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화와 벽화, 獨 표현주의와 美 팝아트…닮은 듯 다른 쌍둥이 그림

2024. 6. 13.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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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 에포크
2개의 '바우하우스 계단'
獨 조형예술학교 '바우하우스'서
벽화·조각·무용 가르치던 슐레머
나치에 저항해 그린 실험적 작품
50년 후 美 리히텐슈타인에 영감
점들로 이뤄진 8m 벽화로 재탄생
오스카 슐레머의 ‘바우하우스 계단’(1932).


로이 리히텐슈타인(1923~1997)은 미국을 대표하는 팝아트 작가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바우하우스 계단’은 1988년 제작됐고 뉴욕 현대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다음 해에 리히텐슈타인은 건물 내부에 걸릴 벽화 제작을 의뢰받아 ‘바우하우스 계단’을 길이 8m, 폭 5m에 달하는 거대한 크기로 확대해 다시 제작했다. 벽화는 벽에 직접 그리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바우하우스 계단 벽화’는 캔버스에 그린 뒤 벽에 거는 형식으로 제작됐다. 벽화는 2023년 리히텐슈타인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뉴욕 가고시안갤러리가 주최한 전시에서 재공개됐는데, 압도적인 작품의 크기 때문에 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바우하우스 계단’(1988).


‘바우하우스 계단’과 ‘바우하우스 계단 벽화’의 작품 제목에 등장하는 바우하우스는 20세기 초 독일에 설립된 조형예술학교다. 리히텐슈타인은 바우하우스 교수이던 오스카 슐레머가 1932년 그린 동명의 작품을 오마주해 회화와 벽화로 제작했다. 미국의 팝아트와 독일의 바우하우스가 리히텐슈타인의 작품에서 어떻게 조우하게 됐을까. 바우하우스와 슐레머에서 이야기를 시작해보고자 한다.

바우하우스는 1919년 건축가이자 산업디자이너인 발터 그로피우스가 주축이 돼 독일 바이마르에 설립한 조형예술학교다. 건축을 중심으로 회화, 조각, 공예 등 모든 예술을 다루고자 했고 순수미술과 응용미술, 예술과 기술의 통합을 중시했다.

‘바우하우스 계단’을 그린 슐레머는 화가이자 조각가인 동시에 무용가이기도 했다. 바우하우스 교수로 활동하는 동안에는 벽화와 조각, 무대 디자인을 가르쳤고 인간의 몸과 공간(건축), 인간과 기계의 관계에 특히 관심을 가졌다. ‘바우하우스 계단’도 그의 관심사를 보여주는 회화 중 하나다.

슐레머의 작품은 현대 건축사에서 모더니즘 건축을 대표하는 사례로 손꼽히는 이 바우하우스 건물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격자로 구획된 벽과 창, 사선으로 배치된 계단이 있는 기하학적인 건축 구조를 배경으로 무용수처럼 가볍게 계단을 오르는 인물들이 배치된 이 작품은 슐레머가 인체의 움직임과 건축의 추상적 조형 사이의 조화와 대비를 실험한 결과물이다.

독일 조형예술학교 ‘바우하우스’.


바우하우스의 교육 이상과 커리큘럼 그리고 슐레머를 비롯한 바우하우스 교수들의 실험적인 작품은 여전히 우리 시대의 미술 교육과 작가들의 작업에 영향을 주고 있다. 그러나 바우하우스의 실험적인 교육 방식은 나치 집권 이후 비판의 대상이 됐고 1933년 폐교로 이어졌다. ‘바우하우스 계단’은 폐교 1년 전에 그려져 그해 열린 슐레머 회고전에 출품됐으나 나치의 압력으로 전시장이 폐쇄되는 일을 겪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뉴욕 현대미술관이 1933년 ‘바우하우스 계단’ 구입을 결정했다.

슐레머의 작품만 미국으로 거처를 옮긴 것이 아니라 바우하우스 교수 상당수도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했다. 발터 그로피우스가 하버드대 건축과로, 루트비히 미스 반데어로에가 일리노이대 건축과로 자리를 옮긴 것이 대표적이다. 유럽 미술가와 건축가들이 나치의 박해와 제2차 세계대전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은 그곳의 젊은 예술가들이었다. 1950년대 이후 추상표현주의, 팝아트와 같은 미국적 현대미술을 만들어낸 젊은 작가들이 국제 미술계에서 약진을 거듭할 수 있었던 원인 중 하나는 미국으로 이주한 유럽 예술가들의 영향이었다.

리히텐슈타인도 이와 같은 배경에서 성장한 대표적인 미국 작가 중 한 사람이다. 그는 1960년대 이후로 만화와 광고 이미지의 부분을 확대한 뒤 인쇄물의 망점을 연상케 하는 점들로 이를 뒤덮고 원색의 강력한 색채를 더한 팝아트 작품을 제작하면서 화가로서의 활동을 본격화했다. 서양미술사를 대표하는 명화 즉 유럽 미술을 재해석한 작품을 제작하는 것에도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졌다.

1970년대 말에는 독일 표현주의 미술에 심취했는데, 그런 이력이 이후 바우하우스와 슐레머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리히텐슈타인이 슐레머에 관심을 두게 된 접점 중 하나는 벽화였다. 슐레머는 바우하우스에서 벽화를 지도하면서 그 자신도 여러 점의 벽화를 제작한 바 있고, 리히텐슈타인도 ‘바우하우스 계단 벽화’ 전후로 여러 점의 벽화를 제작한 이력이 있다.

회화인 ‘바우하우스 계단’과 벽화인 ‘바우하우스 계단 벽화’의 차이점을 비교해 보는 것도 흥미롭다. 좌측 상단과 우측 하단의 인물은 슐레머의 ‘삼부작 발레’(1922) 속 인물을 연상시킨다. 이 작품은 무용과 건축, 음악과 의상, 인간과 기계 등 다양한 요소 간의 조화를 실험하기 위해 슐레머가 제작한 무용극이다. 기하학적인 형태로 제작된 의상은 무용수들을 기계처럼 보이게 하는데, 리히텐슈타인은 ‘삼부작 발레’ 속 인물과 의상의 이런 특징을 벽화에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리히텐슈타인은 슐레머의 ‘바우하우스 계단’과 ‘삼부작 발레’를 종합해 자신만의 팝아트 벽화를 제작하고자 했다. 이로 인해 ‘바우하우스 계단’과 ‘바우하우스 계단 벽화’는 바우하우스와 팝아트, 유럽의 모더니즘 미술과 전후 미국의 현대미술이 조우하는 장이 될 수 있었다.

전유신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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