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빛 절경 품은 산봉우리, 옛이야기 간직한 섬들… 놀러왔다 눌러앉고 싶은 곳[박경일기자의 여행]

박경일 기자 2024. 6. 13.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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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경일기자의 여행 - 사람도 풍경도 아름다운 전남 고흥
여행객이 꼽은 ‘살고 싶은 곳’
텃세없고 외지인에게도 호의적
갯벌체험 등 ‘촌캉스’로도 딱
이순신 첫 근무지 ‘무인의 고장’
‘고흥서 힘자랑 말라’는 얘기도
프로레슬러 김일체육관도 명소
고흥10경 중 제1경 ‘팔영산’
등지느러미 같은 여덟개 암봉
능선 오르면 바다경관 펼쳐져
알려지지 않은 명승 ‘금강죽봉’
아찔한 주상절리 벼랑에 탄성
추락 위험에 현재는 출입통제
고흥의 진산(鎭山)인 팔영산 제7봉 칠성봉 정상 능선에 올라서서 지나쳐 온 봉우리를 뒤돌아봤다. 발을 딛고 있는 곳이 제7봉인 칠성봉이고, 왼쪽의 봉긋한 암봉이 제6봉인 두류봉, 오른쪽 저 아래가 제5봉인 오로봉이다.

고흥 = 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parking@munhwa.com

대체로, 살기 좋은 곳이 여행하기도 좋은 법이다. 말의 앞뒤를 뒤집어보자. 여행하기 좋은 곳이, 살기도 좋다. 전국을 두루 여행 다녀본 주변 사람들에게 ‘살고 싶은 곳’을 물어보면 ‘전남 고흥’이란 답이 빠지지 않는다. ‘십중팔구’까지는 아니지만, 고흥에 가봤던 이들이라면 ‘십중오육’을 넘겨다 볼 정도는 되는 듯하다. 삶의 방식을 전폭적으로 바꾸겠다며 제주로 옮겨간 이들이, 여객선을 타고 육지 나들이 나왔다가 알게 된 고흥으로 재(再)이주한 사례는 알고 있는 것만 여럿이다. 두 번 이사해 고흥에 정착한 이들의 얘기는 한결같다. 살아보니 ‘고흥이 제주보다 낫다’는 것. 그렇다면 과연 고흥의 어떤 매력이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걸까.

# 고흥이 살기 좋은 이유

먼저 전남 고흥이 가진 것들을 꼽아보자. 고흥에는 쪽빛 바다가 있고, 그 바다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근사한 산이 있다. 드넓은 방조제와 호수가 있으며, 수직의 편백 숲과 진초록 비자나무 숲도 있다. 가슴 아픈 역사가 깃든 섬(소록도)이 있는가 하면, 미술관이 된 섬(연홍도)도 있고, 근사한 정원이 된 섬(쑥섬)도 있다. 제철 해산물도 풍성하고, 그걸 잘 차려 내는 맛집도 많다. 시골이니까, 아무리 이름난 맛집이라도 도시처럼 그 앞에 긴 줄을 서지 않아도 되는 건 물론이다.

고흥의 풍경이나 음식만큼이나 매력적인 건, 거기 사는 사람들의 기질이다. 고흥을 흔히 ‘무인(武人)의 고장’이라 부른다. 거슬러 올라가면 그 끝에 이순신 장군이 있다. 이순신 장군의 수군 초임지, 그러니까 서른여섯의 나이에 수군으로 처음 근무한 곳이 바로 여기 고흥의 발포다. 임진왜란의 와중에 고흥 출신의 수군 장수들은 이순신 장군과 함께 죽음을 무릅쓰고 선봉에 섰다.

스포츠에서 유독 고흥 출신이 두각을 드러내는 이유를 이런 선 굵은 고흥사람들의 기질에서 찾는 이들도 있다. 고흥 출신 스포츠 스타는 두 손으로도 다 못 꼽는다. 우선 전설적인 레슬링 선수 김일이 고흥 거금도 출신이고, 권투선수 유제두도, 백인철도, 황준석도 고흥 출신이다. 격투 스포츠 외에 축구선수 장외룡과 김태용, 골키퍼 김영광, 배구 국가대표 류중탁과 신진식도 고흥이 고향이다.

