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립과 능력주의 [똑똑! 한국사회]

한겨레 2024. 6. 12.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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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조기현 | 작가

동료는 근심이 가득했다. 아버지가 집에서 나오지 않은 지 몇달째다. 사별 뒤 건설현장에 다니며 기숙사에서 지내던 아버지는 동료(아들)의 자취방에 잠시 머물기로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아버지는 구직 활동을 하지 않았다. 방은 조금씩 쓰레기가 쌓였고 술로 끼니를 때우는 경우도 늘었다. 무엇이 아버지 마음의 에너지를 앗아갔는지 알 수 없었다. 친구는 아버지가 더 깊은 우울함에 빠질지 모른다는 생각에 하루하루가 두려웠다. 그때마다 구인·구직 앱을 켜서 동네에서 할 수 있을 만한 일자리를 찾아서 보여줬다.

“이런 걸 왜 해. 이런 거 해봐야 내가 받던 돈의 절반도 받지 못하는데!”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곤 문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정말 자신이 원하는 일자리를 기다리는 것일까, 마음의 힘이 없어서 일을 피하려고 하는 말일까. 속마음을 이야기하지 않으니 이해할 길이 없었다. 동료의 근심을 듣던 중, 얼마 전 만난 한 남성 청년이 떠올랐다.

그는 구직을 하거나 일을 하지 않고 사람들도 거의 만나지 않는다. 2년 전, 공기업을 퇴사했다. 4년간 일했지만, 열심히 일해서 낸 성과를 선배들이 가로채는 게 분했다. 자신의 능력을 온전하게 인정받을 수 있는 곳에서 일하고 싶다는 열망이 컸다. 마음 한편에 불안감이 피어났지만, 자신의 경력이면 어디든 들어갈 수 있으리라 자부하며 불안감을 꺼트렸다. 몇달 잘 쉬고 구직을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대기업의 관련 직종에 서류를 넣어도 깜깜무소식이었다. 눈높이를 낮춰 유명한 앱에 면접을 봤는데, 연봉이 얼마냐고 물었다가 “다른 곳 알아보라”는 말과 함께 쫓겨났다. 이런 일이 반복될수록 자신이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부모님 연락을 피한 건 그때쯤부터였다. 고향에 있는 부모님이 지금 상황을 알면 “왜 잘 다니던 공기업을 나왔냐”고 타박할 게 빤했다. 제대로 된 일자리를 얻기까지 부모님 연락도 받지 않고, 고향에 가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간간이 형제를 통해 생존 소식만 알렸다.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지냈다. 모아둔 돈을 갉아먹지 않으려 친구들과의 만남을 피했지만, 사실 만나서 나눌 대화를 피한 것에 가까웠다. 친구들과 만나면 늘 가진 것들에 대한 이야기만 나눴다. 더 나은 직장, 모아둔 돈, 오른 주식 이야기에서 체면을 구기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 대면할 마음의 에너지도 바닥이 났다. 유일하게 대면하는 사람은 애인뿐이다.

“애인이 당장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를 계속 추천하거든요. 그걸 하느니 조금 더 기다리자는 생각으로 버티고 있어요.” 그는 원하는 일자리를 얻을 수 있을까? 얻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이렇게 버티고 있을 이들이 또 얼마나 될까? 이 버티는 일상이 고립에서 ‘은둔’으로 향하지는 않을까?

보건사회연구원의 2022년 실태조사를 보면, 은둔 청년이 외출하지 않는 이유 중 35%가 ‘취업이 잘 안되어서’였다. 가장 높은 비율은 ‘기타’로, 45.6%를 차지했다. 명확한 이유가 있어서 은둔한 게 아니다. 이는 은둔이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사회적 문제들이 누적된 결과임을 말해준다. 몇몇 연구에서는 가정, 학교, 직장, 친밀한 관계 등에서 갈등, 압박, 부정적 경험이 고립에 영향을 미친다고 설명한다.

동료의 아버지와, 얼마 전 만난 청년의 경우를 보면 부정적 대면 경험만큼이나 고립 문제에서 중요하게 여겨져야 할 게 있다. 바로 ‘원하는 일자리’를 얻지 못할 때 고립이 촉진되는 양상이다. 그들의 고립 근저에는 어떤 노동은 내가 할 노동이 아니라는 생각이 흐른다. 아무 일이나 다 해야 한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오늘날 능력주의가 촉진하는 생각이라고 여겨져서다. 능력에 따라 자원을 많이 가져가도 된다는 관점은 자원을 더 적게 가져가는 노동을 ‘쓸모없는’ 것으로 여긴다. 그렇게 쓸모 있음과 없음을 나누다 보면 쓸모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자기 자신까지 혐오하게 된다. 쓸모를 계속해서 따지는 세상에서 고립은 마지막 보호막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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