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등산학교 50주년] 한국 최초 상설등산교육기관…1만 2,000명 동문 배출

한필석 한국등산학교 교장 2024. 6. 13. 0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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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도봉산장에서 열린 한국등산학교 개교식

대한민국 최초의 상설등산교육기관인 한국등산학교가 개교 50주년을 맞이한다. 1974년 6월 15일 도봉산 기슭 도봉산장에서 개교식과 함께 정규반(기초반) 제1회 입교식을 가진 한국등산학교가 오는 6월 14일 정규반 100회 졸업식과 함께 개교 50돌 기념식을 거행한다.

산악에 대한 개념이 거의 없던 시절, 한국등산학교는 산악인이라면 당연히 갖춰야 할 정통 알피니즘 정신의 추구와 체계적인 등산 교육을 통한 안전산행 그리고 당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갖춰야 할 국토애와 애국심 앙양을 설립 목표로 삼고 문을 열었다.

1974년은 힘겨운 시절이었다. 열악한 경제 상황에서 권효섭(초대 교장, 당시 국회의원, 서울시산악연맹 회장), 안광옥(부교장, 한국산악회 이사), 강호기(학감, 대한산악연맹 이사), 김인섭(설산장 대표), 김경배(서울시산악연맹 사무국장), 이숭녕(문학박사) 등의 산악인들이 등산학교 설립에 앞장섰다는 것은 시대를 뛰어넘는 대단한 일이었다.

1970년대 손경석 선생의 알피니즘 강의. 등산뿐만이 아니라 알피니즘과 같은 인문학적 이론 수업을 초기부터 했다.

강의 내용과 강사진도 대단했다. 등산사, 알피니즘의 역사, 등산윤리, 자연보호, 기상학, 사진학 등 교육과목이 다양했고, 권효섭 교장과 안광옥 부교장 외에도 당대를 대표하는 국어학자 이숭녕, 고지도 연구가 이우형, <등산백과> 저자 손경석 등, 일반대학 교수 수준의 산악인들이 강의를 맡았다.

이렇게 시작한 기초반은 1981년 봄 15회부터 정규반으로 이름이 바뀐 가운데 올봄 100회가 탄생했다. 등반기술이 한 단계 높은 중급과정인 암벽반은 올여름 53회, 그리고 빙벽등반과 설상등반, 고산 등반에 대비해 등반기술을 종합적으로 교육하는 동계반은 내년 1월로서 49회가 탄생한다.

한국등산학교는 상설등산교육기관으로 자리잡았지만 50년 세월을 이어오는 데에 어려움이 많았다. 무엇보다 학교 재정을 오로지 교육생의 수강료나 동문 또는 기업의 후원에 의존하는 비영리 교육기관이기 때문이다.

한국등산학교는 재정 독립을 위해 개교 이후 부단히 애써왔다. 정부 교육예산을 지원받을 목적으로 개교를 이틀 앞둔 1974년 6월 13일 서울시교육청에 사설강습소 설비 예비인가 신청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학교, 도서관, 직원 교습시설 등의 기준을 충족시킬 수 없어 무산되고 말았다.

한국등산학교의 특성을 보여 주는 교육 중 하나인 타이어 던지기. 자일 파트너가 추락했을 때의 충격을 확보자가 체험할 수 있도록, 타이어를 던져 충격을 몸으로 알 수 있게 하는 교육이다.

그럼에도 등산교육에 대해 열망 가득한 입교생은 넘쳐났다. 1970년대 말에 접어들면서 정규반 수강생은 40명을 넘어서고, 1980년대부터는 50~60명에 이르렀다. 하지만 적은 수강료로 사무국과 상설직원을 둔 상태로 학교를 운영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고, 운영진이 각자 주머닛돈을 털어 운영자금을 마련하기도 했으나 한계에 다다를 수밖에 없었다.

결국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개교 10년을 맞은 1984년 가을 정규반과 1985년 동계반의 문을 열지 못하다가 독립등산기관에서 서울시산악연맹 부설 교육기관으로 개편하기에 이르렀다.