‘여수에서 돈 자랑, 순천에서 인물 자랑, 벌교에서 주먹 자랑하지 말라’는 이야기 뒤끝에 ‘별도 버전’쯤으로 구전되는 ‘고흥 가서 힘자랑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고흥이 예로부터 씨름으로 유명해서다. 지금 씨름판에서 고흥의 위세가 예전 같지 않은 건, 씨름 방식 때문이다. 과거 고흥의 씨름은 호남의 씨름과 마찬가지로 샅바를 오른쪽에 매는 오른씨름이었다. 전국 씨름판이 샅바를 반대로 매는 왼씨름으로 통일되면서, 다들 알아주던 고흥 씨름의 명성은 이제 옛 얘기가 되고 말았다.

고흥에서 촌캉스를 즐긴 외국인 일행. 왼쪽부터 비즈니스커뮤니케이터 일을 하는 한국인 이루다, 브라질 유학생 밀레나 콰레스마, 포르투갈 유학생 레이라 고메즈, 유럽농축산물 프로모터 대만인 사라 랴오, 스페인 출신 웹디자이너 라퀠 페르난데즈 루이스, 포르투갈 출신의 모델 겸 유튜버 마리아 이네스 마두레이라.

# 고흥이 여행하기 좋은 이유

‘무인기질’이라니까 성정이 투박하고 거칠 것 같은데, 체감으로는 정반대다. 고흥사람들은 따스하고 순박하다. 남도에서도 가장 인심이 후한 편이고, 외지인들에게도 호의적이다. 이게 주관적인 느낌이 아니라는 건, 통계로도 확인된다.

고흥군이 2020년부터 지난 3년 동안 도시지역에서 고흥으로 이주해 온 1206가구, 1504명에게 물었다. 이주 후 가장 만족한 것은? 가장 많이 나온 대답이 ‘이웃 관계’였다. 고흥에서 새로 만난 이웃과의 관계가 만족스럽다는 비율이 51.5%로, 불만족스럽다는 비율 9.6%를 압도했다. 시골로 이주한 도시민들이 가장 큰 스트레스로 드는 게 ‘지역 주민들의 선입견과 텃세’라는 점에서 뜻밖의 결과다. 두 번째로 만족도가 높은 건 ‘건강한 생활’이었고, 세 번째는 ‘주거환경’이었다. 이 정도면 도시민들이 꿈꾸는 시골살이의 기본적 조건은 갖춰진 게 아닐까. 이로써 ‘고흥이 살기 좋다’는 건 확인된 셈이다. 그렇다면 앞서 했던 말을 다시 꺼내본다. ‘살기 좋은 곳은, 여행하기도 좋다.’

고흥에서 이른바 ‘촌캉스’를 즐기러 온 외국인들을 만났다. 촌캉스란 시골을 의미하는 ‘촌(村)’과 프랑스어로 휴가를 뜻하는 ‘바캉스(Vacance)’의 합성어. ‘시골에서 보내는 휴가’를 말한다. 직장인으로, 교환학생으로, 대사관 직원으로 한국에 와서 서울에서 거주하고 있는 브라질, 대만, 스페인, 포르투갈, 대만 국적의 외국인 여성들이 의기투합해 휴가차 고흥의 시골을 찾은 것이다.

이들은 휴가 기간에 고흥의 분청문화박물관에서 도자기 빚기 체험을 하며 작가들과 소통하고, 유자마을에서 유자 쌀강정 만들기와 햇잎 차 덖기, 갯벌체험 등 다채로운 농촌 프로그램을 즐겼다. 녹동항 한 횟집에서 생선회와 산낙지를 주문하고는, 능숙하게 소주병을 따는 외국인들의 만찬에 우연히 슬쩍 끼어들 수 있었다. 한국 사람보다 한국을 더 즐겁게 누리는 여행이었다. 이들은 고흥의 매력으로 ‘산과 바다가 조화를 이룬 경관’을 들었다. 농촌의 전원적인 삶과 한국인 특유의 정감도 인상 깊었다고 했다.

