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브르박물관·엘리제궁의 공간을 재정의한 '폴랑 가구'…어떻게 가능했나? [김기자의 문화이야기]

김문영 2024. 6. 13.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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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더니즘 가구의 아버지' 피에르 폴랑 국내 첫 전시
"퐁피두 대통령, 미국에서 폴랑의 작품을 보고 놀라"
자연에서 영감받은 디자인…"창조 아닌 발견"
루브르 박물관의 드농 윙 공간을 꾸민 피에르 폴랑의 가구 [사진=폴랑]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의 드농 윙 공간을 재정의하고, 공간 인테리어를 맡는 동시에 자신의 가구를 놓은 사람, 바로 피에르 폴랑입니다.

드농 윙의 6번 홀은, 루브르 박물관에 가면 관람객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가 많고 유명한 모나리자의 원작이 전시된 공간이기도 합니다.

가구 디자이너이자 인테리어 디자이너인 피에르 폴랑(1927-2009)은 프랑스의 퐁피두 대통령이 집권할 당시 대통령 관저인 엘리제궁의 1층도 새로 단장했으며 파리 시청의 태피스트리 홀 등을 탄생시킨 '모더니즘의 아버지'로 불리는 거장입니다.

뉴욕 현대 미술관(MoMA), 런던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 등 유수의 미술관과 박물관이 그의 작품들을 앞다퉈 소장했는데요.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 (2017)> [사진=폴랑]


폴랑의 작품은 유명 영화에도 등장해 대중에게 익숙해졌습니다. <스타트렉(1966)>부터 제임스 본드가 등장하는 007 시리즈물, <아이언맨>과 <바비(2023)> 등 수많은 텔레비전 제작물과 영화에서 미래를 나타내는 이상적인 소품으로 사용된 덕입니다.

가구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기에 남다른 위상을 가진 그의 국내 첫 전시가 프리즈 기간인 오는 9월 8일까지 서울 아티스트컴퍼니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피에르 폴랑이 당대에 디자인의 영감을 어디에서 얻었는지, 프랑스에서 언제부터 인정을 받았는지 피에르 폴랑의 아들이자 2009년에 별세한 그를 대신해 브랜드를 이끄는 벤자민 폴랑과의 MBN 일대일 인터뷰를 통해 알아보았습니다.

차 디자이너 삼촌·조각가 삼촌, 영감을 주다

가구 인테리어로 유명세를 떨친 피에르 폴랑(이하 폴랑)이지만, 어릴 적의 폴랑의 꿈은 로댕의 학생이었던 폴랑의 삼촌 프레디 스톨(Freddy Balthazar Stoll)처럼 모든 각도에서 보았을 때도 아름다운 물체를 만드는 조각가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불의의 사고로 인해 오른손 부상을 입은 폴랑은 조각을 그만두어야 했고, 다른 삼촌인 조르주 폴랑(Georges Paulin)을 보면서 자신의 예술혼을 불태웠습니다. 그는 1930년대에 지붕이 통째로 열리는 차를 개발한, 획기적인 차 디자이너였습니다.

푸조-601 C Eclipse 차량 (1934) [사진=푸조]


1930년대에 오픈 루프카 컨셉(Eclipse folding roof system)으로 조르주 폴랑이 새롭게 디자인한 푸조와 벤틀리, 롤스로이스 등의 아름다운 차들은 어린 폴랑에게 큰 예술적인 영감을 주었고, 조르주 폴랑은 수년간 폴랑의 롤모델이 되었습니다.

그런 심미안을 가진 폴랑이 가구 디자인을 시작한 것은 사회의 필요 때문입니다. 2차 세계대전 직후 프랑스에서 다수의 재건 및 신축 사업이 이뤄졌고 규모가 작은 아파트들에 걸맞는 기존의 큰 나무 가구가 아닌 새로운 가구가 필요해졌다는 설명입니다.

프랑스 파리로 간 폴랑은 작은 아파트에서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아름다운 가구를 디자인하는 사업에 뛰어들기로 합니다.

퐁피두 대통령의 눈에 들다…"미국에도 있는데 우리는 몰랐네?"

