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적인 ‘금쪽이’ 연구소… 독립병입자 ‘산시바’ 인터뷰 [김지호의 위스키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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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넘게 다니던 맛집에서 평소 알던 맛이 안 났을 때. 손님들의 반응은 냉정합니다. 식당에 남다른 애정이 있던 손님이라면, 아마 몇 가지 실망스러운 단어들을 나열하며 혀를 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위스키 증류소도 맛의 일관성에서 자유롭기 어렵습니다. 위스키 맛의 70% 이상은 오크통이 결정합니다. 사람이 30%를 하면 나머지는 오크통과 천사들의 몫인 셈이죠. 흔히 위스키는 자연이 빚어낸 술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래서 가끔 예상치 못한 뜻밖의 결과물이 나옵니다. 한날한시 똑같은 오크통에서 숙성한 위스키도 맛이 전부 다를 수 있습니다. 숙성고 내 오크통이 놓인 위치나 특성 등에 따라 알코올의 도수까지 바뀌기도 합니다.
증류소마다 추구하는 방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수천수십만 개의 오크통에서 숙성 중인 위스키가 다 뜻대로만 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마스터 블렌더가 노선을 벗어난 친구들에게 ‘올바른 길’을 안내해주기도 합니다. 이는 여러 오크통에서 숙성 중인 위스키를 섞어서 증류소의 성격에 맞게 맛을 바로 잡아주는 행위입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가끔 증류소의 기조에 맞지 않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애물단지들이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수십 년간 돈 들여서 애지중지 키워온 자식을 버릴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증류소의 방향성과 결이 다를 뿐 맛이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금쪽이’들만 전문적으로 매입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독립 병입자들입니다. 그들은 증류소가 내놓은 매물들을 본인들의 취향에 맞게 선별해, 시장에 재판매하는 사람들입니다. 편집숍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지난 5일 사업차 한국을 방문한 독립병입자 ‘산시바(Sansibar)’의 옌스 드레비치(53세) 대표를 만났습니다. 그는 독일의 오랜 위스키 애호가로 동업자인 카스텐 에어리히와 함께 ‘림부르크 위스키 박람회’의 주최자이기도 합니다. 2002년 출범 이후 올해 22회째를 맞고 있는 독일의 림부르크 위스키 박람회는 희귀 위스키를 다루는 세계 최대 규모 행사 중 하나입니다.
20년 넘게 독립병입 사업을 해온 옌스는 철저하게 위스키를 맛으로만 평가합니다. 그는 증류소에서 들어오는 제안 중 90% 이상은 모두 거절할 정도로 오크통을 엄선해서 구매하고 있습니다. 직접 맛을 안 본 제품은 절대 구매하지 않는 그와 전 세계 위스키 애호가들의 입맛을 사로잡은 비법에 관해 이야기를 나눠봤습니다.
-보통 독립병입 위스키가 어떤 과정을 거쳐 우리 손에 들어오는지. 독립병입 회사들이 하는 일에 대해서 간단하게 알려주세요.
오크통을 고르기만 하면 모든 공정은 스코틀랜드에서 이루어집니다. 스코틀랜드에서 병입된 위스키는 독립병입자들의 물류창고로 배송된 후 각각의 업체나 개인에게 출고되는 구조입니다. 저희는 수출입을 관리하고 수수료와 병 라벨지의 삽화 작업만 하면 됩니다. 오크통을 고르는 게 가장 큰 과업인 셈이죠. 현재 독일 베를린에 있는 산시바 창고에서 약 4만 병이 출고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언제부터 위스키를 마시기 시작했나요.
1995년이었어요. 저는 금융업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스코틀랜드 고객이 한 명 있었는데, 자기와 함께 위스키를 마셔야만 계약서에 서명을 해준다는 조건을 걸었어요. 당연히 마신다고 했죠. 그때부터 위스키를 마셨어요. 그가 꺼낸 제품은 오래된 라프로익 10년이었어요. 아주 맛있더라고요.
