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석재의 돌발史전] 고종이 첫 커피 마니아? 그것조차 사실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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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아이스 아메리카노)’나 ‘얼죽아(얼어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줄임말이 있을 만큼 한국인의 커피 사랑은 유별난 데가 있습니다.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계란 노른자 넣어 주는 다방 커피를 즐기는 사람이 많았죠. 한국인은 언제부터 커피를 즐겨 마신 걸까요. 이 부분에 대해서도 최근 실증적인 연구가 있었습니다. 정리를 해 보면 한국 커피사(史)는 대체로 5단계의 중요한 역사적 변곡점을 지나 성장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①1861년: 커피가 처음으로 한반도에 들어오다
“내년에 조선으로 들어올 선교사 편에 이 물품들을 보내주십시오. 적포도주나 백포도주 50병들이 2상자, 코냑 4다스, 커피 40리브르, 흑설탕 100리브르.”
이것은 1860년(철종 11년) 3월 6일 조선 천주교회 교구장이던 프랑스인 시메옹-프랑수아 베르뇌(1814~1866) 주교가 홍콩에 있던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의 리부아 신부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입니다. 조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가 발굴한 이 편지를 분석한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가 ‘커피의 첫 한국 전래’라는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1784년(정조 8년) 이승훈이 중국에서 영세를 받고 조선으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전래된 천주교는 조선에서 불법 종교로 여겨져 탄압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1846년 조선인 김대건 신부가 처형당한 병오박해 이후 조선의 마지막 천주교 탄압 사건인 1866년 병인박해 때까지 20년 동안은 천주교 포교의 상대적 안정기였다고 해요.
19세기 초만 해도 조선에 와 있는 프랑스 신부들은 김치와 밥만으로 끼니를 해결할 정도로 열악한 상황이었지만, 철종(재위 1849~1863) 때는 조금 여유를 되찾아 서양식 식생활을 향유할 수 있었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이들은 “조선으로 커피를 보내달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이죠.
위 편지에서 ‘리브르(livre)’는 약 0.5㎏에 해당하는 단위입니다. 커피 원두(커피나무 열매의 씨앗을 말려 볶은 것) 20㎏을 요청한 것이죠. 이 편지를 계기로 파리외방전교회가 1861년(철종 12년) 홍콩에서 조선으로 보내준 커피가 지금까지 기록상 우리나라에 최초로 들어온 커피가 됩니다. 이후 1866년까지 조선으로 온 커피 원두는 프랑스 신부 1인당 약 4㎏이었는데, 혼자 소비하기엔 너무 많은 양이었습니다. 당연히 조선인 신자들과 나눠 마셨던 것이겠죠. 처음부터 그럴 목적으로 그만한 양을 주문했던 겁니다.
누군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났는데 그보다 5년 전인 1861년에는 커피 마실 여유가 있었다고?” 네, 그렇습니다. 철종 때 저렇게 상당한 분량의 물건을 선교사가 가지고 국경을 넘는데 해당 지방관이 몰랐다고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어쩌면 선교사가 어디에 있고 거기에 천주교인이 얼마나 된다는 것을 나라에서 다 인식하고 있었지만 묵인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병인박해는 그야말로 ‘갑자기’ 일어났습니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프랑스의 힘을 빌려 러시아를 견제하겠다’며 운현궁을 빈번하게 출입하던 천주교인들이, 나아가 새로 즉위한 임금의 생모이자 운현궁의 안주인인 부대부인 민씨조차 천주교인인 것을 알고 ‘이제 게임 끝났다’고 가슴을 쓸어내렸을 천주교인들이, ‘알고보니 왕의 아버지가 천주쟁이였다’는 정치적 공격을 받게 된 흥선대원군의 정책 변경에 의해 하루아침에 전격적으로 추포되는 정치적 격변이 발생했던 것이죠.
그런데 여기서 잠깐. 유럽에서도 커피가 평민에게까지 퍼져 누구나 마실 수 있게 된 것은 1860년대에 들어서라고 합니다. 그런데 1861년 조선의 일반 천주교인들이 커피를 마시는 상황이 전개됐다면, 세계 커피 문화에서 한국이 그다지 늦은 것은 아닌 셈이 됩니다.