폴랑은 프랑스의 밖에서 일찍이 가구 디자이너로서 이름을 떨쳤습니다. 오히려 프랑스의 집권자들에게 잘 알려지기까지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뒤늦게 미국에서 폴랑을 발견한 퐁피두 전 대통령은 그의 작품들과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폴랑의 아들 벤자민은 미국 뉴욕으로 여행을 간 퐁피두 전 대통령이 뉴욕현대미술관(MoMA)의 콜렉션에서 폴랑의 작품인 '모델 300'과 '리본체어', '텅그체어' 등이 전시된 것을 본 뒤에야 폴랑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말했습니다.

폴랑의 의자 '리본체어 모델 582(1966)', '텅그체어 모델 577(1967)' [사진=MoMA]


미술관을 둘러본 퐁피두 전 대통령이 "작품 이름도 프랑스어로 되어 있고, 이 미국에서 유명한 프랑스 디자이너는 누구야?"라고 물었고, 프랑스로 돌아와 모빌리에 나시오날 (루이 14세가 세운 왕립 가구관리소의 후신)에서 다시 논의하게 됐단 겁니다.

마침 이 회의를 할 당시에 퐁피두 전 대통령의 아내가 디올의 옷을 착용하고 있었고, 디올의 디렉터가 "디올의 사무실도 모두 피에르 폴랑이 만든 작품들로 가득차 있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데다가, 모빌리에 나시오날의 책임자 장 쿠랄(Jean Coural)의 추천도 듣게 된 퐁피두 대통령은 폴랑과 함께 일을 시작하기로 결심합니다.

피에르 폴랑이 프랑스에서 이름을 크게 널리 알리게 된 것은 이 때부터입니다.

퐁피두 전 대통령은 우선, 나폴레옹과 루이 14세의 가구 등 오래된 가구들을 지켜온 모빌리에 나시오날에서 "프랑스도 더 이상 가구를 지키기만 해서는 안 되며 현대적인 가구들을 생산해낼 수 있어야 한다"며 젊은 디자이너를 키우겠다는 구상을 합니다.

이어 정부의 프로젝트에 폴랑을 투입했습니다. 폴랑에게 루브르 박물관의 드농 윙 디자인을 맡깁니다. 폴랑은 가구를 디자인함과 동시에 대작들이 전시될 벽과 가구 사이의 거리를 계산하고, 구조를 살피며 벽의 색깔 등을 모두 결정하는 중책을 맡습니다.

엘리제궁에서 유일하게 현대적인 1970년대의 실내 디자인이 구현된, 방이 하나의 작품인 '폴랑룸' [사진=엘리제궁]


루브르 박물관에서의 설치 이후 퐁피두 전 대통령은 엘리제궁의 대통령 집무실 내부 디자이너로 폴랑을 선임합니다. 목재를 수출하고 가구는 이탈리아에서 사가던 프랑스에서 '프랑스 디자인'도 사갈 만 하다는 모범 예시가 되게끔 하라는 의도였습니다.

육각형의 프랑스 지형에 대한 헌사의 의미를 담은 미테랑 전 대통령의 집무실 의자 '미테랑'(Fauteuil Mitterrand)' [사진=폴랑]


중책을 연이어 맡은 폴랑은 1980년대에 미테랑 전 대통령과도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사회를 위한 가구 디자인을 연이어 해온 셈입니다.

폴랑은 처음에는 루이 14세 당대의 화풍으로 가구를 색칠하는 전통적인 방법을 연구했지만, 미국과 스칸디나비아의 디자이너들의 디자인에 영향을 받으면서 작은 아파트를 위한 현대적인 디자인을 새롭게 만들어내기에 이른 것으로 전해집니다.

셀럽과의 교류 없이 일에 집중…"창조가 아니라 발견이다"

벤자민 폴랑의 줌 인터뷰 [사진=MBN]

그렇다면 수없이 많은 영화들에 폴랑의 작품이 등장한 이유는 왜일까요? 이는 영화계의 인맥이 없던 폴랑에게 영화계가 보낸 순수한 '러브콜'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아들 벤자민은 "아버지는 영화 업계와 한번도 연결되어 있지 않으셨다"며 "유명인, 또는 셀러브리티(셀럽)와 시간을 보내는 데 전혀 관심이 없었고 매우 열심히 일하고 현대적인 것을 만들어야 한다는 데 몰두하는 분이었다"고 회고했습니다.

