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안내인과 강대국 손님, 화합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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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린 감독의 '인도로 가는 길'(1984년)에서 닥터 아지즈는 식민지 인도를 방문한 영국 여성 아델라 퀘스티드를 환대했지만, 마라바르 동굴에 안내한 일이 화근이 되어 큰 고초를 겪는다.
조선시대 지식인 역시 상국(上國)인 중국 사신들을 대접하느라 어려움이 많았다.
그녀는 마라바르 동굴 관광 중 환각으로 인해 안내한 아지즈를 오해하고 주변의 부추김을 받아 무고한 그를 성폭행 혐의로 고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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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린 감독의 ‘인도로 가는 길’(1984년)에서 닥터 아지즈는 식민지 인도를 방문한 영국 여성 아델라 퀘스티드를 환대했지만, 마라바르 동굴에 안내한 일이 화근이 되어 큰 고초를 겪는다. 조선시대 지식인 역시 상국(上國)인 중국 사신들을 대접하느라 어려움이 많았다. 특히 1602년 명나라 황태자 책봉 조서를 반포하기 위해 온 고천준(顧天埈·1561∼?) 일행을 접대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이호민(李好閔)은 원접사(遠接使·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관직)로 고천준을 한양까지 안내하며 예우하였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고천준이 이호민에게 준 시는 다음과 같다.
이호민은 자신의 정자에 명나라 황제의 은혜를 잊지 않고자 ‘역은정(亦恩亭)’이란 이름을 붙이겠다며 이에 대한 시를 고천준에게 부탁했다. 자신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받은 은혜를 잊지 않겠다는 의식을 드러낸 것인데 고천준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한나라가 왕으로 인정해 주었지만 은혜를 모르고 황제라 자칭했던 남월(南越)의 조타(趙陀)의 사례를 들어 조선과 이호민을 배은망덕한 오랑캐 나라와 그 신료라고 매도했다. 고천준은 조선에 와서 왜란 때 전사한 명나라 군인들에 대한 애도가 소홀함을 비난하기도 했는데(‘平壤行’), 위 시 역시 그런 편견과 불신의 연장선상에 있다.
영화에서 식민지인을 멸시하는 영국인 약혼자와 관료들에게 둘러싸인 퀘스티드 역시 그러했다. 그녀는 마라바르 동굴 관광 중 환각으로 인해 안내한 아지즈를 오해하고 주변의 부추김을 받아 무고한 그를 성폭행 혐의로 고발한다. 법정에서 무죄가 밝혀지긴 하지만 아지즈는 이 일로 혹독한 시련을 겪는다. 이호민도 고천준의 무례와 횡포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저 시로 조선이 남월 같은 오랑캐가 아니며, 왜란 때 구원해준 명나라에 대한 고마움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라고 항변하는 데 그쳤다(‘僻壤小築, 本不足煩淸聽…’).
고천준의 시는 당시 조정에서까지 논란이 되었다. 선조는 이 시를 명나라 사신과의 시문 외교 내용을 기록한 황화집(皇華集)에 수록하지 말자는 신하들의 의견에 사신의 말이 지나치지만 없애버리면 그 곡절을 알 수 없으니 남겨두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조선을 남월에 비유한 의도가 음험하다는 점도 지적했다(선조실록 35년 8월 17일조).
강대국과 약소국 지식인 간의 진정한 사귐이 가능할까? 영화는 우정이 불가능하다고 본 E M 포스터의 원작 소설과 달리 두 사람의 화해를 통해 낙관적 전망을 드러냈다. 하지만 아지즈의 입장에서 본다면 사과도 받지 못한 채 용서만 한 셈이다. 고천준과 이호민의 사례에서 보듯 상대방에 대한 존중 없는 교류란 공허한 말의 성찬일 뿐이다.
임준철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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