찰했다. 그가 쓴 ‘광학의 책’에는 실험 과정이 매우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실험자는 50센티미터 정도의 넓은 구멍이 있는 방을 이용하고 그 구멍을 통해 들어온 햇빛이 방의 바닥에 닿게 한다.” 스코틀랜드 출신인 찰스 톰슨 리스 윌슨은 1911년에 유리를 직접 불어 만든 플라스크 등으로 인공 구름을 만드는 기기 ‘안개상자’를 직접 만들었다. 이 기기는 그의 관심 분야였던 대기과학에 머무르지 않고 방사성 원소에서 방출되는 알파 입자, 베타 입자 등의 이온화 방사선을 검출하는 데 쓰였고, 그 공로로 그는 1927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지하 연구실에 있는 마이클 패러데이’(1852), 해리엇 제인 무어, 수채화, 영국 왕립연구소 소장. 소소의책 제공

폴란드 출신 과학자 마리 퀴리는 1898년 새로 발견한 방사성 원소를 자신의 조국 이름을 따서 ‘폴로늄’이라 명명했다. 그는 폴로늄과 라듐을 발견한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1903)과 노벨 화학상(1911)을 연거푸 받음으로써 노벨상을 두 번 수상한 처음이자 유일한 여성이 되었다. 그러나 마리와 그의 남편 피에르는 연구 과정에서 방사능에 중독되는 바람에 두고두고 고통을 겪어야 했다. 앙투안 라부아지에는 호흡의 화학적 과정을 연구함으로써 대사생화학의 기초를 마련했는데, 그의 아내 마리안은 화학을 독학해서 남편의 연구 결과를 기록하고 삽화를 그리는가 하면 영어 논문을 번역해 남편에게 읽히는 등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공저자로 등재할 만한 활약을 펼쳤다.

19세기 영국의 물리학자 제임스 줄은 열과 기계적 힘이 서로 변환될 수 있다는 사실을 실험을 통해 입증하고 논문으로 발표했지만, 기존 학계의 몰이해와 냉대에 시달려야 했다. 줄과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마이클 패러데이는 오늘날 전기공학에서 널리 사용되는 변환기의 주요 부품인 유도 고리를 처음으로 실연한 결과를 담은 논문을 왕립학회에 제출했는데, 이 논문은 출간되기까지 몇 달이 걸려 그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프랑스 과학자들이 자신의 연구 결과를 전해 듣고 그대로 실험하여 먼저 논문을 출간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던 것이다. 오늘날과 크게 다르지 않은 학계의 풍토 및 학자들의 인간적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일화들이다.

콜레주드프랑스에 있는 파스퇴르의 연구실에서 결정학에 관한 파스퇴르의 연구를 현미경으로 관찰하고 있는 장바티스트 비오. 헤르만 포겔의 삽화(1848), 파스퇴르 연구소 소장. 소소의책 제공

그런데 책의 제목으로 쓰인 ‘아름다운 실험’이란 무엇일까. 지은이는 이렇게 쓴다. “아름다운 실험은 쓸 수 있는 자원을 모두 통제해서 일반적인 관찰로는 알아낼 수 없는 것을 밝혀낸다.” 물론 모든 실험이 아름다운 결말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실패한 실험 역시 나름대로 과학 발전에 기여한다는 점에서는 아름다움의 신전에 안치될 자격이 충분하다 하겠다. 과학적 이해의 발전 과정을 서술한 본문 한 대목에 오래 눈이 머무는 것이 그 때문이다. “아주 조금씩 나아가며, 매우 조심스럽게 약간 후퇴도 하면서, 실험을 통해 믿을 수 없어 보이는 오래된 아이디어의 잔재를 남겨둔 채로 나아간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아름다운 실험’의 지은이 필립 볼은 옥스퍼드 대학과 브리스틀 대학에서 각각 화학과 물리학을 전공했으며, 20여년 간 ‘네이처’에서 편집자로 일했다. 지은 책으로 ‘가지’ ‘자연의 패턴’ ‘원소’ 등이 있다.

필립 볼. 시카고대학 출판부 누리집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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