기성 가구들의 문제를 해결하고 삶을 향상시키는 해결책을 찾는 데 집중한 폴랑은 영화계 사람들과 교류를 하기보다는 일에 매진했고, 영화계의 사람들이 미래를 나타내기에 그의 디자인이 적합해 보인다는 이유에서 먼저 연락을 하곤 했다는 것입니다.

과거 스탠리 큐브릭의 SF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를 제작할 당시에 제작진이 폴랑의 가구를 영화의 소품으로 쓰기 위해 프랑스로 갔지만, 폴랑과 만날 방법을 몰라서 유사한 가구라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일화가 대표적입니다.

폴랑은 스스로를 예술가, 또는 아티스트로서 지칭하지 않았고 "모든 것이 저기(자연)에 있고,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을 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폭발적인 한국의 문화 성장, 폴랑도 그 일부가 되길"

국내 첫 폴랑 전시를 기획한 벤자민은 세계 3대 아트페어인 '프리즈 서울' 기간에 한국을 방문해 좋은 에너지를 받았고, 폭발적으로 성장한 한국의 문화 속에서 폴랑의 작품도 한 부분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폴랑 스스로가 1960-1970년대부터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여러 디자인의 영향을 받기도 했고, 이제는 한국에 폴랑의 디자인을 보여주며 교류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듄과 다다미 모듈(1968-1972)'을 설명하는 아투(Artue) 송보영 대표 [사진=MBN]


실제로 폴랑은 88올림픽 이전인 1987년에 아내, 자식과 함께 한국에 온 바가 있는데요. 아시아 국가의 바닥 문화가 특히 폴랑에게 큰 영감을 줬고, 이는 미국의 허먼 밀러 회사와 함께 한 피에르 폴랑 프로그램(1968-1972)으로까지 이어지게 됐습니다.

아시아의 영향을 받아 제작했지만, 1970년대 초 석유파동으로 폐기되었다가 2014년에 처음으로 개발하게 된 '듄과 다다미 모듈(1968-1972)' 역시 국내 전시장에서 이번에 선보여지고 있고 관람객들은 이 가구들에 앉으면서 직접 체험할 수 있습니다.

"더 싸게, 더 크게, 원치 않아"…의논할 만한 '작품' 추구

인터뷰하는 배우 이정재 [사진=MBN]

폴랑의 작품에 관심을 가진 배우 이정재가 직접 소개에 나서면서 더 화제를 모은 폴랑의 전시는 9월 8일까지 서울 아티스트컴퍼니에서 열리며 예약제로 운영됩니다.

폴랑 재단(Paulin, Paulin, Paulin)을 운영하는 벤자민의 꿈은 무엇일까요? 그는 대형 회사가 되어 여러 가구를 만드는 것이 아닌, 가장 좋은 콜렉션을 그 가치를 알아보는 좋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피에르 폴랑의 유산을 나누는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산업으로 발전하려면 더 싸게 만들고, 최대한 크게 만들어야 하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다"며 "현대성, 창조, 디자인 등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과 의논할 만한 작품들을 계속 만들어내고 미술관, 갤러리들과 함께 하고 싶다"고 밝혔습니다.

프랑스에서 한국을 말할 때 먼저 언급되는 화가 중의 한 명인 이우환의 작품과 떠오르는 신예인 이희준의 작품을 함께 전시장에서 선보이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언젠가는 프랑스 파리의 집을 복제해, 서울에서도 가구를 체험할 뿐 아니라 음악을 들려주고, 저녁을 나눠 먹으면서 피에르 폴랑의 사는 방식을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폴랑의 꿈이 현실화될지 궁금해집니다.

[ 김문영 기자 kim.moonyoung@mbn.co.kr ]

※ 참고
전시: ~9월 8일, 월~금요일 오후 1~5시
이메일 전시 관람 예약(무료): rendezvous@paulinpaulinpaulin.com
디지털 뷰잉: 디지털 아트 플랫폼 ‘아투(@artue.io)’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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