-이 업계에 발을 들이게 된 계기. 산시바라는 브랜드는 언제부터 만들어졌는지 궁금합니다.
2000년부터는 술을 수집하기 시작했고, 2007년 ‘더 위스키 에이전시(The Whisky Agency)’의 설립자인 카스텐 에어리히(Carsten Ehrilich)를 만났어요. 그는 이미 오크통을 사고팔고 있었고 저에게도 독립병입 시장에 대해 가르쳐줬어요. 저희는 수많은 오크통을 직접 맛보고 분류해 그에 맞는 가치를 매겼습니다. 모든 오크통에 대한 정보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인덱스를 만든 셈이죠. 그렇게 산시바라는 브랜드가 2011년에 만들어졌습니다.
-업계 진입이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이름 없는 독립병입 회사 제품을 고객들이 살 이유도 없고요. 산시바 출범 당시 집중적으로 노렸던 시장이 있었는지요.
저희는 레스토랑이나, 바에 들어가는 위스키를 찾았어요. 음식과도 페어링이 가능한 제품을 원했던 것이죠. 심오하게 각 잡고 마시는 위스키가 아닌 쉽게 마실 수 있는 위스키. 저희 슬로건 중 하나가 ‘이지 드링킹(easy drinking)’ 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위스키 애호가들까지 만족시킬 수 있는 하이엔드 제품들도 다루고 싶었습니다.
독일의 고급 휴양지인 쉴트(Sylt)섬에 산시바라는 식당이 있습니다. 산시바는 주로 정치인, 영화배우, 운동선수 등 유명인들이 즐겨 찾는 곳입니다. 산시바가 가진 수천만 원짜리 와인 리스트나 음식은 정말 환상적이었어요. 하지만 그에 걸맞는 위스키나 럼 등의 음료가 없었던 것이죠. 저희는 틈새시장을 공략해 산시바만을 위한 위스키를 제공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산시바 주인은 매번 수백 수천 병의 위스키를 판매할 자신이 없다고 했어요. 보통 오크통 하나에서 300여병의 위스키가 나오거든요. 그래서 저희는 식당의 로고를 사용하는 대신 업장에 딱 필요한 만큼의 위스키를 제공했고 산시바의 문패로 독립적인 브랜딩을 시작한 것입니다. 현재 독일, 유럽은 물론 대만 일본 등 전 세계 시장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산시바 출범 이후 최초로 식당에 납품한 제품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나요?
부나하벤 21년 셰리 포함 총 6종이었습니다. 클라이넬리쉬, 탐두, 글렌키스, 럼 등이 포함돼 있었어요. 전부 알코올 도수 46도로 병입된 제품들이었죠. 식당에 납품할 제품들이라 마시기 편하게 물로 어느 정도 희석된 제품들이었어요. 반응이 굉장히 좋았습니다. 제품들은 금세 완판이 됐고 빠르게 소비됐던 걸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증류소 위스키와 독립병입 위스키가 가진 결정적인 차이에 대해 알려주세요.
저희는 트러플(truffel: 서양 송로버섯)찾는 돼지랑 비슷해요. 뚜렷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오크통을 선별하는 작업을 하는 셈이죠. 보통 증류소들은 20년~30년 전 맛을 똑같이 재연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일관성 있는 맛을 유지하는 게 중요한 작업이죠. 저희는 매번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 소비자들에게 다양한 경험을 선사하려고 합니다. 물론 양질의 위스키라는 전제조건 안에서요.
-증류소들이 오크통을 반출하는 이유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당연하겠지만, 일단 돈 버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이유는 다양합니다. 위스키의 과잉생산으로 물량이 넘치거나 품질적인 문제로 오크통을 판매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러한 오크통이 나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단순히 증류소 특성이나 기조에 안 맞는 오크통인 셈이죠. 저희에게는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제품군입니다.
과거 증류소들이 어려웠던 시절에는 빚 갚는 데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오크통으로 부족한 돈을 충당했었던 것이죠. 오늘날에는 오크통을 외부로 반출 안 하는 증류소들도 늘고 있습니다. 스프링뱅크 증류소가 대표적입니다. 원액 자체가 없어서 못 파는 곳이죠.
