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택의 그림 에세이 붓으로 그리는 이상향] 73. 춘천예술촌을 떠나며

이광택 2024. 6. 14.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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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0일, 123번의 잉태…소양강 물처럼 삶은 이어진다
강아지 뛰노는 일상적 삶의 정경
뭔가 그려내려고 애 쓰는 작업실
깎고 덜어내니 비로소 화면에 생채
창작으로 이어간 치열한 시간들
한결같은 소양로 번개시장 골목
소리 소문 없이 찾아올 춘천의 7월

신경안정제같은 따뜻한 느낌의 달과 별이 팝콘 터지듯이 총총히 뜨기 시작하는 밤이다. 예술촌의 시설을 보수하고 정원을 관리하느라 온종일 땀을 흘리신 그림 속 손(선홍) 감독께서도 일과를 마감하는 의미로 멋진 자세와 함께 아주 맛나게 담배를 피워물었는데, 양껏 뿜은 담배 연기의 푸짐함에서 하루의 보람을 엿볼 수 있다. 강아지들도 신이 났다. 작은 덩치와 짧은 다리를 가진 눈높이로는 잔디밭 넓이가 아마 태평양보다 몇 곱절은 드넓게 보일 것이다. 담배 연기의 궤적에서 알 수 있듯 바람은 2분 쉼표로 느릿느릿 푸근하게 불고, 마치 정물화를 보는 듯 한적하고 고요한, 일상적인 삶의 정경이다.

▲ 춘천예술촌 야경도, 이광택 작

하지만 창작 6동 1호실은 분위기가 영 딴판이다. ‘소금을 뿌린 듯’ 머리카락이 하얀 등장인물을 보자니 단박에 알 수 있다. 바로 나다. 풀리지 않는 작업 탓에 잔뜩 골이 난 나머지 고만 넋이 물구나무를 섰나 보다. 조금 있으면 괜히 애꿎은 머리털만 쥐어뜯을 것 같다.

‘재주가 메주’인 주제도 모르면서 애면글면 발싸심한들 돌머리가 어디 가겠는가. 아무리 쥐어짜 봐야 물똥 밖에 나올 게 없을 상상력을 가진 위인은 시간만 낭비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뭔가 그려내려고 애를 박박 쓰는 모습에서 한편 연민의 정까지 들게 한다.

시선의 집중을 위해 예술촌 사무동과 나의 스튜디오만 채색을 하였다. 그리고 사무동만 빼고는 나머지 작업실들은 건물을 다 그리지 않고 반만 넣었다. 그게 ‘신의 한 수(?)’였다. 사실 이렇게나마 그리기 전 얼마나 많은 구상을 했으며 고민이 많았던가. 내게는 2년 동안의 예술촌 생활이 특별한 추억거리요. 레지던시 과정 자체가 춘천 미술의 역사 차원에서도 한 페이지를 장식할 것이 분명해서 반드시 기록 차원으로라도 그리고 싶었다. 그런데 그려지는 스케치들이 영 신통치 않았다. 조약돌을 넣어 끓인 국물맛처럼 싱겁고 밋밋하다고나 할까. 이유는 예술촌 내 모든 건물을 사실적으로 우겨넣듯 표현하려는 시도에 있었다. 깎고 덜어내니 그때에서야 비로소 화면이 생채를 띠는 것이었는데, 그러한 우여곡절이 있어서일까? 이 드로잉이 퍽 마음에 든다.

괄호 안의 이름들은 입주 때는 함께 했으나 지금은 부재하는 이들이다. 지난 3월 제2기 춘천예술촌 결과보고전에 이 작품도 출품했다. 예술촌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린 작가가 나 이외엔 없어서였을까? 9명의 동료작가들은 물론 춘천문화재단 관계자 분들, 그리고 관객들의 반응이 좋았다.

어느새 2년. 기욤 아폴리네르의 ‘미라보 다리’ 시 구절(“가버린 시간도/사랑도/돌아오지 않고/미라보 다리 아래/세느강만 흐른다”)처럼 시간은 갔고 지나치는 소양 1교 아래로 소양강은 흐른다. 지나간 730일의 나날이 참 행복했다.

정말 예술의 이름으로 부끄럽지 않게, 삶의 이름으로 치열하게 보낸 시간이었다. 바위에 붙어사는 굴처럼 비좁은 집의 안방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넓고 쾌적한 작업실에서 창작을 이어갔으니 얼마나 큰 행운이었던가.

오죽했으면 입주 직후 쓴 글(‘춘천예술촌 가는 길’)에 ‘몸 속의 피가 새 것으로 교환되고 신선한 산소가 양껏 흡입된 기분’이라고 묘사해 놓았겠는가.

귀한 시민의 세금으로 개축되고 운영되는 예술촌이니만큼 엎드려 절은 드리지 못해도 간단하게나마 보고는 하는 게 예의이겠다. 입주한 2022년 6월 1일부터 7개월간 완성한 작품의 수는 45점이다. 2023년 한 해 동안에는 100호 이상 대작에 몰두(9점)하느라 38점, 그리고 올해 입주 기한이 완료된 5월 31일까지 5개월간 40점, 모두 합하면 123점이다.

2년이란 세월이 흘렀어도 소양로 번개시장 골목은 한결같아 기분이 좋다. 약발이 오르는 초하(初夏)의 더위는 여전하고, 장미, 제라늄, 수레국화, 낮달맞이, 꽃양귀비, 끈끈이대나물 꽃들도 해를 건너 여전히 피어 있다. 시장의 중간쯤 다정하게 머윗대의 껍질을 벗기는 상점의 노부부도 아직 건강하시고, 대문은 여전히 안으로 열리고 있다. (문이 바깥쪽으로 열리면 집안의 좋은 기운이 밖으로 나간다고 여기고 마당을 쓸 때도 흙을 집 밖으로 내버리지 않던 관습이 우리 민족의 전통 아니었던가!)

머지않아 건강한 수다와 참기름 같은 웃음이 홍수처럼 넘치는 시장 화단에 원추리, 페추니아, 참 골무, 백합, 메리골드, 그리고 어여쁜 보라색의 도라지 꽃이 필 것이다. 소리, 소문 없이 춘천의 칠월은 그렇게 찾아올 것이고 모든 이들의 삶도 소양강의 흐르는 물처럼 유장하게 이어질 것이다.

서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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