# 고흥의 산에서는, 바다도 본다

외국인 여행자들이 첫손으로 꼽은 고흥의 매력은 ‘산과 바다’다. 고흥으로 이주해 온 도시 사람들이 고흥을 택한 이유를 묻는 질문에, 혈연과 지연의 이유를 빼고 나면 ‘다른 지역보다 자연환경이 좋아서’란 답이 가장 많았다. ‘대체 자연과 경관이 얼마나 좋길래?’란 의문이 생긴다면, 고흥의 산에 올라보는 걸 추천한다. 산에 오르면 고흥의 산과 바다를 다 볼 수 있다.

고흥에는 근사한 산이 많다. 바다가 가까운 남도의 산들은 웬만한 높이만 있다면 ‘눈맛’ 때문에라도 후한 평가를 받는 법. 그런데 고흥의 산이 훌륭한 건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산에서 보는 경관도 훌륭하지만, 기이한 산세의 아름다움도 못지않다.

고흥에는 기암괴석의 마복산, 바다 조망이 빼어난 천등산, 삼나무 숲으로 둘러친 봉래산이 있는데, 압권은 단연 팔영산이다. ‘고흥 10경(景)’의 제1경이 팔영산이니, 더 말해 무엇할까. 팔영산은 팔전산(八田山), 팔령산(八靈山), 팔점산(八点山)으로도 불렸다. 산 이름에서 ‘팔(八)’ 자가 빠지지 않는 건 산정상에 여덟 개 봉우리, 그러니까 ‘팔봉(八峯)’이 주르륵 늘어서 있어서다.

팔영산에서는 안과 밖의 풍경이 다 좋다. 등지느러미 같은 팔영산의 여덟 개 암봉의 산세도 훌륭하고, 팔봉의 능선에 올라서 내려다보는 바다 경관도 탄성이 나온다. 봉우리 여덟 개를 다 찍고 내려와야 하는 만큼 산행에 적잖은 노고가 들지만, 내내 펼쳐지는 풍경은 노고에 대한 보답을 하고도 한참 남는다. 일단 능선까지만 올라선다면, 봉우리 하나하나를 넘을 때마다 펼쳐질 경관에 대한 기대로 몸이 저절로 앞으로 나아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산 아래 절집 능가사에서 출발해 첫 번째 봉우리인 유영봉까지는 제법 길고 가파른 구간을 올라야 하지만, 그 뒤부터는 풍경이 발걸음을 이끈다. 속도만 내지 않는다면 그리 어렵지 않으니 시간에 쫓기지 않도록 산행을 일찍 시작하는 게 좋겠다.

국가유산청이 지정한 명승인 고흥 지죽도 금강죽봉의 아찔한 주상절리 벼랑. 바다와 잇닿은 태산의 남사면이 온통 이런 주상절리다.

# 아직도 ‘발견되지 않은 곳’이 있다

한반도 남쪽 끝인 고흥은 멀다. 기차도 없으니 차를 타고 가야 하는데, 쉬지 않고 꼬박 다섯 시간을 넘게 운전해야 갈 수 있다. 유튜브와 SNS로 대한민국의 명소란 명소는 남김없이 샅샅이 수색되는 시대에, 고흥에는 ‘아직도 발견되지 않은 곳’이 남아 있다.

지난 2021년 6월 9일. 국가유산청(당시 문화재청)은 고흥의 ‘금강죽봉’을 대한민국 명승으로 지정했다. 명승이란 자연경관이 뛰어나거나 역사·문화·경관적 가치가 높은 경승지를 말한다. 그래서 명승으로 지정되는 곳은 대개 기왕에 이름난 명소들이다. 경관이 빼어나다는 건 부인할 수 없지만, 풍경의 구성이나 역사적 배경이 서로 엇비슷하다. 그런데, 금강죽봉이야말로 금시초문이었다.

