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語西話] 삼일암 샘물

원철·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장 2024. 6. 13.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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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정(市井·저잣거리)이라고 했다. 우물을 중심으로 마을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수도가 보편화되면서 동네 우물은 대부분 유물이 되었다가 결국 폐정(廢井)이라는 수순을 밟았다. 드문 일이긴 하지만 우물·샘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고 스토리가 지닌 정신적 문화적 가치를 알아보는 인물이 등장하면서 다시 살아나는 경우가 있긴 하다. 전남 순천 조계산 송광사 삼일암 영천(靈泉)이 그랬다. 사찰의 규모가 전란 이전의 모습으로 복원되면서 총림에 대중이 모이자 기존 샘물로는 수량이 부족했다. 필요한 만큼 물을 공급하기 위해서 보(洑)를 이용하여 계곡물을 막았고 상수도를 설치했다. 하지만 경내지 주변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작은 샘은 사라졌고 시간이 지나면서 모두의 기억마저 희미해졌다.

영천은 글자 그대로 영험 있는 샘물이다. 곁에는 삼일암(三日庵)이 있다. 중창상량문에는 1203년 담당(湛堂)국사가 이 집을 창건하면서 ‘삼일암’이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했다. 보정(寶鼎·1861~1920)스님은 〈다송문고 권2〉에서 “이 자리에서 명상을 시작한 지 삼 일 만에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에 삼일암이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기록했다. 두 내용이 자연스럽게 합해지면서 담당국사가 삼 일 만에 바라던 바를 이룬 곳이라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나갔다. 당시 수행 생활을 할 때 음으로 양으로 큰 도움을 주었던 뒤뜰의 샘물은 이후 ‘영천(靈泉)’으로 격상되면서 대중의 예우까지 받게 되었다.

1938년 송광사를 찾았던 송태회(宋泰會·1872~1942) 선생은 ‘삼일영천 샘물이 아홉 꽃잎을 피우더니(三日水開九葉花) 지금은 거울처럼 달과 구름 비추었네(至今雲月鏡中斜)’라는 시를 남겼다. 아홉 꽃잎은 고려 말 송광사가 배출한 열여섯 명의 국사(國師·나라의 정신적 스승) 가운데 제9세 담당국사를 비유한 것이라는 해설을 붙였다. 특히 보정 스님은 1895년 ‘돌을 깎아 성벽처럼 샘 주변을 잘 막았고 (바닥에) 깔린 모래가 신령스럽다’고 하여 그 모양새는 물론 분위기까지 세세하게 묘사해 두었다.

어쨌거나 삼일암은 오랜 세월 동안 곁에 있는 맑은 샘물의 청량한 기운 덕분에 마음이 저절로 고요해지는 수행처라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그 명성을 다시 잇고자 삼일암 주인인 송광사 방장 현봉(玄鋒·1949~2024. 호:남은) 스님은 3년에 걸친 노력과 의지로 2021년 가을, 샘을 복구하고 덮개 지붕인 수월각(水月閣)까지 완공했다. 폐정된 지 30여 년 만에 다시 물길을 살린 것이다. 첫 샘물로써 차를 다려 국사전(國師殿·16국사 영정을 모신 전각, 국보)에 올렸다고 한다.

남은(南隱) 대종사께서 지난달 5월 초순 홀연히 열반에 드셨다. 당신은 삼일암을 떠났지만 영천은 조계산의 법유(法乳)가 되어 영원토록 남녘을 적시며 흘러갈 것이다. 조문을 마치고서 차 한잔을 마시기 위해 잠시 머물렀던 방에 걸린 족자에서 ‘삼일’이란 글자가 두 눈에 그림처럼 꽂힌다.

삼일수심(三日修心)은 천재보(千載寶)요

백년탐물(百年貪物)은 일조진(一朝塵)이라.

삼일간 닦은 마음은 천년이 지나도 보배가 되겠지만

백년 동안 탐낸 물건은 하루아침에 사라질 흙먼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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