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만큼 성숙해진 정지석, '에이스' 넘어 '리더'로 성장 중
대한항공 정지석(29·195cm)에게 2023-2024시즌은 프로 생활 11년을 통틀어 가장 다사다난했던 순간이었다.
최근 경기도 용인에 위치한 대한항공 체육관에서 CBS노컷뉴스와 만난 정지석은 지난 시즌을 떠올리며 "좋았던 기억은 챔피언 결정전밖에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정지석은 허리 부상으로 지난 시즌을 3라운드부터 뒤늦게 시작했다. 지난해 10월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 출전 뒤 부상이 악화돼 전반기를 거의 뛰지 못했다.
정지석은 "선수 생활을 하면서 이렇게 부상 기간이 길었던 적은 처음이라 익숙하지 않았다"면서 "부상을 당했을 때 마음가짐이 중요한데, 처음 겪어보는 일이라 힘들었다"고 털어놨다.
아시안게임 당시에도 몸 상태는 좋지 않았다. 정지석은 대회를 앞두고 허리 통증을 호소해 첫 경기인 인도와 조별리그 C조 1차전에 출전하지 못했다.
정지석 없이 인도와 맞선 한국은 세트 스코어 2대3으로 패하며 대회를 불안하게 시작했다. 당시 기준 국제배구연맹(FIVB) 랭킹 27위였던 한국은 73위로 무려 46계단 아래인 인도에 덜미를 잡혀 체면을 구겼다.
정지석이 부상 투혼을 발휘해 출전한 캄보디아와 2차전에서는 3대0으로 승리하며 기사회생했다. 정지석은 블로킹 2개와 서브 1개를 포함해 양 팀 최다인 11점을 터뜨리며 한국의 12강 진출을 이끌었다.
하지만 정지석의 몸 상태는 이미 한계에 달했고, 결국 한국은 12강전에서 파키스탄에 발목을 잡혀 메달 사냥에 실패했다. 2006년 도하 대회 이후 17년 만의 금메달에 도전했지만, 현실은 1962년 자카르타 대회 이후 61년 만의 노메달이었다. 이후 순위 결정전을 거친 한국은 역대 최악의 성적인 7위로 대회를 마무리했다.
정지석은 "참담했다. 나도 거의 밖에서 봤는데, 모든 분들이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라며 "어쩌다 여기까지 내려왔을까 싶다. 이미 밑바닥까지 내려왔지만, 더 아래도 있을 거라 생각한다"고 고개를 숙였다.
부상 투혼에 대해서는 "공을 때릴 때마다 죽을 맛이었다. 공을 때리고 넘어지는 스타일이 아닌데, 힘이 없으니까 그냥 발라당 눕게 되더라"면서 "의무 트레이너가 있었지만, 나만 봐주면 피해를 주기 때문에 약을 먹으며 참았다. 부상이 처음이라 무엇이 정답인지 몰랐다"고 설명했다.
이어 "허리가 너무 아파서 소속팀에 돌아가면 이번 시즌은 뛰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일단 아시안게임이 더 중요해서 참고 뛰었는데, 원하는 퍼포먼스가 나오지 않아서 속상했다. 그리고 정밀 검사를 받았을 때 복귀를 못 할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남 일이라 생각했던 게 나한테 일어나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고 떠올렸다.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정지석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 그는 "무조건 참고 뛰진 않았을 것 같다. 빨리 검사를 받아봤을 것 같다"면서 "나 때문에 엔트리 한자리를 낭비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말했다.
복귀 후에도 정상 컨디션은 아니었다. 긴 공백 탓에 부진을 거듭한 정지석은 24경기(85세트) 192득점 공격 성공률 45.78%를 기록, 경기당 평균 8득점으로 저조한 성적을 거뒀다. 스스로 '커리어 로우'라고 말한 정도로 실망스러운 시즌이었다.
정지석은 "선수라면 개인 기록을 신경 쓸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번 시즌은 볼 필요도 없더라"면서 "서브나 리시브는 올라왔을지언정, 나머지는 모두 바닥을 쳤다"고 스스로를 혹평했다.
하지만 정지석은 챔피언 결정전에서 180도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3경기(12세트) 59득점 공격 성공률 57.50%로 놀라운 활약을 펼쳐 챔피언 결정전 MVP(최우수 선수)의 영예를 안았다. 대한항공은 정지석의 활약에 힘입어 V리그 최초로 통합 우승 4연패를 달성했다.
우승이 확정된 뒤 정지석은 "에이징 커브만큼은 피하자는 생각으로 준비했다"고 밝혔다. 부상으로 보낸 힘든 시간을 반드시 극복하겠다는 각오였다.
정지석은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임했다. 기술적인 부분도 중요하지만, 그동안 힘들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면서 "이번에는 확실히 보여주자는 생각으로 준비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시작은 좋지 않았지만, 정상에서 마무리하며 환하게 웃었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자 겹경사가 이어졌다. 지난 1월 득녀한 정지석은 시즌 종료 후 미뤘던 결혼식을 올렸다.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정지석은 "육아에 전념하고 있다. 아내가 바라는 만큼 잘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최대한 노력하고 있다"면서 "운동 때문에 힘들어서 늦잠을 자면 아내가 딸을 데리고 와서 '네가 그러고도 아빠야'라며 장난을 친다"고 미소를 지었다.
아내는 부상으로 마음고생이 심했던 정지석의 든든한 조력자였다. 그는 "내가 힘들 때 항상 옆에서 함께 울어줬다. 내가 오히려 행복한 사람이라는 걸 깨닫게 했다"면서 "아기도 곧 태어나니까 함께 버티자 했고, 내가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않게 많은 도움을 줬다"고 고마움을 전했다.
