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따뜻한 잠바 입고 그림 그려요”… 아들에게 보낸 이중섭의 편지

허윤희 기자 2024. 6. 13.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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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공개 편지화 3장 첫 전시
서울미술관 특별전서 13일부터
이중섭이 1954년 일본에 있는 큰아들 태현에게 보낸 편지화. 친구로부터 선물받은 양피 잠바를 입고 왼손엔 팔레트를, 오른손엔 붓을 들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큼직하게 그렸다. /서울미술관

“아빠는 따뜻한 양피 잠바를 입고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답니다. 기뻐해주세요. 중섭.”

‘국민 화가’ 이중섭(1916~1956)이 1954년 일본에 있던 가족에게 보낸 미공개 편지화가 처음 공개됐다. 서울 석파정 서울미술관에서 13일 개막하는 2024 소장품전 ‘나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전시에 나온다. 서울미술관을 설립한 안병광 유니온약품 회장은 “이중섭의 일본인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1921~2022) 여사의 집을 정리하다가 2019년 발견된 여러 통의 편지 중 하나”라며 “아들 태현과 태성에게 석 장씩 보낸 삽화 편지가 하나의 편지 봉투 안에 들어있었다. 그중 큰아들 태현에게 보낸 편지화 석 장을 지난해 구입했다”고 밝혔다.

이중섭이 큰아들 태현에게 보낸 편지글. 제일 위에 '태현군'이라고 한글로 썼고, 아래 내용은 일본어로 써내려갔다. /서울미술관

◇가족에 대한 애틋한 사랑

6·25 전쟁으로 인해 가족과 헤어져야 했던 이중섭은 일본에 있는 가족을 그리워하며 생전 100여 통의 편지를 보냈다. 그는 글과 함께 가족과의 추억이나 재회하고자 하는 열망을 그림으로 담은 편지를 전했고, 이 편지들은 ‘편지화’라는 하나의 장르로 자리매김했다.

이번에 공개된 편지화엔 가족을 향한 그리움과 아버지의 따뜻한 마음, 친구들과의 우정이 드러난다. 발송 날짜는 1954년 10월 28일. 첫 장 편지글에는 ‘태현군’이라는 한글과 함께 일본어로 편지를 써내려갔다. “나의 태현군, 잘 지내니? 아빠는 건강하게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아빠가 있는 경성은 너희가 있는 미슈쿠보다 추운 곳입니다. 기차로 몇 시간이나 걸리는 곳에 있던 아빠의 잠바를 오늘 아빠의 친구가 가지고 와주어서, 아빠는 매우 기뻐요. 이보다 더 추워도 아빠는 따뜻한 양피 잠바를 입고, 그림을 그릴 수 있으니 괜찮습니다. 나처럼 태현군도 기뻐해주세요. 태현군도, 태성군도, 엄마도, 할머니가 계시니까, 괜찮을 거라 생각해요. 감기 걸리지 않도록 몸조심하세요. 그럼, 건강해요. 아빠 중섭.”

이중섭이 큰아들 태현에게 보낸 편지화. 부처와 같은 자태로 앉아 있는 마사코를 중심으로 탐스러운 복숭아 위에서 놀고 있는 두 아들을 양쪽에 그렸다. /서울미술관

둘째 장엔 부처 같은 자태로 앉아 있는 마사코를 중심으로 탐스러운 복숭아 위에서 놀고 있는 두 아들을 양쪽에 그렸다. 마지막 장엔 친구로부터 선물받은 양피 잠바를 입고 양손에 팔레트와 붓을 든 자신의 모습을 큼직하게 그렸다. 미술관은 “편지봉투에 발송 날짜가 적혀 있고, 서울시 종로구 누상동에 거주했던 이중섭의 주소와 일본 도쿄 세타가야구 미슈쿠에 거주했던 태현, 태성의 주소가 상세히 적혀 있다”며 “이 편지를 끝으로 이중섭은 11월 1일 누상동을 떠나 마포구 신수동으로 이사했다. 이번 편지는 누상동 시절 이중섭의 마지막 편지로 추정된다”고 했다.

