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간 DJ, 은둔생활 김정일이 '파격 마중'…"기대 이상의 환대"[뉴스속오늘]
[편집자주] 뉴스를 통해 우리를 웃고 울렸던 어제의 오늘을 다시 만나봅니다.
2000년 6월13일 오전10시27분. 김대중 전 대통령이 북한 측과 한반도 통일을 논의하기 위해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다.
이날엔 공개석상에 잘 나오지 않아 은둔생활을 한다고 알려졌던 김정일 당시 국방위원장이 김 대통령을 마중하기 위해 순안공항에 미리 와 기다리는 파격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김 대통령. 그는 비행기에서 내린 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손을 맞잡고 악수했다. 남북한이 분단되고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은 뒤 55년 만에 양국 정상이 만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김 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제가 기대했던 이상의 환대를 베풀어줬다. 또 60만 평양 시민이 열광적으로 저를 환영하고 환송해 줬다"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되기까지엔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다. 그 시작은 199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0년 당시 김일성 주석이 그해 신년사에서 처음으로 남북최고위급 회담을 언급한 것. 이후 4년 후인 1994년엔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을 만난 그는 정식으로 김영삼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희망한다는 뜻을 전했다.
이에 남북 양측은 남북정상회담의 구체적인 일정을 정하는 등 구체화 작업을 상당 부분 진행했다. 하지만 1994년 7월 김일성이 갑자기 사망하는 바람에 남북정상회담은 기약 없이 연기됐다.
꺼져가던 대화의 불씨를 다시 살린 건 김대중 대통령이었다. 1998년 2월 대통령 취임식에서 "북한이 원한다면 정상회담을 개최할 용의가 있다"고 표명한 것.
2년 후인 2000년 3월8일엔 독일을 국빈 방문한 김 대통령은 베를린 선언을 통해 남북 관계를 발전하겠다고 천명한다.
베를린 선언엔 △민간 경협 차원에서 머물러온 남북협력의 범위를 정부 차원으로 확대 △남북 간의 화해·협력 본격화 △이산가족 상봉 △남북기본합의서 이행을 위한 당국자 간 대화 등 내용이 담겨 있었다.
북한은 베를린 선언에 호응하며 비공개적인 경로를 통해 한국 측과 접촉했고, 양측이 여려 협의를 거친 끝에 2000년 4월8일 남북정상회담 개최 합의서를 채택했다.
숙소로 이동한 김 대통령과 김 국방위원장은 공항에서 만난 지 약 1시간 만인 11시40분 1차 정상회의를 가진다. 이 회의에서 양측은 민족 화해와 협력을 도모해 나가기로 합의했다.
이후 김 대통령은 우리나라의 국회 격인 만수대 의사당을 방문해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명목상 국가원수)을 만났고 만수대 예술극장에서 공연을 관람하는 등 일정을 소화했다.
평양 방문 이틀 차인 6월14일. 오전 11시35분 만경대 학생소년궁전을 방문한 뒤 김 대통령은 오후 3시 백화원 영빈관에서 김 위원장을 만나 2차 정상회의를 가졌다.
이날 회의에서 양측은 남북 간 화해와 통일문제, 이산가족문제, 경제·사회·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교류 협력 문제, 합의사항 이행을 위한 당국 간 대화개최 등 남북관계 개선방안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
같은 날 오후 6시쯤 양측은 3차 정상회의를 진행한 뒤 오후 11시20분쯤 유명한 6.15 '남북공동선언'에 합의했다.
6.15 남북 공동선언문엔 △자주적인 통일 지향 △2000년 8월15일쯤 이산가족, 비전향 장기수 문제 해결 △경제 협력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교류 활성화 등 내용이 담겼다.
이날 김 대통령은 "(북한과) 지속적인 대화와 교류를 통해서 서로 이해를 넓히고 믿음을 쌓아 가면 협력 또한 확대될 것입니다"라며 소회를 밝혔다.
김 대통령은 6월15일 오후4시15분 박수 갈채 속에 평양 순안공항을 떠나해 서울로 복귀했다.
남북정상회담으로 작성된 6.15남북 공동선언에 따른 가장 큰 성과는 2000년 8월15일부터 18일까지 이뤄진 제1차 이산가족방문단 교환으로 꼽힌다. 이 시기 남북의 203가족(남측 853명 북측 319명 총 1172명)이 상봉을 이뤘다.
또 북으로 가기를 희망하는 비전향 장기수들을 2000년 9월 초 송환하는 등 인도적인 조치를 취했다.
이 외에도 양국은 접경지에 설치했던 확성기를 철거하는 등 평화 분위기가 무르익었고, 금강산으로 이어지는 동해선 철로가 연결되기도 했다.
김 대통령은 한반도 평화를 증진한 공로 등을 인정받아 2000년 12월10일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다. 대한민국 1호 노벨상 수상자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남북정상회담을 한 지 2년 만인 2002년 6월29일. 북한이 NLL(북방한계선)을 기습 남침해 일으킨 제2연평해전으로 우리 해군 장병 6명이 전사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김 대통령이 내세운 햇볕정책(화해와 포용으로 남북의 교류와 협력을 증대하는 정책)은 그간의 대북 강경론과는 다른 성격의 대북 접근법이었다.
북한과 대화와 협상을 통해 이들을 개혁·개방으로 유도하고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겠다는 발상은 당시에도 참신한 것이었다.
실제로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분단 후 55년 만에 김정일을 만나 벽을 허무는 모습, 이산가족 상봉과 비전향 장기수 문제 해결 등 많은 인도적 성과를 거뒀다고 평가받는다.
하지만 일각에선 북한의 핵 개발 의지와 이들을 너무 신뢰한 점을 비판한다. 특히 김 대통령이 재임 시절인 2002년에 발발한 제2연평해전은 햇볕정책의 실효성을 의심하게 되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정권이 바뀌면서 일관되지 않은 대북 정책이 남북 관계가 발전하지 못하는 원인으로 꼽히기도 한다. 이 외에도 북한 체제의 과도한 경직성, 핵을 포기하지 못하는 북한 수뇌부의 갈등 등도 여러 요인도 있다.
오늘날에도 남북 관계는 공회전을 돌며 미제의 숙제로 남아 있다.
박상혁 기자 rafandy@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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