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민경배 (10) TEF 장학금 받고 다시 영국 유학길 올라

손동준 2024. 6. 14. 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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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교회협의회(WCC) 신학교육기금(TEF)의 도움을 받아 지은 연합신학대학원 건물은 역사적 기념물이다.

그런데 새롭게 건물을 크게 짓는다고 해서 허물어 버리고 오늘의 새 건물로 바뀐 것은 아쉽고 섭섭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옆의 문과대학에서 그들 건물 앞에 새 연신원 건물을 짓는다고 해서 반대하며 몇 주일 농성하며 그 건물 허는 것을 반대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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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런던대학교 뉴 칼리지서 공부
그곳 교수인 나탈 박사와 대화하던 중
선교사 ‘로버트 토머스’ 출신학교 규명
1960년 2월 애버딘대학교 동료들과 민경배(가운데) 박사. 민경배 박사 제공

세계교회협의회(WCC) 신학교육기금(TEF)의 도움을 받아 지은 연합신학대학원 건물은 역사적 기념물이다. 그런데 새롭게 건물을 크게 짓는다고 해서 허물어 버리고 오늘의 새 건물로 바뀐 것은 아쉽고 섭섭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국교회 연합 사역의 상징으로 길이 보존 확보 기념했어야 할 것 아닌가! 기념물로라도 남아 있어야 했던 것이 아닌가. 그 옆의 문과대학에서 그들 건물 앞에 새 연신원 건물을 짓는다고 해서 반대하며 몇 주일 농성하며 그 건물 허는 것을 반대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는 한 시대의 중요한 상징을 잃어버린 것과 같다.

나는 연합신학대학원에서 1965년 3월부터 1969년 3월까지 교학 주임을 맡아 지냈고 88년 8월부터 92년 8월, 그리고 94년 8월부터 96년 2월까지 대학원장을 맡고 있었다. 그리고 89년에는 ‘연합신학대학원 25년사’를 집필·간행했다.

나는 1969년 봄 다시 영국 유학길에 올랐다. WCC의 TEF의 장학금을 받았기 때문이다. 런던대학교의 뉴 칼리지였다. 그런데 거기 간 것이 참으로 하나님의 섭리였다.

유학생으로 지내면서 얼마 안 되어 그곳 교회사 교수인 세계적 석학 나탈 박사와 단둘이 이야기하는 도중 우리나라에 와서 1886년 9월 대동강에서 처음으로 순교한 영국 선교사 로버트 토마스에 관한 이야기로 열중했을 때였다. 과거 백낙준 박사가 1926년 미국 예일대에서 ‘미국의 한국 선교 역사’에 대한 박사 논문을 쓸 때 로버트 토마스가 다닌 영국의 뉴 칼리지가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대학교의 뉴 칼리지라고 쓰고 있었다.

그런데 그 말을 하는 도중 나탈 박사가 갑자기 내 말을 끊었다. 그의 출신 대학교는 에든버러대학교가 아니라 런던대학교의 뉴 칼리지일 것이라는 것이다. 영국에 뉴 칼리지는 세 개가 있었다. 에든버러, 옥스퍼드, 그리고 런던대학교다. 그런데 그의 말은 로버트 토마스가 웨일스 사람일 것이고 웨일스 사람이 가까운 런던대를 두고 멀리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까지 갔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가 웨일스 사람이라고 추측한 것은 이름이 성씨가 된 사람은 모두 웨일스 사람이기 때문이다. ‘로버트 J 토마스’에서 토마스는 영어에서는 대개 이름이다. 토마스 브라운이니 토마스 제퍼슨이니 하는 식으로 주로 이름으로 쓰인다. 그런데 그것이 성씨로 ‘로버트 토마스’로 쓰인 것을 보니 확실히 웨일스 사람이라는 것이다. 웨일스 사람은 흔히 우리가 쓰는 이름을 성씨로 쓴다. 가령 미스터 조지(Mr. George), 미스터 존(Mr. John) 미스터 데이비드(Mr. David) 같은 것들이다. 그렇다면 웨일스 사람이 가까운 런던대학교를 두고 멀리 스코틀랜드까지 갔을 리가 만무하다는 것이다.

나탈 교수는 흥분했다. 우리 둘은 곧 뛰어가서 옛 교무일지와 당시 문서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1850~1860년대 교무일지에서 학생 로버트 토마스의 기록들을 수없이 찾을 수 있었다. 그곳 옛 교무회의 회의록에 그의 이름이 여러 번 등장하고 있었다. 그 발견은 우리에게 큰 감동을 줬고 이후 그의 이야기를 더 깊이 연구하게 됐다.

정리=손동준 기자 sdj@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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