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많이 알아갈수록 모르는 것 투성이라는 진리 [책&생각]
과학, 역사, 두뇌와 마음 세 갈래
답하기 어려운 질문은 더욱 많아져
“무지를 인정해야 더 성장 가능”
지식의 최전선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 역사 그리고 마음에 대해
앤서니 그레일링 지음, 이송교 옮김 l 아이콤마 l 2만5000원
‘테스 형’이 말씀하셨다. “나는 오직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비슷한 말씀을 공자님도 하셨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그것이 아는 것이다”(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하지만 인간이 어디 그런 존재인가. 조금이라도 안다고 생각하면 풍선 부풀리듯 부풀리고, 아예 모르는 것도 아는 것처럼 유세하기 일쑤다. 뭔가 안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과장된 마음을 다잡아 줄 책이 있다. 영국 철학자 앤서니 그레일링의 ‘지식의 최전선’이다. 저자에 따르면, 인류는 19세기 이후로 지식 측면에서 “정말 엄청나고 흥미로우며 중요한 진보”를 이뤄내며 “19세기 사람들이 살던 세상과도 상당히 다른, 훨씬 풍부한 우주에 살고” 있다. 허나 우리는 “지식의 진보”가 시사하는 중요한 지점 하나를 늘 놓치고 산다. “한때 우리는 지식의 진보가 우리의 무지를 없애준다고 믿었다. 그러나 최근에 이뤄낸 이 거대한 진보는 우리가 얼마나 아는 게 없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지은이는 “우리의 지식이 늘어갈수록 우리의 무지도 늘어간다”는 역설을 인지하는 것에서 우리 지식 체계를 다시 세워갈 것을 권한다. 그는 지식의 최전선에 있는 과학, 역사, 두뇌와 마음의 발전상을 더듬으며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 나아가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진정한 앎에 대해 논한다.
과학은 “‘어떻게’에 관한 지식”에서 시작되었다. 생존을 위해 “도구를 만들고, 집을 짓고, 불을 피우고, 동굴 벽화를 그리고, 동식물을 길들이고…” 등등의 일을 통해 삶의 여건을 개선했다. 어떻게에 관한 지식이 생겨나고 이내 “‘무엇’에 관한 지식”도 등장했다. 무엇에 관한 지식은 “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설명하는 이론적 지식”으로, “기원전 6세기~기원전 5세기”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에서 비롯되었다. 그들은 “자연의 원리를 탐구하는 일을 신화와 미신으로부터 떼어내려는 첫 시도”를 했던 사람들이다. 그중 탈레스는 “현실의 본질과 근원에 관해서 질문하고, 미신에 의존하지 않고” 답을 찾는 일에 열중하며 ‘최초의 철학자’ 반열에 올랐다. 그럼에도 16~17세기 근대 과학의 발흥 이전까지, 과학과 기술은 “구분 없이 함께 추구되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은, 즉 “물질적 실재 속의 물리적 세계와 그 기반에 관한 지식 그리고 그 지식을 산출하는 탐구 방법”이라는 개념은 19세기 후반에야 정착되었다.
지은이는 “초인적 행위주체에 대한 믿음”인 종교에서 철학을 분리하고자 했던 고대 철학자들을 시작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와 우주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원리를 알고자 했던 역대 과학자들의 자취를 솜씨 좋게 요약한다. 지은이가 과학 영역에서 특히 심혈을 기울인 대목은 ‘우주에 관한 이해’라고 할 수 있다. 우주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인류의 오랜 관심사였지만, 20세기에 이르러서야 실체들이 하나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태양계가 속한 우리 은하(The Milky Way Galaxy)가 그 자체로 온전한 우주가 아닌 무수한 은하 가운데 하나라는 것도, 빅뱅이나 블랙홀도, 가설적 존재인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도 비교적 최근 일반화된 지식이다. 이 대목에서 저자는 다시 강조한다. “현재 과학이 도달한 가장 작은 규모와 가장 큰 규모에서 일어나는 자연 현상을 각각 관찰하려는 노력”은 다시 역설과 마주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우주에 대해 아는 건 ‘몇 퍼센트’로도 정의할 수 없이 미미하기 때문이다.
흔히 우리가 “역사에 관해 알고 있는 지식은 상당히 광범위”하다고 오해하곤 한다. 유물과 문학 등이 살아남아 “하나의 연속된 선으로 죽 이어져 왔기” 때문이다. 지은이에 따르면, “오래된 역사를 파헤치려는 체계적인 노력”은 18세기 후반, 주로 19세기부터 이뤄졌다. 나폴레옹은 1798년 이집트 침략 당시 “지형학, 식물학, 동물학, 광물학, 사회, 경제, 역사” 분야 학자 200명을 대동했다. 19세기 들어 “과거를 고고학적으로 파헤치려는” 학자적 관심 외에도 구약성경의 역사를 입증할 증거를 찾는, 골동품 수집이 주목적인 비전문가들까지 합세했다. 하지만 여전히 인류의 출현, 호모 사피엔스 등 역사의 실체에 접근했다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흥미롭게도 지은이는 ‘역사’라는 단어 자체에 대해 질문을 제기한다. 역사는 “과거 사건을 통해 탐구하는 활동일 수도 있고, 과거 사건과 상황 그 자체”를 뜻하기도 한다. 혹은 “수천 년 동안 일어난 모든 일을 포괄적으로 지칭”하기도 한다. 물론 두 가지 개념이 접목되어야만 실체적 역사에 접근할 수 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한편으론 역사 역시 “과학 기술뿐 아니라, 데이터를 수집하고 가설을 검증하는 과학적 방법론”의 활용이 늘어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역사를 연구함에 있어 “이미 마음속에 품은 결론에서 시작”할 것이 아니라 “충실하게 증거를 모으고, 꼼꼼하게 추론하고, 냉정하게 판단”하는 마음 자세이다.
지은이는 과학과 역사에 이어 “뇌과학과 심리학”에 접근한다. 뇌는 그 속을 들여다보기 시작한 것이 몇십 년도 안 되었다. 뇌가 작동하는 모습을 실시간 관찰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 실체를 완전히 판독한 것은 아니다. 마음은 문학과 예술이 증명하듯, 온갖 희로애락에 관한 탐구가 이어져 왔다. 하지만 “마음에 대한 핵심 질문은 아직도 대답하기 어려운 상태”로 남아 있다. 더더욱 마음과 뇌의 관계를 파악하는 일은 걸음마 수준 정도다. 저자는 “우리가 뇌에 관해 더 많이 이해할수록, 마음에 관해 우리가 가지는 생각의 복잡성과 한계는 더욱 명확해지고 있다”고 강조한다. 인류와 그에 관한 지식은 날로 증가할 것이다. 잊지 말아야 할 일은 “무언가를 아는 것”도 중요한 만큼 “어떻게 알았는지” 이해해야 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더더욱, 더 많이 알아가는 것만큼 우리는 여전히 더 많은, 아니 모르는 것투성이라는 진리를 인정하는 일이다. 인류가 켜켜이 쌓아올린 방대한 지식을 명쾌하게 정리한 ‘지식의 최전선’은 결국, 우리의 무지를 인정해야만 더 성장할 수 있다는 자명한 사실을 잘 보여준다.
장동석 출판도시문화재단 사무처장, 출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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