②1884년: ‘식후 커피’, 조선의 최신 유행품 되다
“1884년 1월의 어느 추운 날, 조선 고관의 초청으로 한강변 별장에 유람을 가 꽁꽁 얼어붙은 겨울 한강의 정취를 즐기던 중 누대에 올라 당시 조선의 최신 유행품이던 ‘저녁 식사 후 커피(after-dinner coffee)’를 마셨다.” 이것은 1883년 조미수호통상사절단의 안내를 맡았던 미국인 천문학자 퍼시벌 로웰이 저서 ‘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 남긴 기록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저녁을 먹은 뒤 커피를 마시는 것이 1880년대 조선 양반들 사이에서 ‘최신 유행’이었다는 기록입니다. 당시 커피는 ‘가비(加非)’ 또는 ‘가배(口+加, 口+非)’로 불렸는데, 커피를 음차해 한자로 표기한 이름입니다.
이 ‘조선 고관’이란 ‘경기도 관찰사’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훗날 영의정과 내각총리대신을 지낸 온건 개화파 김홍집(1842~1896)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별장이란 지금의 마포구 마포동 벽산빌라 입구에 있던 담담정(淡淡亭)으로 보입니다.
1876년 개항 이후 서양 문물이 유입되면서 커피가 상당히 빠른 속도로 상류층의 기호식품으로 자리 잡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짚어봐야 할 중요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식후 커피 한 잔’이라고요? 원래 한국 사람들이 식후에 마시던 것은 숭늉 아니었던가요? 이 때문에, 커피를 마시는 풍습이 한국 내에서 빨리 생겨난 것에 대해선 ‘식후에 차나 숭늉을 마시던 한국인의 음료 문화가 자연스럽게 커피로 대체된 것’이란 분석도 있습니다. 무척 설득력이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비슷한 시기 의료 선교사이자 훗날 주조선 미국 공사가 되는 호러스 알렌은 “궁중에 드나들 때 홍차와 커피를 대접받았다”고 일기에 썼습니다. 그러니까 궁중과 상류층 사이에선 커피를 마시는 일이 일상화됐다고 할 수 있는데, 1890년대가 되면 커피 없이 못 사는 대표적 ‘커피덕후’가 한 명 출현하게 됩니다. 그는 바로….
조선 임금인 고종이었습니다.
③1896년: 조선 임금이 커피 애호가가 되다
1896년 고종은 일본의 압력을 피해 거처를 러시아 공사관으로 일시 옮겼던 ‘아관파천’ 때 커피를 본격적으로 즐겼고, 이후 커피 애호가가 됐다고 합니다. 지금까지는 ‘최초의 커피 애호가인 고종이 커피를 즐겨 마셨기 때문에 한국에 커피가 유행하게 됐다’는 것이 통설이었고, 심지어 배우 박휘순이 엄청나게 멋진 고종으로 등장하는 영화 ‘가비’(2012) 같은 창작물에선 고종이 마시는 커피가 마치 ‘근대화를 향한 의지’를 상징하는 것처럼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전에도 ‘식후마다’ 커피를 즐겨 마신 서울의 양반들이 존재했기 때문에 고종을 우리나라 최초의 커피 애호가로 볼 수는 없게 됐습니다. 그러나 임금이 커피를 즐겨 마신 것을 계기로 커피를 마시는 인구가 늘었을 가능성도 크기 때문에 한국 커피사에서 그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고종이 커피를 마신 장소로 잘 알려져 있는 곳이 덕수궁의 서양식 건물 정관헌입니다.