금강죽봉은 고흥 최남단 섬 지죽도에 있다. 20년 전쯤 연륙교가 놓인 섬이지만 지죽도는, 그동안 관광객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은 곳이다. 연륙교를 건너 지죽도로 들어서면 마을 뒤쪽으로 M자 형상의 산이 있다. 산 이름 한번 거창해서 ‘태산(太山)’이다. 지죽도가 손바닥만 한 섬으로 있을 때는 그러려니 했을 테지만, 연륙교가 놓여 육지나 다름없어진 지금 해발고도 203m 높이의 산을 태산이라 부르는 게 민망한 일이라 생각했다. 입이 딱 벌어지는 금강죽봉의 압도적인 규모감을 경험하기 전에는 그랬다는 얘기다.

금강죽봉은 태산의 남쪽 바깥 사면, 그러니까 바다를 끼고 있는 암벽 일대를 말한다. 봉우리라기보다는 까마득한 높이의 주상절리가 마치 대나무처럼 군집을 이뤄 형성된 거대한 암벽이다. 산 한쪽 사면을 다 뒤덮은 바위의 규모감도 규모감이지만, 주상절리가 만든 아찔한 벼랑의 고도감이 특히 압도적이다. 같은 주상절리지만, 금강죽봉 주상절리는 제주나 광주 무등산, 강원 철원 등에서 본 것과는 사뭇 다르다. 국내 주상절리 대부분이 현무암이라 어두운색을 띠는데, 금강죽봉의 주상절리는 기반이 응회암이라 밝은색을 띤다. 바위가 이국적이고 더 도드라져 보이는 느낌이 드는 건 그래서다.

# 탄성의 풍경이 명승이 되기까지

궁금했던 건 금강죽봉이 명승으로 지정되기까지의 과정이었다. 마을을 등지고 아찔한 벼랑 뒤에 꼭꼭 숨어 있던 금강죽봉을 어떻게 찾아냈을까. 그 이야기의 맨 앞에는 전국 구석구석을 걷는 도보답사가이자 ‘사단법인 우리땅걷기’의 신정일 이사장이 있다. 금강죽봉이 거기 있다는 거야 진작 지죽도 주민들이 알고 있었던 사실. 그러나 그 경관적 가치를 몰라봤을 때, 금강죽봉을 가보고 그 경관에 놀란 신 이사장이 고흥군청의 김일동 학예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른 설명 없이 그저 ‘한번 가보시라’고 전한 게 시작이었다. 그게 2020년 추석 무렵의 일이었다.

곧바로 금강죽봉에 가 본 김 학예사는 압도적인 절경에 깜짝 놀라 곧바로 명승 지정신청 작업을 시작했다. 그게 소문이 나면서 그해 10월 문화재위원회 심의위원들이 고흥으로 내려와 현장조사를 했다. 고흥을 방문한 심의위원들도 금강죽봉 앞에서 입을 딱 벌렸으니, 2021년 3월 명승지정 신청과 그해 6월 명승지정까지는 일사천리였다. 여기까지가 보물 여섯에 천연기념물 두 개가 전부인 고흥의 국가유산 목록에, 금강죽봉을 명승으로 당당히 올리게 된 이야기다.

아쉬운 건 금강죽봉이 명승으로 지정됐음에도 가볼 수 없다는 것이다. 다도해 국립공원사무소와 마을에서 엄격하게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어렵게 다도해 국립공원의 출입 허락을 받고, 명승 지정신청 과정에서 금강죽봉을 16번 오르내렸다는 김 학예사 안내로 금강죽봉에 가보니 출입 통제의 이유는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전적으로 ‘위험해서’다.

