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사리를 모신 무릉도원의 절, 영월 법흥사 [정용식의 내 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2024. 6. 13.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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㉛ 강원도 영월 법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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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사찰은 불교의 공간이면서, 우리 역사와 예술의 유산입니다. 명산의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 잡은 사찰들은 지역사회의 소중한 관광자원이기도 합니다. 치열한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휴식을 얻고자 할 때 우리는 산에 오르고 절을 찾습니다. 헤럴드경제는 빼어난 아름다움과 역사를 자랑하는 사찰 100곳을 소개하는 ‘내 마음대로 사찰 여행 비경 100선’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법흥사 2층 누각 원음루와, 이 절에서 봉안하고 있는 석가모니 사리(오른쪽 상단)

아주 오래전, 단종의 애처로운 이야기를 간직한 청령포를 나룻배를 타고 들어간 기억이 있다. 험준한 암벽과 삼면에 초록빛 강물이 맴돌고 있는 육지 속의 섬으로, 소나무숲이 아름다운 곳이었다. 단종은 이곳에 유배 온 지 4개월 만에 죽음을 맞이했다. 강원도 영월에 얽힌 기억이다. 한때 개인적으로 동경했던, 방랑 시인 김삿갓(김병연)의 묘소가 영월에 있다는 얘기를 듣고 언젠가 그곳을 다시 찾겠다고 생각했다.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지난 4월 19일 서울 조계사에서 ‘사리(舍利) 이운(移運) 고불식(告佛式)’이 있었다. 해석하자면 ‘부처님이나 성자의 수행 결과로 나온 구슬 모양의 유골을 옮겨온(반환받은) 것에 대해 부처님께 고하는 의식’이다. ‘사리’에 대한 궁금증이 있던 차에 진신사리(석가모니의 유골)를 모신 5대 ‘적멸보궁’ 중 하나지만 가보지 못했던, 강원도 영월군 사자산 아래 법흥사를 찾았다. 이 절을 간다면 더불어 들러야 한다는 요선정에도 갔다.

요선정에서 내려다 본 영월 주천강 풍광

고대했던 영월 방문인데, 시간이 허락된다면 래프팅의 명소 동강(東江)의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어라연 지역과 우리 땅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서강(西江)에 있는 한반도 모양의 땅도 보겠단 계획을 세웠다. 강원도 깊은 골 물줄기가 서강과 동강으로 모여서 남한강을 이루고, 다시 팔당에서 북한강과 합류해 서울을 남북으로 가르며 강화를 지나 서해로 빠져나간다.

5대 적멸보궁

조선 정조대왕은 지공선사, 나옹선사, 무학대사를 3대 화상(和尙, 수행을 많이 한 고승을 뜻하는 말)으로 교시를 내리고 큰 스승으로 예우했는데 3대 화상이 모두 머물렀던 회암사(지)에서 지난 5월 19일 ‘회암사 사리 이운 기념 문화축제 및 삼대화상 다례제’가 열렸다.

지난 4월 19일 오전 서울 종로구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열린 ‘회암사 사리 이운 고불식’에서 공개된 부처님 사리.대한불교조계종은 지난 16일 미국 보스턴박물관을 방문해 가섭불·석가모니·정광불(연등불) 및 고려시대 스님인 나옹선사·지공선사의 사리와 편을 돌려받았다. [연합]

경기도 양주 천보산 기슭에 있는 회암사는 달마대사 후손으로 3년간 고려에 머물렀던 지공선사(1300~1363)가 인도 아라난타사를 본떠 창건했고 이후 나옹선사(1320~1376)가 이곳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나옹의 제자 무학대사는 조선 개국을 도왔고 이성계는 왕위에서 물러난 이후에 이곳에서 수도 생활을 했다. 당시 회암사는 조선 최대의 가람으로 왕의 궁궐 밖 임시 숙박처인 행궁(行宮) 역할을 할 정도로 융성했다. 하지만 16세기 후반 숭유억불이 창궐하던 시기에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로 타버려 탑과 주춧돌만 남기고 폐사됐다.

과거 양주 회암사에 있었던 3여불(가섭불·정광불·석가모니불), 2조사(지공대사·나옹선사)의 사리와 사리를 보관하던 사리구가 100여년 전 일제강점기에 유출됐다. 1939년 미국 보스턴미술관이 한 업자로부터 이것을 매입한 뒤 소장해왔다. 2004년 이 사리의 존재가 처음 알려졌다. 반환 논의가 이어지다가 최근 합의를 이뤄 사리는 반환하고 사리구는 대여하는 형식으로 지난 4월 한국으로 가져오게 된 것이다.