‘나라가 망해가는 상황에서 커피가 목에 넘어간단 말인가’라며 분노할 분도 있겠지만, 참 답답하고 한심한 얘기이긴 하지만, 그가 홍차나 숭늉을 마셨더라도 국운이 바뀌었을지는 의문입니다. 커피를 마시면서 인재 등용의 문제나마 조금 더 생각했더라도 대한제국기의 인사가 그토록 엉망이 되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도 듭니다. 그가 커피를 마시다가 변을 당한 일도 있습니다. 1898년 9월 12일, 러시아 통역관 출신의 김홍륙이 유배형을 받은 것에 앙심을 품고 고종을 독살하기 위해 커피에 아편을 탔던 것입니다. 고종은 곧바로 뱉어 무사했지만 같이 마셨던 황태자는 치아가 빠지고 혈변을 쏟았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훗날 순종 황제가 되는 황태자가 정신이 온전하지 않게 됐다는 얘기도 있습니다(정사에 나오지 않는 삼국지연의의 에피소드인, 조운이 어린 아들 유선을 구출해 오자 그를 받은 유비가 집어던진 이후 유선의 정신이 온전하지 못하게 됐다는 이야기와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아들이 망국의 군주가 된 것이 어떤 시점의 사고에 의한 것이었다고 나중에 합리화한 것이라는 의심이 든다는 것입니다). 다만 ‘당구 천재’로 불렸던 순종의 당구 실력이 줄어드는 일은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일을 겪고도 고종은 커피를 계속 즐겨 마셨다고 합니다.
④1902년: 서울 첫 커피숍에서 독일식 커피를 팔다
고종에게 커피를 권했던 사람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일했던(사실은 신분이 노출된 러시아 측 백색 스파이라고 보는 쪽이 더 맞겠지만) 독일 여성 마리 앙투아네트 손탁(1854~1922)으로 알려졌는데, 손탁은 대한제국 소유 서울 정동 건물의 위탁 경영을 맡아 서구식 호텔로 꾸며 1902년 ‘손탁호텔’의 문을 열었죠. 지금의 이화여고 백주년기념관 근처였는데, 이 호텔 1층에 들어선 레스토랑 겸 커피숍이 서울 최초의 커피숍이었다고 합니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 나오는 ‘글로리 호텔’은 손탁호텔을 모델로 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한국 최초’가 아니라 ‘서울 최초의 커피숍’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보다 먼저 인천 대불호텔에 커피숍이 있었다는 주장 때문입니다.
‘강철군화’ ‘야성의 부르짖음’을 쓴 미국 작가 잭 런던과 훗날 영국 총리가 되는 젊은 윈스턴 처칠은 모두 러일전쟁 당시 종군기자로 활동했는데, 이들이 이 호텔의 손님이었다고 합니다. ‘독일 여성이 운영하던 커피숍을 계기로 크림과 설탕을 타 마시는 독일식 커피가 한국에서 유행하게 됐을 것’이란 추측도 있습니다.
다만 손탁은 알퐁스 도데의 소설 ‘마지막 수업’으로 잘 알려진 알자스-로렌 출신인데, 이곳은 원래 프랑스였다가 독일 땅이 된 곳이라 프랑스 출신으로 봐야 할지 독일 출신으로 봐야 할지 좀 헷갈리기도 합니다. 알자스-로렌이 독일에 병합된 것은 1871년으로 손탁이 17세 때였지만 집안이 원래 독일계였다고 합니다(그런데 또 이름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 공주 출신으로 프랑스에 시집간 왕비 이름...). 예전 작가 유주현씨는 소설 ‘조선총독부’에서 자못 문학적인 어조로 “알자스-로렌 출신인 손탁이 아시아의 알자스-로렌이라 할 조선으로 온 것은 운명의 장난인가” 운운한 적도 있었습니다.
⑤1920년: 경성에 다방이 유행하다
한국의 커피는 1920~30년대 경성(서울)의 다방 문화를 중심으로 널리 퍼졌습니다. 숱한 다방 중 배우 복혜숙이 운영했던 인사동 입구의 ‘비너스’와 시인이자 소설가인 이상이 종로1가에 연 ‘제비’ 등이 유명했습니다. ‘제비’에는 화가 구본웅, 소설가 박태원 같은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는데, 경성의 다방은 때론 음악회나 미술 전시회가 열리고 최신 서구 예술에 대해 열띤 토론이 펼쳐지는 장소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보면 ‘다방 문화’는 꽤 생명력이 길었습니다. 지금도 전국 곳곳에 다방이 아주 없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커피를 들고 다니며 마시는 시대가 됐습니다. 다만 지금 유행하는 테이크아웃 커피잔을 길거리 아무 데나 버리고 가는 일부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한국 커피의 역사를 알고 커피를 소중하게 생각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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