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2002 월드컵 때처럼 한일 입국심사관 파견하자
출국할 때 입국 심사 함께 받고 전용통로 이용하면 30분씩 혜택
지난달 개최된 제주포럼의 한일 관계 세미나엔 인상 깊은 몇 장면이 있었다. 박철희 국립외교원장과 함께 발표자로 나온 일본 측 인사는 모리 다케오(森健良) 전 일본 외무성 차관. 의원내각제인 일본에서 외무성 차관은 외교관 중 최고위직이다. 불과 9개월 전까지 일본 외교를 지휘했던 이가 한국에서 열린 공개 세미나에 참석한 것이다. 2018년 대법원의 일제 징용 배상 판결, 2019년 아베 내각의 경제 제재로 양국 관계자들이 악수조차 하지 않았던 시기엔 상상하기 어려웠다. 모리 전 차관은 이날 “윤석열 대통령의 (한일 관계 정상화) 결단에 대해 존경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지난해 도쿄 방문 시 친분이 있던 일본 외교관들로부터 사석에서 “윤 대통령을 존경하게 됐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공개 석상에서 일본 측 고위 인사로부터 같은 말을 들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세미나 청중의 상당수는 일본 도쿄에서 수학여행 온 남녀 고등학생들이었다. 약 30여 명의 일본 학생들은 2시간 가까이 귀를 쫑긋 세워가며 경청하는 모습이었다. 이 중 3분의 1가량은 통역기를 끼지 않고 있었다. 한국어를 알아들을 수 있는 학생들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모리 전 차관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할 때 주한 일본 대사관의 고위 관계자도 동석했다. 그에게 “일본에서 수학여행 온 학생들을 보고 감동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밝게 웃으면서 “감동했다”고 했다.
제주포럼 일화가 상징하듯 지난해 3월 윤 대통령의 결단 이후, 한일 관계가 안정화하고 있다. 네이버가 지분을 갖고 있는 ‘일본의 국민 메신저’ 라인 문제가 더 확대되지 않고, 한일 해군이 5년 반 만에 동해에서 발생한 군사적 갈등의 재발 방지에 합의한 것이 이를 상징한다.
그럼에도 많은 국민은 한일 관계 회복을 실생활에서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 이럴 때 양국 국민이 “한일 관계가 좋아지니 편리해졌다”고 느끼는 조치를 과감하게 취해야 양국이 더 미래 지향적으로 나갈 것이라는 제언이 많이 나온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입국 간소화 조치다. 양국은 2022년 코로나 사태로 중단됐던 상대국 관광객의 무비자 입국을 재개, 상호 방문객이 늘어나는 추세다. 관광업계는 올해 1000만명의 우리 국민이 일본을 방문하고, 300만명의 일본인이 한국을 찾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다 보니 특히 우리 관광객이 일본을 방문할 때 입국 심사장에서 오래 기다리는 사례가 심심찮게 발생하고 있다. 비행기가 일본 공항에 내린 후 30분 이상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례도 적지 않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사전입국심사제를 시행할 필요가 있다. 사전입국심사제는 출국 심사 시 상대국 입국 심사를 함께 받아 도착 후 전용 출구를 이용해 편리하게 입국하는 제도다. 이는 양국 간 합의로 이미 시행된 전례가 있다. 한일 월드컵대회 당시 2002년 5월 15일부터 6월 30일까지 사전입국심사제가 시행됐다. 당시 나리타공항·인천공항에 각각 14명의 출입국심사관이 파견돼 출입국 심사를 한꺼번에 진행했다. 한일 양국이 이 제도를 부활시키면 비행기에서 내린 후 입국심사장에서 줄을 서지 않아도 돼 여행 시간을 단축하게 된다. 한국은 전국에 공항이 15곳 있지만, 일본은 100개가 넘는다. 이 중에서 20곳 가까이 국제공항이어서 우리가 더 많은 혜택을 볼 수 있기도 하다.
내년은 한일 수교 60주년을 맞는 해다. 양국 정부가 윤석열·기시다 선언을 통해 정치적으로 의미 있는 분기점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이와 함께 한일 여행객들이 입국심사장에서 줄 서지 않아도 되는 조치를 시행한다면 양국 국민에게 실질적인 혜택을 주는 것은 물론, 나중에 경제 공동체를 만드는 기초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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