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미팝'에서 보는 케이팝의 미래
아이즈 ize 김성대(대중음악 평론가)
23년 전 열혈 H.O.T. 팬들이 문희준의 집 앞에서 그의 생일 파티를 준비하는 걸 영상으로 본 적이 있다. 5단 대형 케이크와 각종 선물들을 앞세운, 거의 집회에 가까운 함성과 운집 규모에 경찰까지 출동한 당시 상황은 동시대를 산 나로서도 어안이 벙벙한 풍경이었다. 하지만 영원한 건 없다. 40대 후반에 접어든 문희준은 더 이상 그 시절의 아이돌이 아니고, 그를 우러러본 팬들도 이젠 최소 30대 후반에 접어든 예비 중년층이다. 아이돌의 전성기 인기란 그런 것이다. 타오를 땐 세상을 집어삼킬 듯 맹렬하다가도, 사그라질 땐 콧김에도 흩어지는 재와 같은 것. 결국 케이팝 1세대 아이돌 문희준은 한국 대중음악사에 큰 족적을 남기지 못했다. 아티스트로서 그의 가치는 영상 속 팬들의 함성에 비례하진 못했다는 얘기다. 아이돌의 인기는 공허하다.
평소 나는 노력을 통해서든 재능에서든 자신의 곡을 스스로 만들거나, 자기 음악을 직접 디자인(프로듀싱) 하는 아이돌 내지는 아이돌 출신들에 관심을 가져왔다. 모든 아이돌 스타들이 그럴 필요는 없지만(또 그럴 수도 없지만), 타인의 기획과 음악에 퍼포먼스만 더하는 사람들과 저들이 따로 평가되어야 하는 건 이치 상 맞다. 이른바 '자작돌'들은 단순 퍼포머들보다 늘 플러스알파의 역할을 어떤 식으로든 더 해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생산적 역할은 케이팝의 미래를 생각할 때 특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장르와 시대, 국경을 넘어 훗날 아이콘 및 거장으로 인정받는 음악가들은 창작자로서든 제작자로서든 모두 빼어난 '내 것'을 펼쳐낸 이들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데스티니스 차일드보다 비욘세를, 테이크 댓이라는 이름보다 로비 윌리암스를 더 기억하는 건 그래서다. 그러니까 무려 영문 국가명의 이니셜을 붙인 케이팝의 미래는 저들, 즉 남들과 다른 자신의 것을 찾으려 고군분투하는 아이돌 크리에이터들에 달려 있다고 나는 믿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잘 나갈 때 손익을 따져야 하는 아이돌의 질주 대신, 자기 예술을 꾸준히 고민하는 쪽을 택한 원더걸스 출신 싱어송라이터 선미의 행보를 주목하고 싶다. 2010년, "기계적으로 무대에 서는 게 행복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원더걸스 활동을 중단한 그는 3년 7개월 만에 솔로로 데뷔했다. 선미의 시작은 '모'라는 한 글자로 3일 간 녹음을 진행했다는 박진영의 완벽주의가 드리운 '24시간이 모자라'와 뱀파이어 콘셉트를 응용해 솔로 데뷔 첫 음악방송 1위에 오른 용감한 형제의 '보름달'이 장식했다. 하지만 박진영과 용감한 형제라는 조력자들은 데뷔 초 흥행에는 도움을 주었을지언정, 이후 펼쳐질 선미의 팔색조 콘셉트에는 깊이 관여할 수 없었다. 선미의 음악 세계는 오직 선미 본인에게 달린 것이었다.
선미만 아는 선미의 세계는 작사에 참여하기 시작한 '가시나'부터 비로소 고개를 들었다. 2018년 새해 벽두에 내놓은 싱글 '주인공'에서도 그는 자기가 부를 노랫말에 본인 생각을 첨부했다('주인공'이 전제한 "'가시나'의 프리퀄"이라는 콘셉트도 선미의 아이디어였다.) 아티스트 선미의 홀로서기는 앨범 'WARNING'에서 모든 곡의 크레디트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며 정점을 찍는다. '날라리'를 통해 은유적으로 밝힌 '내 것'을 보여줄 수 있는 능력을 마침내 증명해 낸 순간이다. 타인의 관심에 중독된 SNS의 병폐를 다룬 뮤직비디오가 인상적이었던 '누아르'와 시티팝을 표방한 '보랏빛 밤', 낯선 이와 나누는 사랑의 감정을 포착한 근작 'STRANGER'까지, 선미는 그렇게 미래의 세계적 아이콘과 거장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최소 조건을 차곡차곡 쌓아왔다.
얼마 전 애플뮤직이 자사의 스트리밍 횟수와 관계없이 선정한 '베스트 앨범 100선'을 발표했다. 이 리스트에서 1위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솔/알앤비/힙합 뮤지션인 로린 힐의 'The Miseducation of Lauryn Hill'이 차지했다. 그것은 마이클 잭슨, 비욘세, 스티비 원더, 비틀스, 너바나, 프랭크 오션, 켄드릭 라마 등 쟁쟁한 이름들을 제치고 올라선, 당사자로서도 당황스럽고 영광스러울 고지였다. 로린 힐의 이번 순위는 분명 바뀐 시대의 인종, 젠더, 작품성 모두를 반영한 선택으로 보였는데, 일부 사람들은 재미로 뽑는 리스트를 심각하게 볼 필요가 없다고도 했다. 하지만 과연 애플뮤직 전문가 팀과 찰리 XCX, 퍼렐 윌리엄스 등 엄선된 아티스트, 작곡가, 프로듀서 같은 업계 전문가들이 그토록 긴 시간을 들여 '재미'로 저 리스트를 뽑았을지는 의문이다. 어차피 저들 역시 '모두의 만족'이라는 불가능한 결과쯤은 알고 시작했을 테지만 적어도 선정위원 개개인의 논거 제시와 숙고 끝에 나온 후보들일 테고, 치열한 갑론을박을 통해 결정된 최종 리스트였을 것이다. 애플뮤직 '베스트 앨범 100선'은 대중음악계의 새 시대를 제시한 꽤 의미 있는 리스트였다.
리스트에 오른 앨범 100장 중 가장 많은 숫자(23장)를 기록한 90년대의 대표 명반인 로린 힐의 작품은 사실 본인의 유일한 솔로작이다. 그리고 그는 히든 트랙을 포함한 열여섯 트랙들에서 단 네 트랙을 뺀 모든 곡들을 홀로 썼다(그나마 네 곡 중에도 세 곡엔 힐의 이름이 들어가 있다.) 이는 무얼 말하는가. 결국 대중음악의 앨범 역사엔 '자신의 음악'을 들려준 사람이 남는다는 얘기다. 세계 팬덤이 힘을 합쳐 끌어올려주는 빌보드 차트 1위보다 10년, 20년 뒤 테일러 스위프트(올해로 데뷔 18년 차인 테일러는 해당 리스트에서 '1989 (Taylor's Version)'으로 18위를 차지했다) 같은 세계적인 음악가들과 또 다른 '명반 리스트'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 아마도 케이팝의 진정한 예술적 성취는 거기에서 가늠될 것이다. 더 많은 '선미팝'들이 등장하고 달려 나갈 수 있는 대중적 기반이 조성, 유지되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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