신라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수행하고 석가모니불의 사리를 전수받아 643년 귀국했다. 이후 당시 신라에 5곳의 절을 창건하고 중국서 가져온 사리를 각 절마다 봉안했다. 이 절들을 5대 적멸보궁(寂滅寶宮)이라 한다. 가장 먼저 세운 절은 영축산 통도사(通度寺)이고 ▷오대산 상원사(上院寺) ▷태백산 정암사(淨岩寺) ▷설악산 봉정암(鳳頂庵) ▷영월 법흥사를 차례로 창건했다. 법흥사의 이름은 애초엔 흥녕사였는데, 지난 1902년 중건하면서 지금의 이름으로 개칭했다. 법흥사는 자장율사가 가장 오래 머물며 수행하고 설법하던 절이었다고 한다.

법흥사 일주문
법흥사 적멸보궁

적멸보궁이란 석가모니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법당을 뜻하는데 ‘온갖 번뇌 망상이 적멸한 보배로운 궁’이란 뜻이다. 이 건물엔 불상을 따로 안치하지 않고 진신사리가 봉안된 쪽으로 예배를 올리기 위한 불단만 마련해둔다. 일반적으로 절 건물의 이름엔 전(殿)이나 각(閣)을 붙이지만 진신사리를 봉안한 전각은 궁(宮)이라 높여 부른다. 사리는 이적의 표상으로서 본래 부처님 법신에서 나온 깨달음의 결정체라고 하는데 몸 밖에서 나온 ‘법사리’, 몸에서 나온 ‘법신사리’로 구분하기도 한다. 자장율사의 5대 적멸보궁 외에도 적멸보궁을 두고 있는 사찰들이 많은데 ‘부처님의 사리가 그리 많았나’ 하는 의구심을 갖는 경우도 있다.

법흥사에 들어서서 소나무숲길 따라 300여m 올라가면 사자산 아래 연화봉(923m) 중턱에 1939년에 중수한 적멸보궁이 있다. 건물 뒤에는 자장율사가 수도하던 토굴과 진신사리를 모신 부도가 있다. 토굴은 고려시대 석실분으로 겉모습은 흙을 봉긋하게 덮어 무덤처럼 보이며 내부는 높이 160㎝, 깊이 150㎝, 너비 190㎝ 규모다. 지금은 단을 쌓아 들어갈 수 없다.

자장율사가 수행하던 토굴(왼쪽)과 부처님 사리를 모신 부도 [연합]

일명 사리탑이라고 하는 부도는 몸돌이 8각형으로 전·후면에는 자물통 문양(법장쇠)이 양각되어 있고 나머지 6면에는 신장상이 새겨 있다. 법흥사 입구 쪽에 있는 징효대사 부도와 똑같은 양식이다. 유홍준 교수는 법흥사가 화재와 산사태 등으로 소실과 중건 과정을 여러 번 거치다 보니 사리탑은 어떤 큰스님의 부도탑인 듯하고 진신사리는 적멸보궁 뒤 사자산 어느 산줄기에 묻혀 있을 것이라고 한다. 진신사리가 사리탑 안에 있든, 사자산 아래 그 어느 곳에 묻혀 있든 영험한 기운은 발산되고 있으리라 생각해본다. 적멸보궁 뒤 연화봉 산세는 유난히 위엄 있어 보이고 앞마당에서 내려다보는 풍광과 주변 산세는 평온하다.

구산선문(九山禪門)
법흥사가 자리잡은 사자산 풍광

영월, 횡성, 평창에 걸쳐 있는 험준한 사자산(1181m)은 원래 네 가지 재화(산삼·꿀·옻나무·흰진흙)를 가지고 있다 하는 사재산(1260m) 자락이었으나 법흥사를 창건할 때 불교를 수호하는 상징적인 동물인 사자를 일컬어 큰 산봉우리에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법흥사는 깊은 산중에 있지만 넓은 분지에 세워졌다. 방문하는 신도들이 많고 템플스테이도 운영하는 듯 주차장이 널따랗다. 입구의 2층 누각 원음루를 지나 마당에 들어서자 우측으로 잘 정비된 요사채, 선방 등이 보인다. 좌측 앞마당에는 극락전과 법흥사를 개창조하고 사자산문을 연 징효대사 절중(826~900)의 승탑(부도)과 탑비(구산선문 승탑)가 자리하고 있다. 승탑과 탑비가 함께 있다는 것 자체로 문화재적 가치가 크다고 하는데 영월흥령사징효대사탑비는 보물로 지정돼 있고, 크기가 작은 징효국사부도는 강원도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탑비 비문을 당대 최고의 명필가로 손꼽혔던 최언위(최치원의 사촌이자 전주최씨의 시조)가 썼다 해서 더욱 가치가 있다고 한다.

징효국사탑비(왼쪽)와 법흥사 중건비

법흥사는 신라 말에 징효대사가 중창하고 선승들이 모이면서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하나인 사자산문(獅子山門)의 중심 도량이 되었다. 구산선문은 통일신라 말기에서 고려 초 중국 달마대사의 선법(참선하는 법)을 이어받은 선종(禪宗)의 아홉 파(派:산문)를 일컫는다. 사자산문은 화순 쌍봉사의 철감국사 도윤(798~868)으로부터 시작됐고 흥녕산문으로 불리며 한국 불교사의 명맥을 이어갔으나 조선 조정의 숭유억불 정책으로 구산선문 대부분이 폐사되었다. 법흥사도 폐사되었는데, 근래 들어 전각들을 새로 지었다. 때문에 큰 사찰의 면모는 갖췄지만 징효대사 탑비를 제외하곤 천년고찰의 고풍스러움은 찾아보기 힘들어 아쉬움이 남는다.

