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갈등으로 암·신약 연구 '올스톱'…"국제 학계 신뢰도 추락"

이채린 기자,박정연 기자 2024. 6. 13.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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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서울의 한 대학 병원에서 의료진이 걸어가고 있다. 연합뉴스 제공

의대 증원을 둘러싼 의정갈등과 전공의들의 공백이 장기화하면서 국내 암 임상 연구, 신약 개발 연구 등이 사실상 '올스톱'이다. 암 연구에서 세계적인 권위를 인정받는 국내 의학자들도 막대한 타격을 입고 있다.  국제 공동연구가 많은 의과학 분야에서 한국의 학계 신뢰도가 추락하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13일 의과학계에 따르면 수개월째 전공의의 공백을 메꾸고 있는 의대 교수들이 의학 연구에 전혀 시간을 쓰지 못하면서 암이나 신약 개발 연구 경쟁력이 '급전직하'하고 있다. 의정갈등이 시작된 이후 암이나 신약 연구에 필요한 임상 데이터 확보는 커녕 연구 진척조차 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의정갈등이 시작된 이후 국내 주요 의학학술지 논문 투고량도 대폭 줄었다.

문제는 전공의가 병원을 이탈한 뒤 신규 연구에 착수조차 못해 의대 교수 등 연구자들의 연구 활동과 논문 투고 위축은 하반기에 더욱 심화될 것으로 전망된다는 점이다. 국제 공동연구에 참여하는 교수들은 연구에 제대로 기여하지 못해 그동안 국제학계에서 쌓은 한국 의학계의 신뢰도가 저하될 위기다.  

● 주 100시간 근무하는 교수들…"암 연구, 신약 개발 등 임상연구 불가"

의대 교수들은 의정갈등으로 전공의들이 병원을 떠난 이후 '없는 시간도 짜내고 있다'고 토로했다. 양철우 대한내과학회장은 "진료와 수술, 당직 업무에 전부 시간을 쏟아부어야 하는 전쟁 같은 상황에서 연구를 할 시간이 어디 있겠나"며 "세계적인 수준이었던 한국 의학이 한꺼번에 위기를 맞이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전국의과대학교수협의회 조사에 따르면 전공의 공백으로 인한 의료대란이 일어나고 약 3개월이 지난 5월 초 국내 주요병원 교수 70%는 주당 100시간이 넘게 근무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교수들이 연구에 힘을 쏟지 못하면서 우수한 의료기관 인프라를 바탕으로 축적돼왔던 한국의 의학 연구 역량이 한순간에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 이들의 이야기다.

특히 진료 현장에서 이뤄지는 임상 연구는 사실상 중단된 상태다. 국내 환자를 대상으로 데이터를 얻는 연구 활동이 끊기면서 의학 연구의 가시적인 성과로 직결되는 신약 개발이나 중개연구가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김창수 전국의과대학교수협의회 회장은 "한국인을 비롯한 동양인을 대상으로 한 정밀의학 연구는 환자에게 제공되는 의료 질 향상에 직접 도움을 준다"며 "의학 연구 부진이 장기화되면 결국 의료현장에선 지금보다 더 나은 치료 결과를 내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국제 의학계에서의 활동도 위축되고 있다. 해외 연구팀과의 공동연구에 충분한 시간을 할애하지 못하면서 자칫 국제 학계에서의 신뢰도가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서울 소재 의대 교수는 "암 분야의 경우 국제적인 수준의 임상연구를 이끄는 국내 교수들이 많았는데 이번 사태로 연구 활동에 막대한 타격을 입고 있다"고 전했다.

또 다른 서울 소재 의대 교수는 "올해 정부 연구개발(R&D) 투자가 감축된 상황에서도 다행히 보건의료 분야에는 투자가 확대됐지만 지원을 받게 된 사업 중 상당수는 차질을 빚고 있다"고 말했다. 올해 보건의료기술 R&D 예산은 저년 대비 3.7% 증가한 2조2097억원이다.

● 대한의학회지 투고량 반토막…"학술지 운영도 어려워"

대한의학회지(JKMS)의 3~5월 국내저자 논문 투고 수는 전년 동기 대비 50% 가량 줄어들었다. 매주 6건 이상 학술지에 게재됐지만 전체 투고량이 줄어들면서 3건을 게재하는 것조차 힘든 상황이다. 유진홍 JKMS 편집장은 "국내 최대 규모 종합학술지의 책임이 있는 만큼 주 3건 이상 게재는 유지하려 하지만 쉽지 않다"고 말했다.

다른 국내 주요 의학학술지의 상황도 비슷하다. JKMS와 함께 3대 국내의학학술지로 꼽히는 연세의학학술지(YMJ)와 대한내과학회지도 올해 3월부터 5월까지 논문 투고량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각각 28%, 20% 감소했다. 국내 주요 전문학회 학술지 중 하나인 대한이비인후-두경부외과학회지도 지난해 1분기보다 국문학술지 투고수가 72%나 줄었다.

투고되는 논문의 양과 질이 모두 저하되면서 의학 학술지들은 대내외적인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다. 국제 학계에서의 영향력을 평가하는 지표인 인용지수(IF)가 떨어지고 학술지를 운영하기 위한 재정적 문제도 발생하고 있다. 대부분 학술지는 저자부담금 제도를 통해 운영비를 충당하는데 국내 연구 활동이 사실상 개점 휴업 상태에 접어들면서 수입도 끊겼단 이야기다. 

의학 학술지 운영에 비상이 걸리면서 대한의학회도 대처에 나섰다. 26개 산하 전문학회가 발간하는 학술지 논문 투고 수 전수조사를 실시할 계획이다. 최근 열린 내부 회의에선 각 학술지 편집장들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목소리가 이어진 것으로 전해졌다.

● "전문의 중심병원에선 연구활동 힘들어, 회복에 오랜 시간 걸릴 것"

의대 교수들은 이번에 의학 연구계가 입은 타격을 회복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소모될 것이라 입을 모았다. '몸과 마음이 지친' 교수들이 이번 사태가 해소된다고 하더라도 이전처럼 연구에 몰입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간 밀린 연구 활동을 한꺼번에 처리하면서 질적 저하가 우려된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논문 개수 등으로 점수가 매겨지는 교수 평가를 앞두고 부랴부랴 연구를 진행하면서 또 다른 혼란이

빚어질 수 있다는 우려다.

의대 교수들은 또 정부가 의료대란 사태를 극복하기 내놓은 해법 중 하나인 전문의 중심병원이 조성돼도 전공의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의학 연구 현장의 어려움은 계속될 것이라고 꼬집었다. 높은 임금을 책정해야 하는 전문의들은 기본적으로 실적에 대한 압박을 받기 때문에 연구에 투자할 여력이 없다는 것이다.

김창수 교수는 "한국 병원의 수익 구조상으로도 펠로우(전문의)가 현재 전공의의 대체하는 것은 어렵다"며 이같이 말했다. 부산 소재 한 의대 교수 또한 "병원의 의료수익은 그대로인데 전공의보다 임금이 높은 전문의로 교수의 업무량을 대체하려면 대부분 병원은 얼마 못가 도산하게 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의료 대란으로 비롯된 의학 연구 현장을 정상화하기 위해 정부가 현실적인 대책을 신속하게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홍성태 전 대한의학회 간행이사(전 JKMS 편집장)는 "우수한 연구 성과는 연구자가 창발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안정적인 환경이 조성됐을 때 도출될 수 있다"며 "이번에 의학계가 입은 타격이 사태 이전으로 돌아가기 위해선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채린 기자,박정연 기자 rini113@donga.com,hess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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