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기록의 기억] (127) 명동성당

기자 2024. 6. 13.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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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봄 민중엔 ‘오아시스’…지금은 약자들 막는 바리케이드만
명동성당 1971년(왼쪽), 2024년 | 셀수스협동조합 제공

해외여행 중에 도시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다. 무더위 혹은 맹추위에 지친 몸이 오아시스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계절에 따라 시원하거나 따뜻한 공기가 맞아준다. 운이 좋으면 파이프 오르간 연주까지 들으며 예배용 의자에 앉아 졸아도 된다. 오아시스는 성당이다.

민주주의가 압살당하던 한국에서 명동성당은 시위대에게 오아시스였다. 1987년 6월, ‘민주주의 쟁취’를 위해 명동에 집결한 학생들은 유인물을 살포하고 구호를 외치며 전투경찰과 충돌했다. 사복 체포조에 쫓기던 학생들은 명동성당으로 몸을 피했다. 피난처였다. 전두환 정권이 성당을 원천봉쇄하며 시위자 전원을 체포하겠다는 엄포에 김수환 추기경은 단호히 말했다. “경찰이 성당에 들어오면 나를 먼저 만나게 될 것이다. 그다음엔 신부들이 있을 것이고 신부들 뒤에는 수녀들이 있을 것이고 당신들이 연행하려는 학생들은 수녀들 뒤에 있을 것이다.”

천주교 신자였던 통역관 김범우는 현재 명동성당 자리인 자신의 집에서 가톨릭 강좌를 1780년 시작했다. 그리고 이 터에 고딕 양식으로 1896년 건축된 명동성당의 뾰족한 종탑은 ‘높은 곳을 향하는’ 종교적 열망을 표현한 것이다. 6월항쟁 당시, 명동성당은 높은 곳이 아닌 낮은 곳을 향했다. 전투경찰이 쏜 직격탄에 맞아 피 흘리는 학생들을 치료해줬고 성당 마당에 천막을 치고 농성하는 상계동 철거민들에게 음식을 제공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자들은 다 내게 오라. 내가 쉬게 하리라’던 예수의 말과 행동을 실천했다.

명동성당 본관을 사진 찍은 1971년 그해, TV로 생중계되었던 ‘성탄미사’에서 김수환 추기경은 박정희 독재정권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시간이 흘러 김수환 추기경은 선종했고 2024년 명동성당은 한류 중심 명동의 랜드마크가 되었다. 시위대가 모여 집회를 열었던 명동성당 내의 비탈길은 보행이 금지된 차량통행로와 새로 조성한 화단으로 인해 더 이상 사람들이 모일 수 없다. 성당에는 카페, 갤러리 등 복합문화공간이 들어섰다. ‘시위와 농성’을 허가하지 않겠다는 명동성당 방침에 따라 이제는 이곳에서 사회적 약자들이 집회를 열 수 없게 된 것이다.

1987년 서울대 학생 박종철이 고문치사를 당했을 때, 집전하던 미사에서 “우리의 형제 박종철이 어디 있느냐”면서 분노했던 김수환 추기경이 지금의 명동성당 모습을 보면 뭐라고 하실까?

김형진 셀수스협동조합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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