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시각] “배우자가 받으면 되나요?”
“나도 ‘배우자’더러 받으라고 해야겠네.”
국민권익위원회가 김건희 여사의 이른바 ‘명품 백 수수 사건’에 대해 “법 위반 사항이 없다”는 결론을 내린 다음 날인 지난 11일 점심 시간, 세종시의 한 중앙 부처 구내식당에서 줄을 서 있던 중년 남성 공무원이 말했다. 옆에 세워진 TV에서 “대통령의 ‘배우자’라 제재 규정이 없다”는 해설이 흘러나오자 던진 말이다. 옆에 서있던 다른 공무원들이 “흐흐” 하고 웃었다. 하루에도 수많은 민관 관계자들이 공무로 찾는 세종 청사의 일상에서 목격된 대화다.
서울 여의도동과 서초동에선 이 사건을 법률적인 문제로 본다. 그래서 특검 도입과 뇌물죄 성립 여부를 두고 치열하게 다툰다. 그런데 관가가 있는 세종시에서 이것은 하나의 정신적 문제다. 관료(官僚)가 관(官)의 정신을 의심하기 시작한 것이다.
공무원들은 이 사건을 바라보며 관의 청렴함에 대한 근본적인 개념이 흔들린다고 한다. 개념이 흔들리면 의문과 의심이 싹튼다. 어떤 행동이 바로 뒤따르진 않지만, 관료로서 가지는 ‘프라이드(자부심)’에 상처가 난다. 그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무력감이 저런 반어적인 농담을 낳고 있는 것이다. “나도 지키는 걸, 왜 꼭대기에서 안 지키냐”는 질문이 적절한 답변을 찾지 못한 채 관가의 공기 속을 떠돌고 있다.
관의 권위가 예전만 못하다고들 한다. 30~40년 전만 하더라도 관료가 여러 국가 정책을 주도해 나갔는데, 지금은 정치 권력과 민간 산업 권력이 관을 흔든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국가 주도 개발을 했던 20세기 중·후반과, 민간이 글로벌한 경쟁력을 갖는 지금을 동일 선상에 놓을 순 없다.
보상의 격차도 확연하다. 많은 고위 공무원들이 현 월급의 몇 곱절 이상을 주는 사기업으로의 이직을 고민한다. 사무관들은 ‘평생 전문직’인 변호사나 의사가 되기 위해 관문을 떠난다.
그럼에도 관료의 길을 묵묵히 걷는 이가 적지 않다. 매일 밤 세종 청사의 불을 밝히는 사람들이다. 속 얘길 들으면 관의 정신이 느껴진다. “어디 갈 능력이 없어서…”란 겸양을 한 꺼풀 벗기면, “소관 업무에선 내가 곧 대한민국”이라는 프라이드가 나온다. 어떤 정책에 대해 이들이 모르면 사실상 아무도 모르는 것이고, 이들이 검토하면 곧 정부가 검토하는 게 되는 차원이다. 국가는 사심(私心)이 없으므로 당연히 청렴하다. 남에게 세우는 권위는 그 전보다 줄었어도, 스스로 지탱하는 정신은 이처럼 살아있는 것이다.
권익위의 이번 결정은 이렇게 남아있는 관의 정신, 청렴에 모욕을 줬다. 법률 논쟁은 차치하고, 공직자의 배우자가 그런 선물을 받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최소한의 고민과 판단이 들어있지 않아서다. 한 중앙부처 공무원은 “권익위의 결론 자체가 문제라기보단, 실질적 고민이 생략된 채 결론밖에 없는 것이 문제”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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