이중섭이 아들에게 보낸 편지 봉투. 1954년 10월 28일 날짜가 적혀 있다. 봉투는 현재 유족이 소장하고 있다. /서울미술관

◇공예가 유강렬과의 우정

편지 속 양피 잠바를 전해줬다는 친구는 공예가이자 판화가 유강렬(1920~1976)로 추정된다. 이중섭이 부산에 머물던 시절 공예전람회 참석을 위해 부산에 자주 방문했던 유강렬은 자신과 같은 함경북도 출신이었던 이중섭과 교유했고, 통영으로 오라는 유강렬의 권유에 따라 이중섭은 1953년 11월 통영으로 떠나 이듬해 5월까지 머물렀다. 통영 시절은 이중섭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였다. 유강렬이 마련해 준 거처에 머무르며 이중섭은 그 어느 때보다 왕성한 창작욕을 불태웠고, 통영 들소를 그린 ‘황소’(1954)를 비롯해 주요 걸작들이 이 시절 제작됐다.

1954년 1월 무렵 통영에서 찍은 사진. 이중섭(왼쪽)이 편지에 등장하는 양피 잠바를 입고 있다. 가운데가 잠바를 서울로 들고 온 친구 유강렬. /국립현대미술관

안진우 서울미술관 이사장은 “통영에서의 용기를 안고 서울로 올라온 이중섭은 종로구 누상동을 거쳐, 이종사촌이었던 이광석 판사가 내준 마포구 신수동에 자리를 잡았다. 이중섭이 신수동으로 이사하던 1954년 11월 1일은 제3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이하 국전)가 개최되는 날이었고, 이사 며칠 전인 10월 28일 물감을 사러 시내에 나갔다가 국전 출품을 위해 통영에서 서울로 올라온 유강렬과 친구들을 만나 잠바를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유강렬이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한 ‘이중섭이 유강렬에게 보내는 편지’와 이중섭이 통영 시절 유강렬과 찍은 사진 등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1954년 1월 무렵 통영에서 촬영한 사진에서 이중섭은 두꺼운 양피 잠바를 입고 미소를 짓고 있다.

이중섭이 즐겨 그리던 도상들도 이번 편지화에서 볼 수 있다. 미술관은 “복숭아는 벽사의 힘을 지니고 있어 신선의 과일로 여겨졌고 복숭아나무가 있는 곳은 무릉도원, 이상향을 상징한다”면서 “탐스러운 복숭아 위에서 생명력 넘치는 물고기, 새와 어우러져 해맑게 웃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그려 마치 천국과 같은 가족의 모습을 담아냈다”고 했다.

단독 공간에 설치된 이우환의 '대화'(2020). 붉은색과 파란색의 강렬한 색채 대비가 돋보이는 대형 작품이다. /뉴시스
김환기의 ‘십만 개의 점’과 정상화의 ‘무제’ 연작, 이우환의 ‘바람’, 서세옥의 ‘사람들’, 김창열의 ‘회귀’ 등 200호 이상 대작들을 한 공간에 전시했다. /뉴스1

이번 전시에는 서울미술관의 신소장품이 여럿 나왔다. 붉은색과 파란색의 강렬한 색채 대비가 돋보이는 이우환의 ‘대화’(2020)를 단독 공간에 돋보이게 설치했고, 추사 김정희의 ‘주림석실 행서대련’, 정상화의 ‘무제 12-5-13′(2012) 등도 처음 공개했다. 김환기의 ‘십만 개의 점’과 정상화의 ‘무제’ 연작, 이우환의 ‘바람’, 서세옥의 ‘사람들’, 김창열의 ‘회귀’ 등 200호 이상 대작들을 함께 전시한 공간이 압권이다. 신사임당의 초충도 10점을 비롯해 이응노, 천경자, 장욱진, 김기창 등의 작품을 작가들이 쓴 글과 함께 소개한다. 전시는 12월 29일까지. 성인 2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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