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윤의 하이쿠로 읽는 일본] [13] 꽃잎의 색처럼 시대의 색도 변한다
수국이어라
쪽빛으로 변하는
어제와 오늘
あじさい
紫陽花やはなだにかはるきのふけふ
나의 일본인 친구 마이코는 홋카이도에서 중학생에게 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십몇 년 전쯤 도쿄에서 같이 문학 수업을 들으며 친해진 사이다. 그때 마이코는 하이쿠를 쓰는 시인이 되고 싶다고 했고, 나는 소설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했다. 지금 마이코는 삿포로의 정서를 담은 하이쿠를 동인지나 작은 모임에 발표하며 학교에서 아이들을 지도한다. 하루는 그런 마이코와 라인으로 통화하다가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슌챵, 요즘 학교에서 보면 어린 친구들이 한국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피부로 느낄 수가 있어. 글쎄 한글을 배우는 걸 넘어서서 명찰에까지 자기 이름을 한글로 쓰는 게 유행이라니까.”
“와, 진짜야?”
“응. 한자나 히라가나로 된 자기 명찰 위에 소리 나는 대로 한글을 적은 아이가 많아. 어떤 선생님은 국어 수업 시간에 BTS의 ‘작은 것들을 위한 시’ 가사를 번역해서 학생들이랑 같이 읽었는데, 애들이 좋아서 소리 지르고 노래 부르고 난리였어. ‘너의 상처는 나의 상처’ 이런 가사는 정말 좋잖아.”
뭐랄까, 지난 세기의 억압만을 학교에서 공부한 나로서는 눈시울이 살짝 붉어질 만큼 감동적인 일화였다. 나는 학창 시절에 선생님에게서 일본이 과거에 얼마나 나쁜 짓을 했는지, 한글을 쓰지 못하게 하고, 독립운동가를 고문하고, 나라를 빼앗기 위해 악랄한 짓을 서슴지 않고, 그런 것들을 배웠다. 그런데 오늘날 일본의 학생들은 스스로 명찰에 자기 이름을 한글로 쓰기도 하고, 학교에서까지 한국 문화를 배우며 즐거워하고 있구나. 새삼 문화의 힘을 느낀다. 확실히 한일 관계는 움직이고 있다. 시대는 변화하고 있다.
일본의 근대화가 시작된 메이지유신 즈음 태어난 하이쿠 시인 마사오카 시키(正岡子規, 1867~1902)도 시대의 변화를 느끼며 이 한 줄 시를 썼다. 수국은 처음 피었을 때 흰색이었다가 토양의 산성도에 따라 분홍빛, 보랏빛, 쪽빛 등 다양한 색으로 변하며 자기 색깔을 드러낸다. 시인은 변화하는 수국의 색에 빗대, 에도에서 도쿄로, 사무라이에서 근대인으로, 천지가 뒤바뀌듯 격변하는 당시 일본의 어제와 오늘을 시에 담았다. 이 하이쿠를 읊고 나니 동네에 여기저기 피어나는 수국이 다시 보인다.
수국의 계절이다. 역사를 잊어서는 안 되겠지만, 아픔과 원망과 억울함을 되새김질하는 일이 어린 학생들에게 어떤 감성과 인성을 심어줄지는 생각해 볼 일이다. 서로의 조금씩 다르지만 조금씩 비슷한 문화를 공유하고 즐기며, 하루하루 빡빡한 현실 속에서 해방감과 자유를 느낄 수 있다면 그곳이 우리의 쪽빛 바다가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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