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의 도시의 정원사] 땅이라는 캔버스… 정원은 언제 예술이 되는가
상징과 조형물은 정원을 근사한 갤러리로
우주 탄생 이론 형상화부터 희생자 추모까지
식물 자체의 美만으로 예술성 추구하기도
정원은 박물관이자 과학과 예술의 교실
도시가 안식처라면 이제 정원은 영혼이다
정원은 자연으로 빚어내는 예술 작품이다. 마치 화가가 그림을 그리듯 땅을 캔버스 삼아 식물이라는 특별한 재료와 가드닝이라는 기교로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원에서 크고 작은 나무는 점과 선을 이루는 프레임이 되고 다채로운 풀들은 계절에 따라 색감과 질감을 변화시키며 살아 움직인다. 정원은 시시각각 새로운 아름다움을 보여주므로 다른 작품들이 흉내내기 어려운 독특한 예술의 형태를 선보일 수도 있다.
여기에 어떤 상징물이나 조형물 같은 예술가의 작품이 함께한다면 정원은 근사한 야외 갤러리가 된다. 그래서 정원을 주 무대로 활동하며 특별한 영감으로 정원을 더 빛나게 하는 예술가들의 존재가 고맙고 소중하다. 미국의 자연 미술가 패트릭 도허티(Patrick Dougherty)는 나뭇가지를 엮어 만든 대형 설치미술 작품으로 세계 유명 정원에 순회 전시를 하며 자연의 순환과 환경의 중요성을 알렸는가 하면, 유리 공예가 데일 치훌리(Dale Chihuly)는 꽃의 아름다움을 유리 작품으로 승화시켜 정원 속에서 자연과 예술의 융합을 보여주었다.
현대 도시 정원은 과거의 권위적이고 보수적이며 관습적인 예술을 추구하기보다는 대중에게 자유롭게 열린 공공 예술의 개념으로 다양한 사회적·환경적 메시지를 전달한다. 우리나라 순천만 국가정원에서 선보인 호수 정원의 설계가로도 잘 알려진 영국의 조경가 찰스 젠크스(Charles Jencks)는 스코틀랜드에 우주 탄생 이론을 형상화한 사색의 정원을 디자인하여 과학적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그는 이곳에 우주 폭포, DNA 정원, 프랙털 테라스, 쿼크 산책로, 블랙홀 테라스 등 이름만 들어도 호기심을 자아내는 독특한 대지 예술을 선보였다. 미국의 조경가 피터 워커(Peter Walker)는 9·11 테러로 붕괴된 뉴욕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이 있던 자리에 희생자 추모 정원을 조성하여 전 세계인들에게 치유와 재생, 회복의 메시지를 전하기도 했다.
도시민들이 보다 인간적인 규모(휴먼 스케일)로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정원 디자인도 색다른 즐거움과 의미가 있다. 미국의 조경 디자이너 마사 슈워츠(Martha Schwartz)의 작품이 대표적이다. 마사는 1979년 남편을 위해 집 앞 회양목 생울타리로 둘러싸인 작은 공간에 베이글과 보라색 자갈로 꾸민 정원으로 유명해졌다. ‘베이글 가든’이라는 이름의 이 창의적이고 유머러스한 정원이 미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미국조경가협회(ASLA) 잡지에 소개되면서 당시 보수적이었던 조경계는 크게 술렁였다.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기발한 아이디어와 예술적 감각으로 계속해서 도시 곳곳의 열악한 장소에 매우 독특한 정원을 만들었다. 그녀의 디자인은 단순히 재미를 넘어 여러 가지 사회적 이슈와 환경 문제에 대한 철학을 담고 있다. 가령 1986년에는 매사추세츠 케임브리지의 생명공학 연구소 옥상에 프랑스 정원과 일본 정원을 파격적으로 결합시킨 스플라이스 정원(Splice Garden)을 만들어 생명공학의 발전 이면에 숨겨진 유전자 조작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정원 작가들은 모두 예술가의 범주에 속해 있다. 전 세계 정원 작가들의 디자인 트렌드를 가장 잘 파악할 수 있는 무대가 바로 110년 전통의 런던 첼시 플라워쇼다. 2023년 금메달을 수상한 세라 프라이스(Sarah Price)의 정원은 영국의 화가 세드릭 모리스(Cedric Morris·1889~1982)가 살았던 벤톤 엔드 하우스(Benton End house)와 정원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것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모리스는 붓꽃에 심취한 원예가이기도 했는데, 매년 천 본이 넘는 붓꽃을 직접 재배하며 예술가적 관점에서 눈길을 사로잡는 종류를 선발했다. 일명 ‘벤톤 아이리스 컬렉션’이라 불리는 그 세련된 붓꽃들이 이 정원의 주인공이었다. 올해 첼시 플라워쇼에서도 예술성을 내세운 훌륭한 작품들이 많이 탄생했다. 그중 도시의 ‘포켓’ 정원과 함께 세인트 제임스 피카딜리 교회를 재조명한 로버트 마이어스(Robert Myers)의 작품은 역사적 공간만이 줄 수 있는 예술적 영감뿐 아니라 도시 속 자연의 평온함을 느끼게 해준다.
정원은 식물 자체의 아름다움만으로도 예술성을 추구할 수 있다. 염두에 둘 것은 분명 정원이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데는 다 이유가 있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가장 자연스러워 보이는 야생화 정원이나 숲 정원조차도 그 정원을 설계한 가든 디자이너의 철저한 의도와 계획이 반영된 경우가 많다. “사람은 손이 아니라 뇌로 그림을 그린다”는 미켈란젤로의 말처럼 정원을 디자인할 때에도 구체적인 아이디어 구상과 기획이 필요하다. 먼저 기본 구도와 윤곽을 잡은 뒤 식물들의 색깔, 질감, 계절별 조합을 바탕으로 전체적인 톤과 분위기를 설계해 간다. 이때 비례, 포커스, 통일성, 그리고 균형감 등 미술의 원칙을 적용한다. 특히 선과 모양, 색감과 질감 같은 동일한 요소를 반복적 리듬으로 나타내는 것이 중요하다. 동그란 볼 모양이든 원뿔 형태든 자연스럽게 반복되는 요소들은 시선을 이끌어 공간에 생기를 불어넣기 때문이다.
어떤 정원의 주제와 상징성을 강조하기 위해 인공물을 사용할 수 있다. 관건은 식물 자체의 아름다움과 인위적인 조형물을 얼마나 조화롭게 접목할 수 있는가다. 특히 인공 구조물은 주변 환경과 잘 어울리도록 신중하게 계획해야 한다. 주객이 전도되어 식물이 아닌 인공물이 주가 되면 마치 요리를 낼 때 음식은 별 볼 일 없고 플레이팅만 요란한 꼴이 되고 만다.
누구나 자신이 가꾸는 정원에 이야기와 창의력을 더해 특별한 아름다움을 창조해낼 수 있다. 인상파 화가 모네가 시시각각 변하는 빛을 포착하기 위해 말년까지 자신의 정원을 화폭에 담았던 것처럼, 정원은 살아 있는 박물관이자 야외 갤러리로서 학생들이 자연 속에서 과학과 예술을 공부할 수 있는 최고의 수업 장소다. 전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도시에 살고 있는 이 시대, 도시가 수많은 사람들의 안식처라면, 예술적 영감이 가득한 정원은 도시의 영혼이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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