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벨리온에 흡수되는 사피온의 '황당한' 채용 논란

최연진 2024. 6. 13.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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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정보기술(IT) 업체에 다니던 A씨는 인공지능(AI) 반도체를 만드는 신생기업(스타트업) 리벨리온과 사피온을 비롯해 여러 업체에서 이직 제안을 받았다. 그중 사피온을 선택한 그는 지난주 조건 협상을 마치고 회사를 그만뒀다.

그런데 출근을 준비하던 그는 불과 며칠 뒤인 12일 갑자기 사피온으로부터 황당한 연락을 받았다. 리벨리온과의 합병 통보였다. 외부인들과 마찬가지로 발표 당일 연락을 받은 것이다. 하루아침에 장래가 불투명해진 그는 불안하고 화가 났다. 다른 회사로 옮길 기회마저 빼앗겼기 때문이다. 그는 "합병으로 사라지는 회사가 왜 채용했는지 모르겠다"며 "합병 사실도 미리 알려주지 않고 발표 당일에 연락받았다"고 토로했다.

이런 경우는 비단 A씨만이 아니다. 사피온은 합병 발표 직전까지 면접과 조건 협상 등 채용을 진행하다가 당일 모든 채용 절차를 중단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이유는 사피온의 C레벨급 최고경영진 대부분이 발표 당일까지 합병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다. 류수정 사피온 대표는 이날 사직서를 제출했다.

반도체 스타트업 리벨리온을 공동창업한 김효은(왼쪽부터) 제품총괄, 박성현 대표, 오진욱 기술총괄. 한국일보 자료사진

리벨리온의 사피온 흡수, 수개월 논의

13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리벨리온과 사피온 합병은 올해 들어 여러 달 동안 논의됐다. 합병 논의는 리벨리온과 사피온 지분 약 63%를 갖고 있는 최대 주주 SK텔레콤 사이에 은밀하게 진행됐으며 사피온의 류 대표조차 뒤늦게 알게 됐다. 논의 과정에서 사피온이 배제된 것은 양 사 합병 추진으로 발표됐지만 실상은 리벨리온의 사피온 흡수이기 때문이다.

합병은 현금이 아닌 양 사의 지분 교환으로 이뤄진다. 이렇게 되면 리벨리온이 사피온을 흡수하는 형태인 만큼 합병 비율 조정 과정에서 사피온의 주식이 리벨리온 주식보다 낮게 평가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리벨리온 1주당 사피온 여러 주를 교환하는 식으로 조정될 수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리벨리온에 투자한 KT와 사피온에 투자한 SK텔레콤 등 전략적 투자자들의 합병회사 지분율도 합병 비율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 그만큼 합병회사에서는 리벨리온의 전략적 투자자인 KT가 유리할 수 있다.

합병 비율은 실사를 거치며 조정해야 한다. 아직 리벨리온은 사피온 실사를 시작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서둘러 합병을 발표한 것은 "사전에 합병 관련해서 잘못된 소식이 퍼지면 직원 동요 등 혼란이 일어날까 봐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양 사 합병의 파장이 크다는 소리다.

실사는 여러 달에 걸쳐 진행되며 이 과정에서 조건이 맞지 않으면 합병이 무산될 수 있다. 따라서 관계자는 "빠르면 연말에 합병이 이뤄질 것"이라고 전했다.


리벨리온 사명 유지, 사피온 직원 이탈 가능성

합병회사는 박성현 리벨리온 대표가 합병사 대표를 맡는 등 리벨리온 경영진이 이끌게 된다. 사명도 리벨리온이 들어갈 가능성이 높다. 이유는 사피온과 달리 리벨리온은 미국 IBM 등과 자체 개발한 AI 반도체 '아톰'의 공급을 전제로 뉴욕의 IBM 데이터센터에서 실증 사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명이 완전히 바뀌면 IBM 등과 계약할 때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사피온 직원들의 고용 승계는 가급적 유지할 방침이지만 급여나 복지는 달라질 수 있다. 사피온의 급여와 복지제도는 SK그룹의 계열사 수준이어서 리벨리온이 부럽게 생각할 정도다. 관계자에 따르면 이번 양 사 합병이 경영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경영 효율화가 아니라 세계적인 반도체 기업들과 경쟁하기 위해 덩치를 키우는 스케일 업이 목적이어서 고용 승계를 대부분 하겠지만 처우는 다른 얘기라는 것이다. "한 회사에서 출신에 따라 월급과 복지를 다르게 적용할 수는 없는 일"이라는 의견이다.

이렇게 되면 SK텔레콤에서 넘어온 사피온 직원들은 이탈 가능성이 높다. 사피온은 2016년 SK텔레콤의 개발조직으로 출발해 분사했다. 이 과정에서 사피온으로 옮긴 SK텔레콤 직원들은 본인 선택에 따라 원대 복귀를 보장받았다. 만약 합병회사의 조건이나 전망 등에 대한 생각이 다르면 SK텔레콤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다.

리벨리온이 개발한 AI 반도체 아톰과 이를 장착한 회로 기판들. 아톰은 IBM, 구글, 아마존 등 클라우드 데이터센터를 이용해 AI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체들을 위해 개발됐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속도와 비용' 합병에 대한 기대 효과

리벨리온이 합병을 통해 기대하는 것은 규모의 경제다. AI 반도체는 많은 개발자를 동원해 빠르게 제품을 만들 수 있는 속도전에서 이겨야 성공할 수 있다.

현재 IBM 왓슨연구소 출신의 오진욱 박사가 개발을 이끄는 리벨리온은 '이온'과 아톰 등 두 가지 AI 반도체를 개발했다. 이온은 금융기술(핀테크)에 특화됐고, 아톰은 클라우드용으로 개발된 AI 반도체다. 이 가운데 아톰은 IBM을 비롯해 구글, 아마존 등과 공급이 논의되고 있다. 세 번째 AI 반도체는 올해 말 나올 예정인 '리벨'이다. 리벨은 오픈AI의 'GPT'나 구글의 '제미나이' 등 거대언어모델(LLM)을 위한 AI 반도체다. 사피온은 2020년 데이터센터용 AI 반도체 'X330'을 개발했다.

따라서 리벨리온은 합병을 통해 아톰과 리벨의 성능 개선 및 출시 속도를 당길 수 있는 개발력을 확대할 수 있다. 또 KT뿐 아니라 SK텔레콤이 주주로 들어오면서 SK하이닉스의 반도체 생산능력까지 기대할 수 있다. 다만 리벨의 개발과 생산을 삼성전자와 진행하는 만큼 이 부분은 변수가 될 수 있다.

반면 SK텔레콤은 합병을 통해 AI 반도체 개발에 들어가는 막대한 비용을 줄이면서 기술력을 확보할 수 있다. 업계 관계자는 "지금까지 리벨리온은 2,800억 원, 사피온은 1,400억 원을 투자받았다"며 “SK텔레콤 입장에서 사피온 투자에 부담을 느꼈을 텐데 합병으로 이런 부담을 덜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최연진 IT전문기자 wolfpac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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