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와 성찰]하늘만은 남겨두자
만국기가 펄럭이던 운동회 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흥분상태였다. 달리기와 줄다리기, 기마전과 오자미를 던져 박을 터뜨리는 게임도 즐거웠지만 잠을 설치며 그날을 기다리도록 한 것은 역시 평소에는 먹어볼 수 없었던 군것질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투명한 병에 담긴 주황색의 음료는 가히 천국의 맛이었다. 내 눈을 온통 사로잡은 것은 크고 작은 풍선이 줄줄이 매달린 풍선 뽑기였다. 알록달록하고 큼지막한 풍선을 차지하고 싶었지만 내 몫은 늘 아주 작은 풍선이었다. 그때마다 내 눈길은 큰 풍선을 뽑고는 의기양양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친구들을 향하곤 했다. 하지만 돈이 없어 풍선 뽑기에 동참할 수 없던 아이들도 풍선 놀이에 슬쩍 참여할 수 있었다. 풍선을 들고 다니다 시들해진 아이들이 단단한 매듭을 끌러 풍선을 풀어놓으면 푸스스스 소리를 내며 제멋대로 날아가는 풍선을 함께 따라다니며 깔깔거렸다. 60년 전 저편의 풍경이다.
풍선은 일종의 꿈이다. 중력을 거슬러 상승하려는 인류의 꿈 말이다. 한밤중에 하늘을 올려다보면 광대무변의 세계가 성큼 다가왔다. 별자리들을 바라보며 경외심을 느끼지 않을 사람이 누구인가. 한낮의 하늘도 아름다웠다. 멋진 선을 그으며 날아다니는 제비의 날렵한 비행은 자유였고, 바람을 타고 공중을 선회하는 솔개의 우아한 몸짓은 고귀함이었고, 줄을 지어 어디론가 날아가는 기러기는 그리움이었다. 하늘에 한 줄기 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비행기는 꿈이었다. 풍선은 그런 꿈의 소박한 대응물이었다. 놀이동산이나 공원에서 막대풍선에 헬륨 가스를 주입하여 몇번의 손동작만으로 동물이나 식물의 형상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을 아이들은 마치 창조의 신비를 보듯 바라본다.
미국의 현대 미술가인 제프 쿤스는 막대풍선으로 만드는 동물 모양을 스테인리스 스틸로 재현해 사람들에게 선보였다. ‘풍선 개’ 혹은 ‘풍선 토끼’ 앞에 사람들은 오래 머문다. 어찌 보면 유치해 보이는 그 작품을 두고 철학자 한병철 교수는 긍정사회의 체현이라고 평가했다. 매끄럽기 이를 데 없는 표면은 아무에게도 상처를 입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풍선 개’는 어떤 재앙도, 어떤 상처도, 어떤 깨어짐이나 갈라짐도, 심지어는 봉합선조차 없는 그 일관된 긍정의 세계이다. 갈등이나 아픔이나 내면이 없다. 그것은 허구의 세계일 뿐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해석할 것도 생각할 것도 없는 그 작품 앞에 머무는 것은 어쩌면 잃어버린 세계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북한이 날려 보내는 오물 풍선으로 인해 남북 간 군사적 긴장이 고조됐다. 타이머와 기폭 장치까지 설치된 풍선 속에 담긴 온갖 오물은 소통에 대한 거부, 체제에 대한 조롱, 우리를 건드리지 말라는 경고이다. 왜 이런 유치하기 짝이 없는 일을 하는 걸까? 탈북단체들이 살포하는 대북전단에 대한 대응이란 분석이 우세하다. 우리 군은 9·19 군사합의에 의해 중단했던 대북 확성기 방송을 재개했다. 본래적 언어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것이지만 타락한 언어, 권력으로 변한 언어, 실체와의 약속을 저버린 언어는 오히려 관계를 소원하게 만든다. 땅에 그어진 경계선 때문에 하늘조차 나뉘었다. 그 하늘을 오물 풍선과 대북 전단을 담은 풍선이 점유하는 이 현실이 가슴 아프다.
정현종 시인의 ‘요격시1’을 떠올리는 것은 그 때문이다. “다른 무기가 없습니다/ 마음을 발사합니다”라고 시작되는 이 시에서 시인은 세상을 파괴하는 온갖 무기와 정치꾼, 군사 모험주의자, 제국주의자, 승리 중독자들에게 두루미, 기러기, 도요새, 굴뚝새, 뻐꾸기, 비둘기, 왜가리, 뜸부기, 까마귀, 먹황새, 물오리, 때까치, 가마우지를 발사한다고 말한다. 어찌 보면 황당하지만 이 가슴 벅찬 시적 상상력이 바로 평화의 단초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미래 세대를 위해서라도 하늘만은 남겨두었으면 좋겠다. 증오와 적대감이 오가는 공간이 아니라 숭고함과 아름다움을 향한 상승의 꿈을 위한 공간으로 말이다. 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문득 나타난 풍선에서 오물을 떠올리지 않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김기석 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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