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55주년 이 한 장의 사진] 이 한 컷 건지려… 왕시루봉을 스무 번 밤에 올랐다
왕시루봉에서 본 섬진강 노을_임대영 사진가
사진가 중에 글 잘 쓰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아니 글쓰기를 원하는 사람이 드물다. 사진가나 사진기자에게 글을 청탁하면 말년병장에게 유격훈련 권하는 것마냥 질색하며 거절하는 것이 약속이나 한 듯 같았기 때문이다. 편협한 선입견을 깨준 것이 2002년 7월호 '이 한 컷의 사진' 기사였다. 월간지 특성상 7월호를 6월에 만드는 걸 감안하면 월드컵이 한창이던 6월에 쓴 글임에도, 짧고 강렬했다. 특히 사진과 글이 혼연일체로 조화로워, 사진의 아름다움과 그 사진을 담아내기 위해 뒤에서 땀흘린 시간이 교차하며, 감동이 배가되었다. 단 2페이지 분량의 짧은 기사임에도 강렬한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아래는 기사 전문이다.
사람들은 지리산하면 꼭 천왕봉만 생각하고, 천왕 일출을 보고 와야 본전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천왕봉보다 반야봉이나 왕시루봉을 더 좋아한다. 무엇보다 거기서는 섬진강이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를 고스란히 안고서 유유히 흘러가는 섬진강, 동트는 새벽녘, 굽이굽이 휘돌아가는 운해….
그 섬진강을 촬영하기 위해 쏟아지는 별빛으로 길 밝히고 휘파람새 소리에 밝아올 아침을 그리며 홀로 밤길을 오르곤 했다.
그러다 어느 겨울날 저녁,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한 섬진강 모습을 보았다. 노을에 반사되어 굽이굽이 흘러가는 섬진강. 아, 어떻게 해야 하는가. 구도는 어떻게 잡고 노출은 어떻게 결정해야 하는가. 이제 평생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장면일 터인데 가슴은 쿵덕쿵덕 뛰고, 손은 허둥지둥 필름도 제대로 끼우지 못했다.
나는 그 순간을 위해 이곳을 20여 회 이상 밤길을 올랐다. 그리고 세 번 중 두 번은 카메라조차 꺼내지 않고 내려와야 했다. 패잔병처럼 축 처진 어깨로 산을 내려가다가 멧돼지와 정면으로 마주치기도 했다. 그 오랜 기다림, 추위, 배고픔.
지금 이 사진을 볼 때마다 좀더 침착했더라면, 하는 생각에 땅을 치고 싶어진다.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 나는 상상 속의 장면을 만나면 그때를 생각하며 심호흡을 몇 번이나 하고 촬영에 임한다.
18일 만에 백두대간 완주한 성량수씨
통념을 깬 스피드로 대간종주 '노인봉 털보'
노인봉 털보로 산악인들의 기억에 남은 성량수(72)씨. 그는 과소평가된 산악인이자, 잊히지 않을 선구적인 기록을 세운 인물이다. 백두대간이 알려지기 전, 1981년 동계 태백산맥(낙동정맥+백두대간 일부)을 75박 76일 만에 일시종주했다. 백두대간 노인봉 산장지기로 20년을 살았으며, 2002년에는 백두대간을 걷고 뛰며 18일 만에 최단시간 일시종주 기록을 세웠다.
최대 이틀, 48시간 동안 잠을 자지 않고 걸었으며, 매일 야간산행을 하고, 하루 평균 2~3시간을 자며 걸었다. 지금은 트레일러닝이나 잠을 자지 않고 걷는 무박산행이 일반적이지만, 당시 등산은 '걷는 것'으로 굳어져 있어, 그의 도전은 혁신적이면서도 당시 통념으로 비난을 감수한 것이었다.
아직 산에 살고 있는 그는, 2019년 <노인봉 털보>라는 자서전격 책을 냈다. 이원복 작가가 그의 구술을 활자화했다. 춘천 삼악산 기슭에 '운파산막'을 짓고 여전히 산에 사는 기인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2002년 월드컵에 온 관심이 집중되어 있던 시기, 홀로 묵묵히 산길을 걷고 뛰며 인간 한계에 도전한 성량수씨의 '18일 만에 백두대간 완주' 기사를 두 번째로 추천한다. 전문이 아닌 일부를 싣는다.
대부분 등산동호인들이 어려울 것으로 예상했던 노인봉 산장지기 성량수씨의 백두대간 보름 만의 종주 시도가 18일 만에 끝났다. 성씨는 5월 15일 지리산 천왕봉에서 종주를 시작, 6월 2일 향로봉에 오름으로써 예정보다 3일 더 걸린 18일 만에 종주를 마쳤다. 이로써 성씨는 백두대간 최단시일 종주를 기록했다.
성씨는 "백두대간 달리기에서 1등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 한민족이 한 줄기로 꿰어져 있음을 상징하는 백두대간에서 심신의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시도를 함으로써 통일의 염원을 극대화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이번 종주의 의미를 밝혔다.
성씨는 5월 15일 밤 지리산 천왕봉 남쪽 로타리산장에 가서 하루 자고, 16일 새벽 5시 30분경 천왕봉에 올라 종주를 시작했다. 타이즈, 긴팔 티셔츠에 휴대폰과 담배, 간식만 넣은 마라톤 배낭을 멘 그는 출발 13시간 만인 이날 오후 6시 30분 성삼재에 도착했으며, 이어 오후 8시 막 어둠이 내릴 무렵 첫날 목적지인 여원재에 도착했다. 다음날 또 비가 오며 예정지인 중재까지 못 가고 여원재에서 운행을 마쳤고, 3일째도 비가 오며 야간산행까지 했지만 덕유산 빼재까지 가는 데 그쳤다.
