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을 든 할망들…80년 세월 물감으로 ‘슥슥’ [플랫]
구부정한 몸이 하얀 도화지 앞에 앉았다. 주름진 손이 도화지 위를 스치며 서걱이는 소리를 낸다. 목탄으로 흘린 선들은 이내 아카시아 나무가 되었다. 초록으로 물들인 나뭇가지 위에 연분홍빛 물감을 입히는 눈빛이 사뭇 진지하다.
“태풍에 부러지카 부댄 그림으로 바타준거주(태풍에 부러진 나무를 그림으로 받쳐준 거죠)”
올해 여든다섯의 김인자 할망(할머니)이 연필을 들고 자신의 마음을 또박또박 눌러쓴다. 세 시간을 꼼짝 않고 그린 그림이 완성되는 순간이다.
지난달 27일 제주 조천읍 선흘마을. 네 명의 할망들이 ‘그림 선생’ 집에 모였다. 옹기종기 모여 앉아 저마다 사는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우다 선생이 “삼춘(남녀 구분 없이 동료나 이웃을 친근하게 부르는 제주 방언) 우리 이제 그림 그려볼까?” 하며 웃음 짓자 약속이나 한 듯 이젤(그림을 그릴 때 그림판을 놓는 틀)을 펼쳤다.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는 할망들의 그림 수업은 이곳에선 익숙한 풍경이다.
할망들과 그림 선생인 최소연 작가의 인연은 2021년 봄에 시작됐다. 최 작가는 대안학교인 볍씨학교 그림 수업을 위해 학생들과 함께 홍태옥 할망 집을 찾았다. 수업 중 마당에 놓인 이젤 위 목탄을 보며 “무시건(이게 뭐야)?” 하고 묻는 할망에게 “나뭇가지를 태워 만든 그림 그리는 도구에요”라고 답했다. 최 작가를 흘끔 바라보던 홍 할망은 “나도 기리보까” 하며 목탄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허공에 이리저리 손을 저어보다 미끌어지듯 백지 위로 들어갔다. 마법 같은 순간이었다. 이후 최 작가는 할망들의 그림 선생이 되었다. 현재 ‘할머니의 그림수업’이라는 이름의 그림 수업은 12명의 선흘마을 할망들과 함께 네 번째 해를 보내고 있다.
평균나이 여든일곱. 일제 강점기에 태어난 이들은 제주라는 ‘광야’에서 질곡 진 근현대사의 광풍을 온몸으로 버티며 살았다. 4·3 등 험난한 세월을 지내느라 글을 배우지 못해 마음 속에 접어두어야만 했던 생각들은 이제 그림이 되어 세상의 빛을 보고 있다. 그림에 흠뻑 빠진 할망들의 집 곳곳에는 그간 그린 그림들이 흩어져 있다. 평생을 참아온, 선과 물감으로 쓴 일기다.
이날 그림 수업이 끝난 뒤 오가자 할망은 집으로 돌아가 빛바랜 엄마 사진을 꺼냈다. 할망은 2년 전에 그린 그림 <엄마한테 보내는 그림, 보리콩>에 이렇게 썼다.
엄마 보고 싶다
엄마는 나 보고 싶지 않아
엄마 나 머하고 있는지 알아
어제 저녁에 보리콩
올 안에 시월딸에(울타리 안에 시월달에) 심은 거
따서 삶아 먹었읍니다
껍질 속에 알맹이 다섯 개
까 먹었습니다
여러개 까 먹고
나는 엄마 생각하면서 눈물이 납니다
2022 5월 이십날 오가자
80년 넘게 묵힌 마음에서 길어 올린 문장들은 투박하지만 묵직한 울림을 준다. 최소연 작가는 “할머니들과의 작업은 수업이라기보다는 그림 그리는 인류와 만나는 느낌이라 늘 반가워요. 그림은 기록이자 오늘과 순간을 사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서로 사담을 나누다가도 그림에 몰입하는 순간 변하는 할머니의 눈빛을 보며 경외감을 느낍니다.”라고 말했다.
“종이가 경(여기) 있으니까 호끔 기렸지(그렸지)” 라고 말하는 할망들과 “할머니라는 인류에게 그림을 가르치는 것이 이 삶의 마지막 임무”라는 그림 선생. 두 번의 전시를 치르는 동안 서로의 눈만 봐도 척척 통하는 사이가 됐다. 선흘마을에 뿌리내린 ‘그림 인류’의 다음 전시는 올 하반기로 계획돼 있다.
▼ 사진·글 성동훈 기자 zenism@khan.kr
플랫팀 기자 fla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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