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짓으로 ‘죽음’ 보여주는 연극 본 적 있나···장애라는 렌즈로 본 예술
장애 배우 6명 등장하는 ‘인정투쟁’
기존 예술 재구성해 새로 정의
예술은 익숙한 세계를 다르게 보는 데서 시작한다. 최근 주목받는 장애예술은 장애라는 렌즈로 예술의 낡은 관습을 혁파하는 시도다.
13~16일 서울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공연하는 연극 <맥베스>는 한국에 한국어와 한국수어라는 두 가지 공용어가 있다는 사실에 착안했다. 다수의 한국인은 한국어를 주로 사용하고, 이를 한국수어로 옮겨 보여주는 데 익숙하다. <맥베스>는 이 관행을 뒤집는다. 농인 배우 6명이 수어로 대사를 하면, 소리꾼 4명이 번역해 청인에게 들려준다. <맥베스> 제작진은 원작의 주요 독백을 선별해 16개 장면으로 새로 만들었다. 등장인물은 대대로 정육점을 운영하는 집안, 공간 배경은 장례식장으로 바꿨다. 셰익스피어 작품 특유의 시적인 운율과 리듬감을 수어와 몸짓으로 표현한다. 극의 주요 키워드인 ‘죽음’을 나타내는 수어를 반복해 보여준다. 각색하고 연출한 김미란은 “비장애인이 수어를 보고 ‘아름답다’고 하는 경우가 많은데, 잔인한 언어를 수어로 펼쳐내면 어떤 감각을 받을지 궁금했다”고 말했다. 배우 6명 중 박지영 등 5명이 여성이다. 드래그퀸 퍼포머로 활동하는 남성 농인 배우 우지양이 무당 역을 맡았다. 대본은 극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각색본, 농인 배우를 위한 수어 번역본, 소리꾼의 작창본 등 세 종류다. 배우가 수어로 연기하면, 소리꾼은 이를 그대로 들려주거나 요약한다. 소리꾼이 ‘변사’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한국수어, 한국어, 소리꾼의 소리가 각자 영역을 존중하며 어울린다. 음악, 음향 등 청각 신호는 배우에게 LED 바와 같은 시각적 신호로 공유된다.
15일까지 서울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에서 공연하는 연극 <인정투쟁; 예술가 편>에서 연기하는 배우는 모두 장애인이다.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의 김원영, 제59회 백상예술대상 연극부문 연기상 수상자 하지성 등 배우 6명이 예술가로 인정받기 위한 투쟁 과정을 풍자적으로 그렸다. 무대를 둘러싼 4면 객석을 활용한다. 관청에 예술인 활동을 증명하려는 고군분투, ‘선생님’으로부터 인정받으려는 노력이 묘사된다. 공연이 중단될 위기에 처하자 배우들이 갑자기 관객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사과하는 장면에선 객석에서 웃음이 터졌다. “이 무대 아무래도 올드해” 같은 메타연극적 대사도 나온다. 연극이 시작할 때 빈 휠체어가 무대를 가로지르는 장면을 빼면, 극 전체에서 배우들이 장애인이라는 사실은 특별히 언급되지는 않는다. <인정투쟁>을 쓰고 연출한 이연주는 “배우들과 먼저 작업을 시작했고, 예술가 이야기는 이후 구체화했다”며 “장애, 예술에 대한 세상의 기준, 규정을 살피면서 세계가 어떻게 구성되고 개인은 그런 세계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가 살폈다”고 말했다. 공연비평가 하은빈은 “장애라는 렌즈를 통해 들여다볼 때 비로소 온전히 포착되는 예술과 예술계 전반의 오류를 드러내고 이 몸들을 통해 예술을, 혹은 예술계를 새로이 정의하려는 시도”라고 평했다.
지난달 서울 모두예술극장에서 공연한 연극 <젤리피쉬>는 다운증후군 여성의 사랑과 사회적 성장을 유쾌하게 그린 작품이다. 영국 극작가 벤 웨더릴의 원작으로 이번에 작품개발 쇼케이스 형태로 상연했다. 다운증후군을 가진 무용수 백지윤이 오디션을 통해 발탁돼 주연을 맡았다. 장애 배우, 비장애 배우들은 연습 기간 동안 감각 워크숍, 한국사회의 장애인식 토론을 함께 진행했다. 모두예술극장에서는 20~23일 <어둠 속에, 풍경>도 공연한다. 시각에 의존한 관람 방식을 벗어나, 앞이 보이지 않아도 즐길 수 있는 공연을 지향한다. 시각장애인과 비시각장애인 관객이 짝을 이뤄 관람한다.
이 작품들은 장애를 미학의 한 요소로 받아들여 예술의 의미를 재구성하려는 첨단의 시도지만, 장애 예술가에 대한 시선은 여전히 ‘동호회’ ‘아마추어’로 머무는 경우가 있다. <인정투쟁>의 드라마터그(극작·연출의 예술적 컨설턴트) 김슬기는 <인정투쟁> 초연에 참여했던 고 강희철 배우의 이야기를 전했다. “장애를 갖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잘했어, 그런 식의 비평은 이제 그만 보고 싶어.”
연출가 김미란은 “비장애인 배우가 테크닉적으로 뛰어날 수도 있겠지만, 정작 작품을 만들다 보면 그런 연기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다”며 “<맥베스>의 배우들도 농인 아티스트로서의 정체성을 확실히 갖고 있다”고 말했다. 연출가 이연주는 “당사자성을 가진 사람이 출연했을 때 ‘전문성’에 대한 오해가 생기곤 한다. 프로와 아마추어의 기준은 무엇인지, 연극인의 ‘자격’은 누가 정하는지 질문을 던지고 싶다”고 말했다.
백승찬 선임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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