-독립병입 위스키 라벨을 보면 증류소 이름이 안 쓰여있거나, 단순히 지역명만 써놓기도 합니다. 은근슬쩍 증류소를 그림으로 그려 넣기도 하고요. 특히 유명한 증류소일수록 이름을 숨기는 경향이 있어요.
증류소 이름 저작권 문제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크통을 구매할 때 보통 3가지로 분류됩니다. 먼저 저작권 문제가 해결된 제품. 이럴 경우는 증류소 이름을 라벨에 표기할 수 있는 상황이죠. 또 내용물은 알지만, 증류소 이름을 밝혀지면 안 되는 제품. 알아도 모르는 척해야겠죠.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무런 정보가 없는 제품이 있습니다. 물론 마셔보면 어느 정도 예상은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도 굳이 저작권을 어겨가며 라벨에 증류소 이름을 표기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림은 창작물의 영역이라 저작권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줄타기를 잘해야겠죠.
-여러 원액으로 블렌딩뿐만 아니라 피니싱 작업도 따로 하시는지. 조만간 국내에 출시되는 블렌디드 위스키인 ‘산시바 21년’에 들어가는 원액도 알려주시면 좋을 거 같습니다.
물론 블렌딩은 합니다. 산시바 21년은 글렌로시스, 몰트락, 맥캘란 그리고 노스브리티스 증류소 제품들을 블렌딩한 셰리 위스키입니다. 몰트 함량이 40% 정도 됩니다. 개인적으로 실험적인 위스키를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리랙킹, 피니싱 작업 등은 따로 하지 않습니다. 이미 완성된 맛을 찾는 편입니다.
-어떤 기준으로 위스키 맛을 평가하고 오크통을 구매하는지 궁금합니다. 운동화 매장에서 신발 사는 거랑은 다르잖아요. 오크통이 한두 푼 하는 것도 아닌데, 확신이 서는 순간이 있을까요?
위스키를 마시다 보면 취향이 조금씩 바뀌기도 합니다. 딱 잘라서 말하기는 어렵지만, 개인적으로 은은하면서 우아한 위스키를 선호합니다. 아일라 위스키의 경우 과일맛이 풍부한 제품들. 셰리 위스키는 나무 맛이나 셰리 영향력이 너무 강하지 않고 드라이한 제품을 선호합니다. 버번 오크통에서는 열대과일 맛을 좋아하는 편이고요. 클라이넬리쉬 특유의 왁시한 맛도 좋아합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조금씩은 바뀝니다.
지금까지 못 해도 1만 개 이상의 위스키를 마셔본 거 같아요. 다양한 위스키를 접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좋은 위스키가 어떤 건지 본능적으로 느껴집니다. 가끔 숙성 연수나 오크통의 종류에 상관없이 뛰어난 제품들이 나오기도 해요. 위스키의 품질과 관련해서는 무엇보다 경험이 가장 중요합니다.
주류 박람회가 열리면 여러 사람이 저에게 다양한 샘플들을 가져옵니다. 대부분 맛이 어떤지 평가해달라는 주문들이죠. 이제는 위스키 좋아하는 사람들의 입맛을 어느 정도 찾은 거 같습니다. 여러 방면에서 타율이 높은 편입니다.
-위스키를 평가할 때 증류소에서 제공하는 샘플만으로 오크통 전체를 판단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날그날 컨디션에 따라 술맛이 변할 거 같기도 하고요. 이러한 변수에는 어떻게 대응하시는지.
시음할 때 보통 5~10밀리면 충분합니다. 많게는 20밀리까지. 위스키는 와인 시음과 다르게 삼켜야 합니다. 그래야 입안에서 느껴지는 팔레트부터 목 넘김까지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죠. 오크통에서 직접 맛보는 위스키와 샘플로 받았을 때의 차이는 큽니다. 오크통에서 직접 퍼서 마신 위스키는 훨씬 공격적이고 맛에 생동감이 있습니다. 오크통이 살아있는 점도 충분히 고려해야 합니다. 이 부분도 경험을 통해 풀어나가야 하는 숙제입니다.