4일째 소사고개 내려가는 급경사 길에서 기어이 왼쪽 무릎에 통증이 왔다. "비가 와 등산로가 미끄러워지니까 아무래도 잘 안 쓰던 근육을 써야 했기 때문인 것 같다"고 성씨는 돌이킨다. -중략-
하루 종주 길이가 도상 거리로 따져도 40~50km여서 세 끼 먹고 잠자는 시간 외엔 모두 뛰거나 걸어야 했다. 어떤 날은 라면 한 끼만 먹고 견뎌야 했다고 한다. 지원조가 백두대간 상의 약속 장소까지 제 시간에 맞추어 찾아오지 못한 경우가 잦았기 때문.
특히 힘들었던 구간으로 청화산 이후 하늘재에 이르기까지 암릉을 꼽았다(청화산~조항산~대야산~희양산~조령산~마패봉~탄항산~하늘재 구간이며 지금도 최난 코스로 손꼽힌다. -편집자 주). 날이 저물면 암릉에서 길 찾기 어려워지기에 사력을 다해 뛰어야 했다.
먹고 잠자기만도 빠듯해서 18일간 세수는 단 두 번, 목욕은 단 한 번 했으며 양치질은 전혀 못 했다고 돌이킨다. 평소에도 하루 2~3시감 숙면하고 낮잠 20분 정도로 그만인 특이 체질이어서 그나마 견딜 수 있었다고.
자신의 집인 노인봉대피소에서 자고 난 다음날 5월 26일부터 27일까지 그는 48시간 잠을 자지 않고 걸었다. 조침령 가니 어두워졌고, 계속 전진해 점봉산 가니 날이 훤해왔다. 한계령 휴게소로 내려간 그는 스프와 토스트를 사먹고 잠깐 졸다가 2시간 30분 만에 대청봉에 올랐다. 이어 희운각, 공룡릉, 마등령, 저항령 지나 황철봉 넘을 때 밤이 됐고, 소나기를 만났다. 거기서 그는 저체온증에 걸리며 길을 잠시 잃었다.
정상부에서 갔던 길을 되돌아가다가 간신히 정신을 수습, 미시령에 도착하니 밤 12시. 잠시 눈을 부친 성씨는 6월 2일 오후 4시 향로봉 정상에 섰다.
K2 창업자 북한산서 실족사
한국 등산화 기술력을 한 단계 높인 '등산화 장인'
마운틴 뉴스 종합 기사에 실린 박스 처리된 기사였다. 등산 브랜드인 K2의 창업자 정동남 대표가 북한산 염초봉에서 실족해 숨을 거뒀다는 내용이었다. 지금은 패션브랜드로 이미지가 굳어졌지만 K2는 한국 등산화의 역사나 마찬가지였다.
당시에도 많은 등산 브랜드가 있었지만, 등산화에 있어서는 기술력에서 K2가 훨씬 앞서 있다고 보는 등산인들이 많았다. 그만큼 국산 등산화의 자존심이라 할 정도로 기술력이 좋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등산에서 등산화가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크다. 초보자는 등산화를 맨 처음 구입하고, 평상복으로 산에 다니다 등산복을 차차 구입하는 것이 일반적일 정도로, 등산은 발로 하는 것인 만큼 등산화의 역할이 크다.
당시 K2는 어렵게 성장의 길을 거쳐 사옥을 마련할 정도로 중견기업으로 발돋움한 시기였다. 고생 끝나고 편한 생활을 누려야 할 시기에 고인이 된 정 대표를 산악인들이 무척 가슴 아파했다. 기사의 일부를 싣는다.
한국 등산화의 살아 있는 역사랄 수 있는 정동남씨가 북한산에서 실족 사망했다. 국내 등산화 시장의 40%를 차지하는 K2코리아 창업자이자 대표이사인 정씨는 2002년 6월 5일 오후 3시 10분 북한산 염초봉을 오르다 암봉 아래로 추락, 목숨을 잃었다. 향년 63세.
경기도 가평에서 태어나 축산, 양계업을 하다 1968년 무작정 상경, 구두에 손을 댄 정 사장은 1970년도부터 코오롱스포츠 전신인 코오롱스토어, 미도파, 신세계백화점 등지에 소량이나마 등산화를 납품하며 기틀을 닦기 시작했다. 1975년부터 3년간 당시 국내 최대 등산화 제조업체인 레드페이스에 동업자로 참가했던 정동남 사장은 1978년 3월 한국 특수제화라는 공장을 차리고 K2 상표로 본격적인 등산화 생산에 들어갔다.
이후 영등포, 천호동, 성수동 등지로 공장을 옮기면서 나날이 성장해 나간 K2는 의류 사업에도 뛰어들어, 고어텍스 재킷, 쿨맥스 셔츠, 텐트, 배낭 등 종합 브랜드의 이미지를 구축했다. -중략- 최근에는 사옥까지 마련하는 등, 직원 400여 명에 연 70여 만 켤레의 등산화를 생산, 연매출 400억 원대에 이르는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이렇게 사옥까지 마련, 자리 잡아가는 상황에서 사고를 당해 유족과 지인뿐 아니라 등산업계에서 가슴 아파하고 있다. 유족으로는 부인 성유순(58)씨와 2남3녀가 있다.
월간산 6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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