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색 궤적'으로 그린 시간의 예술

김슬기 기자(sblake@mk.co.kr) 2024. 6. 12.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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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84년의 달력을 상상해보자.

'2184'는 투명 아크릴 위에 컴퓨터로 계산한 12개월 치 달력을 인쇄해 중첩시킨 작품이다.

설치·영상·회화 등 폭넓은 매체를 활용하는 이번 전시는 폭소를 자아내거나, 시각적으로 충격적인 작품은 없지만 작품의 의미를 곱씹게 하는 철학적인 작업이 많았다.

미끄럼을 방치하는 사포로 글자를 인쇄해 넘어지지 않게 하면서도 발길이 누적되면서 낡거나 더러워질 수 있지만, 이조차도 의도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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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미술 듀오 로와정展
1981년생 동갑내기 작가
소금·달력·판화 등 활용해
이미지에 대한 사유 담아
시곗바늘처럼 회전하는 빗자루가 소금을 쓸면서 백색 궤적을 만드는 'salt of the earth'.

2184년의 달력을 상상해보자. '2184'는 투명 아크릴 위에 컴퓨터로 계산한 12개월 치 달력을 인쇄해 중첩시킨 작품이다. 숫자를 알아볼 수 없게 된 달력 상단에는 복잡해 보이는 이미지가 덧붙여졌다. 160년 뒤, 현재의 사람들이 모두 죽은 뒤에도 남아 있을 동물, 식물, 심지어 암세포 등의 이미지를 중첩해 콜라주한 것이다.

로와정 두 작가는 "아무리 그레고리력이라 해도 10만년에 3일 정도 오차가 있는데, 이 시간의 규칙을 인류가 절대적으로 믿고 움직이는 게 재미있었다. 달력을 이용해 먼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제2의 전성기'를 맞아 작년 뉴욕 구겐하임을 '습격'한 김구림·성능경, 작년 리움미술관 회고전을 성공시킨 김범 등을 통해 반세기 만에 K개념미술은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차세대 개념미술 대표 주자인 로와정의 11번째 개인전 '눈길에도 두께와 밀도가 있다'가 7월 6일까지 서울 삼청동 학고재에서 열린다.

18년 전 로와정을 결성한 1981년생 동갑내기 노윤희·정현석은 파리, 도쿄, 베이징 등에서 활발하게 전시를 열고 있다.

설치·영상·회화 등 폭넓은 매체를 활용하는 이번 전시는 폭소를 자아내거나, 시각적으로 충격적인 작품은 없지만 작품의 의미를 곱씹게 하는 철학적인 작업이 많았다.

'undecidable'은 언어를 전복적으로 활용한 평면 작업. '대면성(facingness)'이란 문구는 평면에 수채로 그리고, '평면성(flatness)'은 실리콘으로 입체적으로 표현해 모순적 이미지를 만들었다. 푸른 쪽빛의 커튼을 봉에 매단 '커튼'은 "땅에 발을 딛고도 매달려 있는 기분입니까?"라는 문구를 통해 커튼의 입장에서 관람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상대 언어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체계의 불완전성을 지적한다.

대형 설치 'untitled(19 May 2024)'는 겉으로는 TV 거치대처럼 보인다. 작가들은 직접 나무를 자르고 조립하는 과정을 영상으로 촬영해 양방향으로 설치한 TV를 통해 원경(遠景)과 근경(近景)으로 각각 상영한다. 근경을 촬영한 영상은 무엇이 만들어지는지 알 수 없어 마치 '추상화'처럼 보인다.

정방형의 다양한 이미지를 판화처럼 찍어내면서도, 물감을 동등하게 양쪽에 발라 모두를 전시하는 평면 작업은 '쉐어' 연작이다. 'AIM' 'WOW' 등 완벽한 대칭이 되는 알파벳 세 글자를 제목으로 붙였다. 각각의 그림이 전시장 곳곳에 흩어져 있어 '숨은 그림 찾기'를 하듯 짝을 찾을 수 있다.

'salt of the earth'는 시곗바늘처럼 회전하는 빗자루가 소금을 쓸면서 백색 궤적을 만들어낸다. 재료로 소금을 선택한 이유를 묻자 "인류의 많은 사건에 개입한 물질이고 세금이나 재산의 수단으로도 쓰였던 물질이었다. 계속 변화하는 이 작품은 과정이 결과가 되고 결과가 과정이 되는 순간에 대한 기록"이라고 말했다.

'shadow of shadow'는 계단에 비스듬히 놓인 합판 위에 인쇄된 작업으로 관람객이 통로를 지나다니면서 밟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 미끄럼을 방치하는 사포로 글자를 인쇄해 넘어지지 않게 하면서도 발길이 누적되면서 낡거나 더러워질 수 있지만, 이조차도 의도된 것이다.

구나연 미술비평가는 로와정의 작업을 "이미지에 대한 오랜 사유가 담겨 있다"면서 "특정 이미지를 맥락화하거나 도구화하는 것이 아닌 이미지의 요소와 텍스트의 요소를 동시에 발화할 때, 언어와 세계 사이에서 유실된 것들을 회복하게 되는 '이미지성'에 관한 것"이라고 평했다.

[김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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