금강죽봉을 이룬 주상절리 전체가 다 아찔한 벼랑이어서, 곳곳에 추락의 위험이 있다. 벼랑으로 길이 아슬아슬 이어진 구간에서는 엄청난 고도감에 다리가 후들거린다. 자칫 발 한번 잘못 디뎠다가는 아찔한 절벽에서 추락하기 십상이다. 엄포나 과장이 아니다. 실제로 무단출입한 등산객이 사진을 찍겠다며 송곳 바위에 올랐다가 추락해 큰 부상을 입는 사고가 발생한 적도 있다. 그러니 통제가 해제되거나 안전시설이 보강되기 전에는 절대 출입해선 안 된다. 간혹 주민들의 눈을 피해 샛길로 드나드는 등산객들이 있어 최근 통제를 더 강화했다.

가볼 수 없는 곳임에도 금강죽봉 얘기를 꺼내놓은 건, 어쩌면 머지않아 금강죽봉에 가볼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다. 듣자 하니 팔영산 일부 구간을 자연휴식년제로 닫는 대신, 탐방로 총량제 관리 차원에서 금강죽봉 일부 구간에 탐방로를 놓고 출입을 제한적으로 허용하자는 의견이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단다.

지죽도 근처에 접근 불가의 명소가 또 하나 숨어 있으니 바로 ‘활개바위’다. 해안가에 우뚝 솟은 15m가 넘는 높이의 거대한 삼각형 모양의 바위인데 그 가운데에 구멍이 뚫려 있다. 이곳 역시 탄성을 자아내는 명소다. 문제는 여기도 역시 접근이 만만치 않은 것. 위험천만한 바위 해안을 지나서 깎아지른 벼랑을 로프에 매달려 위태롭게 오르내려야 한다. 금강죽봉과 마찬가지로 다도해 국립공원에서 출입을 통제하고 있는 이유다. 그래도 이곳은 간단한 시설만 갖춘다면 어떤 식으로든 접근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고흥 거금도 김일기념체육관 운동장에 설치된 김일 선수 경기장면 동상.

# 거금도와 추억의 프로레슬링

고흥에는 고흥보다 더 유명한 섬, 소록도가 있다. 우주발사체 발사기지인 나로우주센터가 있는 외나로도도 고흥의 섬이다. 섬 전체가 통째로 미술관이 된 연홍도도, 섬의 산정을 꽃밭 정원으로 일군 쑥섬도 고흥의 섬이다. 저마다 이야기를 품고 있어서 한 번의 여행에 섬 하나를 다녀온대도, 일정을 꽉 채울 수 있는 여행명소로 꼽히는 곳들이다.

이런 섬에 비해 잘 안 알려진 게 거금도다. 누구나 다 아는 고흥의 소록도보다 스무 배나 더 크고, 우리나라에서 열한 번째로 큰 섬인데도 거금도를 아는 이들은 적다. 임진왜란 즈음해서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는 절갑도(折甲島)란 이름으로 등장했고 그 뒤에 조선 내내 절이도(折爾島)였다가, 거금도(巨金島)가 된 건 근대에 들어서다.

거금도는 1960∼1970년대 ‘국민적 영웅’이었던 프로레슬러 김일 선수의 고향이다. 당시 프로레슬링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십육문 킥’이 장기인 자이언트 바바와 안토니오 이노키가 한편을 먹고, 박치기의 김일과 가라테의 천규덕이 한편이 돼서 펼치는 헤비급 프로레슬링 태그매치는 지금으로 치면 월드컵 축구 결승 못잖은 ‘빅게임’이었다. 그 시절을 지나온 이들이라면, 동네 마당에 흑백 TV를 꺼내고 온 동네 사람들이 그 앞에 모여 김일 선수를 응원했던 시절의 추억을 잊을 리 없다. 링 안에 숨겨 들어온 흉기로 반칙을 일삼는 상대방에 밀려서 줄곧 고전하다가 박치기로 자기보다 훨씬 큰 외국 선수를 단번에 때려눕히던 김일 선수는 그 시절 모두의 영웅이었다. 너나없이 어려웠고, 모두 순박했던 시절이었다.