그동안 각종 개인상을 휩쓸었지만, 이번 챔피언 결정전 MVP는 유독 특별하게 느껴졌다. 정지석은 "힘든 시간을 이겨내 보상을 받는 기분이었다"고 뿌듯해했다.
베스트7 아웃사이드 히터 부문 4회, 정규 리그 MVP 2회, 라운드 MVP 2회, 챔피언 결정전 MVP 2회 등 받을 수 있는 상은 모두 받은 정지석이다. 하지만 그런 정지석을 아직 인정하지 않는 인물이 있다. 팀 동료이자 선배인 '최고 세터' 한선수는 "그 정도는 아니다"라며 정지석에게 자극을 준다.
정지석은 "(한)선수 형에게 인정받기 위해 더 열심히 하고 있다. 선수 형도 알 거라 생각한다"면서 "내가 잘한다는 걸 알면 들뜰 수 있어서 더 열심히 하라고 채찍질한다. 그게 주장의 역할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나도 나이를 먹고 선수 형처럼 주장이 되면 후배들에게 그런 말을 해주지 않을까 싶다. 최근에는 선수 형에게 처음으로 '잘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씨익 웃었다.
어느덧 팀에서 중고참급이 된 정지석은 한선수를 바라보며 "가끔 주장이라는 직책이 탐나지만, 내가 많은 선수들을 다 케어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면서 "스스로에게 질문하면 아직은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하지만 대표팀에서는 맏형이 된 만큼 후배들을 이끌어야 하는 입장이 됐다. 지난달 소집된 2024 AVC(아시아배구연맹) 챌린지컵 대비 강화 훈련 엔트리에서 1995년생 정지석이 최고참이었고, 막내는 이탈리아 남자 배구 1부 리그 베로 발리 몬자와 정식 계약을 맺은 2005년생 아웃사이드 히터 이우진이었다. 30대 선수는 없었다.
대표팀 소집을 떠올린 정지석은 "원래 대표팀에 가면 내가 선배들에게 인사를 해야 했는데, 지금은 내가 인사를 받고 있다"고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이어 "처음 보는 선수들도 많았다. 남자 배구의 미래라 불리는 이우진 선수는 처음 봤는데 몸이 다부지더라"고 말했다.
이후 정지석은 정강이 피로 골절 진단을 받아 대표팀에서 제외됐고, AVC 챌린지컵에 출전하지 못했다. 그는 대표팀 분위기에 대해 잠시 겪었던 느낌과 전해들은 이야기를 하며 "MZ세대라고 하지 않나. 젊은 선수들답게 자신감이 넘친다"면서 "서로 할 말을 과감하게 하고, 파이팅 넘치는 분위기였다고 들었다"고 했다.
새롭게 지휘봉을 잡은 이사나예 라미레스 감독에 대해서는 "본인이 추구하는 배구가 무엇인지 선수들에게 알려주려고 노력한다고 하더라. 굉장히 열정적이라고 들었다"면서 "어떤 배구를 가르쳐 주실지 궁금하고 기대된다"고 말했다.
라미레스 감독은 가장 기대되는 선수로 정지석과 허수봉(현대캐피탈)을 꼽았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두 선수 모두 부상으로 낙마해 AVC 챌린지컵에 불참했다. 정지석은 "감독님과 면담을 했는데 유감이라고 하시더라. 사실 나는 이번 시즌 부진해서 안 뽑힐 줄 알았다"고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라미레스 감독이 대대적인 세대교체를 꾀하는 데 대해서는 "잘 유지한다면 시기상으로는 2028 로스앤젤레스(LA) 올림픽 출전을 노려볼 수 있을 것 같다"면서 "이미 늦었다고 볼 수 있지만, 감독님께서 방향성을 잘 잡고 계신 것 같다. 아시아를 넘어 세계 무대에서 경쟁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지석이 불참한 이번 AVC 챌린지컵에서 한국은 3위를 기록했다. 이 대회 우승팀은 다음달 8개국이 겨루는 국제배구연맹(FIVB) 챌린저컵에 출전하고, 여기서 우승하면 2025년 FIVB 발리볼네이션스리그(VNL)에 나설 수 있다. 우승을 놓친 한국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세계 무대를 갈망하는 정지석은 이번에도 부상에 발목을 잡혔다. 그는 "FIVB 챌린저컵에 나가면 더 좋은 멤버로 구성돼 VNL까지 도전해 볼만 했을 텐데 아쉽다"면서 "VNL에 나가는 국가들이 너무 부러웠다. 2018년 첫 대회 이후 출전하지 못했는데, 당시 세계적인 선수들을 보고 너무 설렜던 기억이 떠오른다"고 아쉬워했다.
이제 대한항공은 통합 우승 4연패를 넘어 5연패에 도전한다. 쉽지 않은 목표를 설정한 만큼 동기부여가 중요하다.
정지석은 지난 시즌 부진을 털고 반등에 성공하겠다는 의지가 강하다. 그는 "내 기준으로는 바닥을 쳤으니까 더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면서 "플레이가 성숙해졌다는 말을 들을 만큼 효율적인 배구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일단 첫 목표는 부상 없이 개막전부터 경기를 뛰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끝으로 정지석은 "예전에는 그냥 잘하는 선수가 되는 게 목표였지만, 이제는 포기하지 않는 선수가 되고 싶다"면서 "팀에서는 리더에 가까운 선수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겠다. 일단 (주장인) 선수 형이 내 걱정은 안 하게 하면서 도와야겠다"고 다짐했다.
용인=CBS노컷뉴스 김조휘 기자 startjoy@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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