법흥사 경내

사찰 초입 ‘적멸보궁 가는 길’이라는 큰 표지석을 지나면 곧바로 소나무 숲길이다. 어디선가 본 사진에는 한적한 비포장 흙길이었는데 지금은 차량 진입이 가능하도록 정비돼 있다. 길을 따라 도열해 있는 소나무들이 그윽한 정취를 만드는 덕분에 새소리 들으며 비탈길을 오르다 보면 숲속에 조용히 자리잡고 있는 전각들을 만난다. 감로각 우물터를 지나 적멸보궁 가는 계단길로 오르면서 내려다본 사찰은 아늑하고 고즈넉하다. 주차장에서 적멸보궁까지의 산책길은 꽤 가파르고 길지만,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100년 이상의 소나무 군락과 야생화들이 어우러져 시원함을 더해준다.

요선정과 마애불, 무릉도원

원주역에서 법흥사까지는 차로 1시간여 걸리는데 가는 길에 강원도 먹거리 묵집에서 도토리묵밥과 감자옹심이, 감자전으로 허기를 달랬다. 주천강을 따라가다 보니 한반도 지형을 보려면 법흥사와 반대편 길로 20여분 가야 한다고 해서 마음은 간절했지만 포기했다. 대신 길목에 붉은 대나무 숲이 눈에 확 들어왔다. 재생공간 ‘젊은달 와이파크'의 최옥영 작가가 금속파이프를 이용해 만든 설치미술 ‘붉은 대나무’였다. 재생공간을 모두 둘러보려면 입장료 1만5000원에 두 시간은 소요된다고 하여 찻집에서 커피 한 잔 마시면서 붉은 대나무를 감상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영월의 대표적인 볼거리로 자리잡은 젊은달 와이파크에 있는 설치미술 ‘붉은 대나무’

그러나 법흥사 가는 길에 꼭 들르지 않으면 안 될 곳이 있었다. 무릉도원길에 자리한 ‘요선정’이라는 정자와 ‘요선암’이라는 바위다. 무릉도원은 이상향을 상징하고 요선(邀僊)은 선인(仙人)을 맞이한다는 뜻이니 풍광이 아름다울 것이라 지레짐작해본다. 주천강과 법흥천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해 있는데 주차장도 넓게 조성되어 있다. 소나무 숲길 따라 5분여 걸어가니 예쁘게 단장된 조그만 암자 미륵암을 중간에 두고 우측 산길로 올라가면 절벽 위 요선정(정자)과 마애불 그리고 오층석탑이, 좌측 계곡길로 내려가면 요선암과 돌개구멍을 볼 수 있다.

절벽 위에 자리잡은 정자 요선정과 오층석탑. 왼쪽이 큰 바위에는 마애불이 조각돼 있다.
요선정 내부. 조선 임금들의 시구가 걸려 있다.

숙종, 영조, 정조 등 세 임금이 주천강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御製詩)와 현판이 걸려있는 요선정은 조선 중기 풍류가가 이곳 경치에 반해 선녀탕 바위에 요선암이라는 글자를 새긴데서 유래된 이름이라 한다. 요선정 옆에는 4m 정도의 결코 작지 않은 기묘한 형상의 바위에 고려시대 것으로 추정하는 ‘마애여래좌상’이 새겨져 있고, 무너져 내리는 자그마한 오층석탑이 앙증맞게 그 앞에 지키고 있어 과거엔 절터였음을 알 수 있다. 산골 민초들이 제작한 듯 투박하고 거친 마애불이지만 천진난만한 석불의 얼굴을 보니 입가에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마애불 뒤편 벼랑 끝에 간신히 매달려 있는 한 그루의 소나무 너머로 보이는 주천강의 풍광, 기묘한 화강암벽 등은 그곳에 앉아 한없이 유유자적 하고 싶을 정도로 환상적이다.

주천강 주변에 형성된 화강암 너럭바위(요선암) 지대

계곡으로 내려오니 강변의 화강암들이 움푹 파인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를 돌개구멍(포트홀)이라 부르는데 오랜 기간 소용돌이 치는 물살로 인해 형성된 것이라 한다. 이러한 곡선형 화강암 너럭바위들을 요선암(邀僊巖)이라 부르고 있는데 이곳 요선암 지대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법흥사를 방문한다면 요선정과 요선암을 꼭 들러가길 권한다. 해학과 재치, 풍류로 한 세상을 살다 간 방랑시인 김삿갓처럼 시간에 쫓기지 않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둘러볼 고장이 바로 영월이다.

글·사진 = 정용식 ㈜헤럴드 상무

정리 = 박준규 기자

nya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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