거금도에서 꼭 들러 봐야 할 곳이 김일 기념체육관이다. 체육관 앞 운동장 가운데에는 가운을 입고 있는 김일 선수의 동상과 레슬링 기술을 걸고 있는 4개의 작은 동상이 있다. 체육관 안에는 유품전시관이 따로 있다. 전시관에는 김일 선수의 흉상과 젊은 시절 사진과 경기출전 당시 입었던 옷과 신발, 챔피언 벨트,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훈장 등이 전시돼 있다. 전시관에서 상영 중인 말년의 인터뷰 영상을 보다 가슴이 짠해졌던 건 “현역시절에 박치기가 정말 하기 싫었다”는 그의 뒤늦은 술회 때문이었다.

# 남진이 고흥에 기념관을 연 까닭

거금도에서 김일 얘기를 하면 꼭 뒤따라 붙은 게 ‘거금도 전기’ 얘기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김일 선수의 열렬한 팬이어서 시합이 끝나면 청와대로 부르는 일이 잦았는데, 한번은 박 전 대통령이 물었단다. “임자, 소원이 뭐야?” 김일 선수는 “거금도에 전기를 넣어달라”고 청했다. 육지에서 읍이나 면 소재지쯤 돼야 겨우 전기가 들어오던 1968년에 남도 끝, 고흥에서도 뱃길로 더 가야 하는 섬, 거금도에 전기가 들어오게 된 연유다. 그 시절 고흥의 초등학교마다 피아노와 풍금을 들여놓게 된 것도 김일 선수의 후광 때문이었다. 그 마음을 잊지 못해서였을 것이었다. 2006년 10월 26일, 서울 을지병원에 서울에 사는 거금도 출신 출향인들이 다 모였다. 거금도의 영원한 영웅 김일 선수를 배웅하는 자리였다. 거금도의 영원한 영웅을 기억하며 그에게 감사의 마음을 잊지 않던 거금도 사람들이었다.

고흥에는 가수 남진기념관도 있다. 1970년대 나훈아와 가요계를 양분했던 원조 오빠부대 주인공 남진이 지난해 11월, 바다를 끼고 있는 고흥 영남면의 한 폐교에 ‘남진트로트기념관’을 열었다. 기념관은 1965년 데뷔 후 발표한 앨범과 각종 가요제 트로피, 젊은 시절의 사진과 기사, 무대의상 등을 빼곡하게 전시해놓았다. 전시품이 제법 다양하고 짜임새 있어 관람하는 재미가 있다.

그나저나 궁금했던 게 있다. 남진의 고향은 전남 목포인데, 기념관 건립지를 왜 고흥으로 결정했을까. 기념관 개관 당시 남진은 그 이유를 “고흥과의 뒤늦은 인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2017년 고흥 홍보대사로 위촉됐으며, 이듬해에 ‘내 사랑, 고흥’이란 노래를 발표하기도 했다. 아무리 그래도 어디 이유가 그것뿐일까. 모르긴 해도 고흥의 빼어난 자연경관과 후덕한 인심이 그의 고흥행에 톡톡히 한몫했으리라. 고흥이 살기 좋다는 건 그도 진작 눈치챘을 거란 얘기다.

■ 고흥 ‘르와르베이커리’

프랑스산 버터와 호밀종에 이르기까지 하나같이 고급 재료만을 사용해 ‘제대로’ 빵을 만든다. 바삭하게 껍질이 부서지는 독특한 식감의 쌀 바게트와 구수한 맛의 유기농 쑥식빵이 일품이다. 쌀빵에는 고흥산 쌀만 사용한다. 고흥육쪽마늘빵부터 누룽지빵, 공주밤 브리오슈까지 도시의 제과점보다 빵의 종류가 다양하다. ‘하루만 지나도 빵 맛이 변한다’며 택배판매를 하지 않으니, 이곳의 빵은 고흥에 가야만 맛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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