이후에도 많은 어려움이 속출했다. 강사 임용 문제로 반발한 기존 강사들의 이탈, 학교와 동문회와의 반목 그리고 해결되지 않는 재정 문제 등으로 어려움은 최근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한국등산학교는 온갖 난관을 극복해 내며 이렇게 50년을 이어왔다. 그 사이 정규반 암벽반 동계 3개 교육과정과, 경찰구조대 국립공원공단 119구조대 특전사 대상 특별반에 이르기까지 1만2,000명에 이르는 동문이 배출되었다.

정규반 100회 교육생들과 강사들이 인수봉 정상에 섰다

동문 활동도 앞서나갔다. 한국등산학교 총동창회가 등산의 학술화를 목표로 1986년부터 발간한 <산학山學>은 산악정보에 목말라 하는 산악인들에게 단비와 같은 역할을 해냈고, 5차례의 조사를 거쳐 연재한 '전국 암벽 그레이드 조사'는 우리나라 암벽에 맞는 등반난이도 정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정립한 난이도 체계는 지금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고, 연재의 부산물인 <바윗길>은 한국 산악계를 대표하는 '암벽 그레이드 북'으로 지금도 산악인들에게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많은 동문이 방방곡곡 각자 분야에서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한국등산학교에 대한 자부심은 클 수밖에 없다. 특히 1983년 5월 경찰구조대 창설뿐 아니라 국립공원공단의 산악안전교육에 대한 기틀을 마련하는 데에도 지대한 역할을 했다. 여기에 국민 안전을 위해 최강의 소방관과 군인들에게까지 특수교육과 안전교육을 도맡았다는 점에서 설립 목표를 100% 달성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여성을 위한 강의는 시대를 앞서나갔다. 개교 첫 해인 1974년에는 사회 분위기와 열악한 교육시설에 비해 넘쳐나는 수요 등의 이유로 여성들의 입교를 허용하지 않았다. 대신 여성등산학교 정규과정을 여는 것을 목표로 그해 7월 3일부터 5일까지 사전강좌를 열었다. 연일 1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등산이론을 강의하고 슬라이드 상영을 통해 많은 여성들의 흥미와 주목을 끌었고, 이후에도 여대생들을 대상으로도 여러 차례 수탁교육을 진행했다.

한국 최초의 여성원정대인 '1982 선경여자산악회 람중히말 원정대'는 학교 출신 산악인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권효섭 초대 교장의 권유로 꾸려진 원정대 대원 5명 중 4명이 정규반 출신이었고, 매니저 역할을 맡은 김경배씨 역시 한국등산학교 설립위원이자 강사였다. 원정대는 5월 6일 기형희가 람중히말(6,986m) 등정에 성공하고, 2차 공격조 윤현옥이 2시간 후 정상에 올라 한국 여성 최초로 히말라야 고봉 등정자가 되었다.

민간단체로서 한국등산학교는 남북교류에도 힘썼다. 2005년 1월 동계반 30회를 금강산에서 열고 그해 9월 북한구급봉사대 산악교육, 그리고 2007년 동계반 32회도 금강산에서 열었다.

설립 목표 중 첫 번째로 삼은 '알피니즘'은 2019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으로 등재됐다. 그만큼 한국등산학교는 앞서나갔다.

한국등산학교의 존재 이유는 점점 명확해지고 있다. 등반인구가 늘어나고 있음에도 등반이 놀이나 유희의 스포츠로 격하되어가고 있는 분위기 속에서 한국등산학교의 역할은 더욱 커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전문 산악인뿐 아니라 일반 등산인의 안전을 위해 정확하고 안전한 산행과 등반 테크닉을 가르쳐야 한다는 점은 당연한 일이고, 그에 앞서 '알피니즘'이라는 등반 철학을 끊임없이 불어넣어 등반 정신의 가치가 더 이상 추락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앞으로도 한국등산학교의 앞길이 탄탄대로로 이어지리라고 보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개교 이후 수많은 난관을 극복해내며 개교 50주년을 맞듯이 앞으로도 아무리 험하고 높은 산이 앞을 가로막더라도 100주년을 향해 꿋꿋하게 나아갈 것이다. 그래서 학교 관계자들과 동문들은 외친다.

"한국등산학교, 100년 가자!"

월간산 6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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