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판지 그림으로 나눔 실천, 천광호 화가 “심폐소생술 이후 삶은 덤”
지난해부터 ‘119 리본 클럽’ 회원 활동
골판지 작품 전시 통해 전태일 기념관에 기부도
2020년 1월 16일 자정 무렵이었다. 피곤한 상태에서 찬공기를 마시며 빠른 걸음으로 걸어온 게 심장에 무리를 줬다. 집에 오자마자 소파에 앉았는데 심정지가 왔다. 유치원 교사로 심폐소생술 훈련을 받았던 작은 딸이 가슴압박을 하고, 큰 딸은 119에 신고했다. 119구급대원의 심폐소생술과 자동제세동기로 멈춘 심장은 다시 뛸 수 있었다.
올해 일흔이 된 천광호 화가가 지난해부터 ‘119리본클럽’의 회원으로 활동하게 된 계기이다. 지난해 9월 발족한 리본클럽은 소방청에서 운영하는 심정지 소생자들의 모임으로 ‘다시 태어나다(Re-Born)’라는 뜻을 담고 있다. 33명의 리본클럽 회원들은 심폐소생술 교육의 중요성을 알리는 홍보 대사로 활동한다.
지난 10일 대구의 작업실에서 만난 천 화가는 “다시 살아나면서 이후 생은 덤으로 사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더욱 나눔과 쓰임에 충실하자고 다짐했어요”라고 말했다.
마침 3년 전부터 대구 전태일 옛집을 기념관으로 만들는 운동이 시작됐다. 시민모금으로 집터는 구했으나 기념관을 세울 건축비가 부족했다. 천 화가는 자신의 작품을 기증해 힘을 보태기로 했다.
자기 몸을 불태워 노동운동에 헌신한 전태일을 상징한 작품 ‘전태일의 불, 나비가 되다’라는 제목의 소품 1004점을 그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완성한 약 300점의 일부를 지난 2~3월 대구 국채보상운동기념도서관에서 연 ‘나눔과 쓰임’ 전시회에서 공개했다. 이 작품의 판매수익 약 500만원을 기부할 생각이다.
“전시는 기금 마련의 의의도 있지만 후배들의 동참을 이끌어내려는 목적도 있었죠. 기념관을 만들면 후배 작가들과 함께 전태일 동상을 세우고 싶어요.”
작품엔 화염을 내뿜는 듯한 붉은색 맨드라미와 함께 희망을 잃지 말자는 의미로 노랑색 나비가 자주 등장한다. 작품의 재료로 버려진 골판지나 옷을 활용했다. 골판지는 1980년대 중반부터 쓰기 시작했다.
“1982년 일본 도쿄 우에노공원에 갔을 때 한 일본인이 수레를 끄는 늙수그레한 영감에게 ‘조센징 빠가야로’라고 험한 말을 하더군요. 가게 앞에 있는 골판지 박스를 허락도 안 받고 가져갔다는 게 이유였죠. 사연을 들어보니 그 영감은 제주 4·3 사건을 피해 밀항했던 분이었어요.”
당시 만남으로 골판지를 활용해보자는 아이디어를 얻었다. “우리의 편리를 위해 나무를 잘라 골판지 박스를 만들고 그게 버려지면 가장 취약한 저소득층 할머니·할아버지들이 수레로 모으죠. 환경 훼손과 자본주의 굴종의 문제를 잘 보여주는 소재라고 생각했어요.”
골판지는 심정지 이후 의미가 더 각별해졌다. “제 심장이 새 생명을 얻고 살아났듯이 제 작품도 골판지 박스를 활용해 버려진 걸 다시 살아나게 한다는 의미를 담게 된거죠.”
영남대 서양화과를 졸업한 천 화가는 1982년 박흥순, 이명동 등 동료 화가들과 함께 미술의 사회적 역할과 현실 참여를 강조하는 동인 ‘임술년’을 만들었다. 초기의 대표작은 전두환 정권 당시 ‘졸업정원제’를 비판한 ‘속도절제 30’이다.
1983년 이 작품으로 제10회 경상북도 미술대전에서 최고상인 특별상을 받았다. 엄혹한 시기임에도 사회적 문제를 창의적으로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시기 그린 작품 두 점은 2년 전부터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제 작품이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면서 꿈 하나는 이뤘어요. 이제 소외된 이를 위한 삶을 살아야 할 때에요. 특히 119응급대원을 응원하려 합니다. 제가 심정지로 죽었으면 연락이 두절돼 제 작품이 미술관에 소장되는 일도 없었을 겁니다. 심폐소생술의 중요성과 자동제세동기의 사용법을 알려 더 많은 이들의 생명을 구하는 데 역할을 하고 싶어요.”
주영재 기자 jy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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