가끔 모든 위스키에서 후추 맛이 날 때가 있어요. 즉시 시음을 중단하라는 몸의 신호죠. 백날 마셔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는 날입니다. 그럴 때는 그냥 쉬어야 합니다.
-한때 싸고 맛있는 위스키를 건질 수 있는 시장이 독립병입 위스키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증류소에서 출시되는 오피셜 제품들과 큰 차이가 없을 정도로 비싸졌어요. 또 품질 좋은 셰리 오크통이 갈수록 귀해지는 분위기예요. 위스키 가격도 천정부지로 오르고 있고요. 이런 상황에서 회사를 운영하는 게 쉽지만은 않을 것 같습니다.
최근 3년 동안 들어오는 제안 90%는 거절했어요. 증류소들이 황당한 제품을 너무 비싼 가격에 판매하려고 한 것이죠. 정말 가끔은 선 넘는 제안들이 들어오기도 해요. 전체적으로 시장 가격이 붕 떠 있는 느낌이에요. 이런 기조가 얼마나 갈지는 저희도 지켜보려고 합니다.
그래도 저희는 꾸준히 매력적인 제안들을 받아오고 있습니다. 가끔 가격이 조금 비쌀 때도 있습니다. 물론 그에 합당한 제품이라면 얼마든지 매입하기도 합니다. 그 제품의 가치를 알아주는 수요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증류소는 당연히 소량보다는 대량으로 거래하는 독립병입자 들을 선호합니다. 어느 정도 신뢰를 트면 자연스럽게 합리적인 가격의 좋은 오크통들을 제안받게 됩니다. 가격도 서로 절충안을 찾을 수 있는 관계가 만들어지는 것이죠. 모든 사업이 그렇듯 제일 중요한 것은 신뢰와 원만한 인간관계입니다.
-많은 사람이 독립 병입된 위스키를 고를 때 브랜드를 보고 사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가끔 황당할 정도로 이상한 제품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사람마다 입맛이 다르다곤 하지만, 맛있는 위스키에는 호불호가 없는 것 같습니다. 독립병입 위스키를 고를 때 성공률을 높일 방법이 있을까요?
전문가나 경험자들에게 조언을 구하고 많이 물어보는 게 가장 효과적입니다. 인터넷을 조금만 검색해도 여러 종류의 위스키 리뷰가 있습니다. 최대한 여러 정보를 취합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또한 훈련과 공부의 영역입니다. 여러 가지 맛을 경험해야 내가 어떤 위스키를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를 판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박람회나 위스키 시음회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취향에 맞는 독립병입자를 찾는 것이죠. 만약 어느 정도 윤곽이 그려졌다면 해당 브랜드의 제품을 조금씩 사보는 것도 방법입니다. 보통 그들도 본인들의 명성에 해가 되는 위스키를 병입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입국과 동시에 한국의 치킨을 먹고 싶어 했던 옌스 대표. 인터뷰를 마치고 치킨을 한 입 베어 문 그의 모습은 천진난만했습니다. 하지만 위스키 마실 때는 마치 원액의 모든 성분을 해부하는듯한 섬세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긴 인터뷰 시간에도 웃음과 긍정적인 에너지를 놓치지 않았던 옌스는 위스키는 경험이 중요하다는 말을 재차 강조했습니다.
위스키 애호가들 사이에서 독립병입 위스키는 ‘지뢰밭’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만큼 미지의 영역이고 예상했던 맛과 전혀 다른 결과물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미개척지를 개간하는 데서 오는 짜릿함과 그 변동성을 즐길 수 있다면 이보다 재밌는 탐험도 없을 것입니다. 모두가 열광하는 싱글몰트 위스키 대열에서 살짝 다른 길을 가고 싶다면 독립병입 위스키를 추천합니다. 물론 그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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